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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서원 강인당 앞의 느티나무 거목
 자운서원 강인당 앞의 느티나무 거목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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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무 한 번 안아보렴."
"얼마나 굵은지 재보게요? 혼자서는 어림도 없겠는데요. 적어도 어른 서너 명이 팔을 벌려야 감싸 안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들에게 한 번 안아보라고 하자 얼마나 굵은지 재보라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니야, 그냥 너 혼자 한 번 안아봐? 그 고목은 이곳에서 몇 백 년을 살았으니 혹시 멋진 개혁정치를 꿈꿨던 율곡 선생의 숨결이 느껴지는지?"

그때서야 아들은 아비의 마음이 이해가 됐는지 두 팔을 벌리고 거목을 안으며 나무에 귀를 갖다 대어봅니다.

거목을 안고 선현의 숨결을 느껴보다

율곡선생을 기리는 신도비와 비각
 율곡선생을 기리는 신도비와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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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저 나무 두 그루 엄청 크네요, 몇 백 년은 됐을 것 같은데."

막내아들은 강인당 앞에 이르자 우선 놀라운 것이 엄청나게 커다란 두 그루의 나무인 것 같았습니다. 계단 위 건물 앞 좌우에 버티고 서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정말 대단한 모습이었습니다.

"무슨 소리가 들리긴 들리는데 이 소리가 율곡 선생의 숨결인지 그냥 나는 소린지는 구분을 못하겠는데요. 하하하."
"선생의 숨결은 귀로 들리는 게 아니야. 가슴으로 느껴야지."

그러나 그때쯤 아들은 나무를 안았던 팔을 떼고 율곡 선생이 후학들에게 예절교육을 시켰던 강인당 앞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지난 16일 경기도 파주지역에 흩어져 있는 파주3현의 유적을 둘러보던 중 율곡의 자운서원 안에서였지요. 첫 번째로 들른 윤관장군의 묘역을 거쳐 두 번째로 찾은 곳이 율곡 선생의 자운서원이었습니다.

율곡 선생의 사당과 묘역, 그리고 기념관이 함께 들어서 있는 자운서원은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자락이었습니다. 나지막한 산자락에 포옥 안긴 서원은 입구 주차장 아래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작은 들을 품어 안고 있었습니다.

자운서원 앞 논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
 자운서원 앞 논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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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문을 들어서면 왼편 언덕 위에 선생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 비각이 날아갈 듯 날렵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1631년에 세워진 비는 글씨가 희미하여 읽기가 곤란했지만 이항복의 글을 신