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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이 흘러온 것이라 하여 '두류'

지리산은 멀리서 백두대간이 흘러왔다 하여 두류(頭流)라고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머무르면 달라진다고 하여 지리(地理)라고도 한다.
 지리산은 멀리서 백두대간이 흘러왔다 하여 두류(頭流)라고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머무르면 달라진다고 하여 지리(地理)라고도 한다.
ⓒ 지리산생명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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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세는 눈꽃이 시리도록 피어 있는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화엄사 인근에 다다른 그는 청아한 독경 소리를 들으며 발에 묻은 눈을 털었다. 다소곳한 돌부처의 어깨와 머리에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쌓여 있었다. 그는 계곡을 따라 고운 설경 속으로 두 시간 정도 걸어 올랐다. 고적한 산중의 나그네를 반기기라도 한다는 듯이 나뭇가지에서 눈송이들이 흩날렸다. 

멀리서 백두대간이 흘러왔다 하여 두류(頭流)라고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머무르면 달라진다고 하여 지리(地理)라고도 한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 이르는 주능선을 따라 남도의 두 강인 낙동강과 섬진강을 갈라놓는 산이 지리산이다. 김영세는 원시림 길을 걸어 오르다 능선이 훤히 나타나는 산마루에 발을 멈췄다. 부드러운 능선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는 다시 원시림 숲길로 접어들었다. 산은 갈수록 가팔라졌다. 하지만 숨이 차오를 때쯤이면 어김없이 약수터가 나타나고는 했다. 그는 차가운 약수를 들이켜고는 서둘러 산행을 계속했다. 어서 노고단 정상에 가서 일망무제로 트인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노고단 정상에서 구름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간간이 산 아래가 내려다보이기도 했지만, 바람에 날리는 눈발과 함께 풍경은 구름에 가려 이내 자취를 감춰 버리고는 했다. 그는 가지마다 하얀 눈이 붙어 있는 철쭉 사이를 걸었다. 바람에 가지가 다 뜯겨 나가버린 휑한 고목이 보였다. 그는 관목 사이로 난 좁은 길로 걸어 내려갔다. 그러자 설경이 한층 더 현란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설경은 일상과 타성을 단숨에 바꿔 버리므로 가히 '혁명적'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폭설이 내리는 밤의 설경은 혁명 전야와 같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고 했다. 아무튼 설경은 마음을 쇄신하기로는 최적의 자연이었다. 모처럼 김영세의 얼굴에 활기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정화의 편지를 생각했다.

이어지는 정화의 편지

우리는 중국 대륙의 동쪽 끝 강소성에서 출발하여 대륙의 한가운데인 호남성 장사로 갔다가, 남쪽 광동성으로 내려갔고, 다시 서북쪽 강서성으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다.

우리는 유주에서 반 년 정도 머물렀습니다. 유주는 기후도 온화하고 식품도 풍부했습니다. 유주에서 임시정부가 이룬 중요한 것은 '광복전선청년공작대'를 편성한 일입니다. 단장으로는 노백린의 아들 노태준이 취임했습니다. 제 조카 석동은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공작대의 대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버스 여섯 대에 나눠 타고 사천성을 향했습니다. 버스는 가파른 산길을 요리조리 헤치며 나갔습니다. 사천성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습니다. 결국 임시정부는 버스 여섯 대에 실려 중국의 산속을 헤매고 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불과 반년 전에는 목선에다 방을 꾸며 청사라고 했는데, 이제는 국무위원들이 타고 있는 찌그러진 중국 버스가 임시정부의 청사가 된 셈입니다.

도로도 험했지만 장개석 정부에서 내 준 버스도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중간 귀착지인 귀양에 이르기까지 무려 열흘 동안 버스에 있었습니다. 6,7백 킬로의 길을 가는데 그렇게 걸린 것입니다. 귀양에도 여섯 대가 함께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차들이 다 고장을 겪었는데, 더 많이 고장 난 차는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차가 도착하고 나서 나흘에 걸쳐 여섯 대가 듬성듬성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귀양에서 하는 일 없이 또 사흘을 끌어야 했습니다. 운행 일정이 지연되어 예산이 바닥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경에서 돈을 보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정이 딱했습니다. 시간을 끌수록 그만큼 여관 숙박비가 더 들어 비용이 추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남편도 모르는 비상금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4년 동안 가져다 준 월급에서 조금씩을 모아 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돈을 내보였습니다. 남편은 빙긋 웃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의 뜻을 알아차리고 이동녕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내 놓은 200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이동녕 선생의 반응은 참으로 복잡했습니다.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워했다가 금세 낯빛을 흐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임시정부의 궁핍한 속사정을 보인 것 같아 가슴이 아프셨던 것 같습니다. 모르긴 해도 우리 일행 중 몇 명 정도는 그 정도의 비상금은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뜻 내 놓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원래 상해에서도 자금 조달을 맡았잖습니까? 그러니 제 돈이 먼저 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제 비상금 덕분에 귀양을 떠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귀양을 출발하여 500킬로를 더 가서 우리는 사천성 남쪽 끝에 있는 기강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기강은 사천성과 귀주성의 접경지대에 있는데, 기강에서 불과 30리 정도에 중국 정부가 있는 중경이 있습니다.

김동삼과 조성환 두 분이 먼저 기강에 도착하여 변두리에 100여 명이 묵을 수 있는 집을 얻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시내 쪽으로 따로 집 한 채를 얻어 임시정부 청사로 썼으며, 가까운 강변에 방 몇 개를 더 얻어 독신 국무위원들의 숙소로 정했습니다.

이시영 선생은 숙소가 불편했던지 따로 방을 얻어 나갔습니다. 김구나 이동녕 선생을 비롯한 모든 분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고생을 자처하시는 분들인데 이시영 선생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 분은 제게 공부도 가르쳐 주시고 구두도 사 주셨지만, 다소 자기본위적인 성품이어서 미덥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독립군을 무료 치료하는 모차르트 의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곳을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중국의 패전을 의미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과 조카 분의 소식이 궁금합니다. 건강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가 있을는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정화 올림.

중국 동북삼성 중 하나인 길림은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곳이 길림이었다. 무오독립선언에는 진정한 민족대표라고 할 수 있는 순수하고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일찍이 김일성은 이곳의 육문중학교에서 2년 간 수학하면서 북경대학 영문학부 출신 상월로부터 사회주의 이념을 전수했다. 지금도 이 학교의 교정에는 김일성의 동상이 서 있다. 또한 길림 사람들은 중국인이건 조선인이건 하나같이 안중근을 가장 훌륭한 위인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길림시 송화강변, 가로수가 아름답게 늘어져 서 있는 외인촌에는 작고 아담한 병원이 새로 문을 열었다. 병원의 이름은 모차르트 의원이었는데, 의사가 여자라고 했다. 그녀가 일본인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중국인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사실 그녀는 일본의 의과대학을 졸업한 한국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중국인이라고 소문이 난 것은 아마도 그녀가 명문 길림의대의 교수직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진료실에서는 언제나 커피 냄새와 모차르트의 음악이 있다고 했다.

얼마 후 길림성의 한국 독립군들 사이에서는 유쾌한 소문이 하나 나돌기 시작했는데, 그 모차르트 의원에 가면 아름다운 여의사가 친절하게 치료를 해 줄 뿐만 아니라 치료비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치료를 마치고 떠나는 한국인에게 꼭 한 가지 질문을 한다는데, 그것은 '혹시 김문수라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아느냐'는 물음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김문수를 모르는 한국인들은 아주 안타까워하곤 했는데, 그것은 만주에서 본명을 쓰는 독립운동가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니 김문수라는 미지의 사나이도 어느덧 그녀만큼이나 유명인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모차르트병원에 독립군 서너 명이 위급 환자를 들쳐 업고 문을 두드렸다. 의사는 환자를 눕히고 그의 눈동자를 살폈다. 그러다 그녀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환자의 골상이 그가 찾는 김문수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너무도 위급한 상황이었으므로 그녀는 곧장 수술 준비를 시켰다.

"수술이 성공하더라도 소생하실 가망은 거의 없습니다."
의사의 말을 들은 독립군들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최선을 다 해 주시고 그래도 가망이 없으면 고통 없이 가시도록 해 주십시오."

의사는 환자의 본명을 알려주실 수 있느냐고 말했다. 일행 중 한 명만 환자의 본명을 아는 것 같았다.
"성은 김이시고 함자는 영 자, 호 자이십니다."

순간 그녀는 가슴이 저려서 자기도 모르게 목 부위로 손이 올라갔다. 환자는 고려혁명당 제1부부장 김영호였고, 그는 김문수의 부친이자 김영세의 실형이었다.

김영호는 다음 날 아침 유언 없이 눈을 감았다. 의사는 그의 유품을 챙겨 놓았다. 독립군들은 그의 시신을 가져간다고 했다. 당의 규정대로 화장 절차를 밟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유품 중에는 빛바랜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젊은 아내와 동생과 간난아이 하나가 그와 함께 모두 사진에 들어 있었다. 의사는 사진을 거두어 소리 없이 서랍에 넣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약 200회까지 연재됩니다.



태그:#길림성, #고려혁명당, #모차르트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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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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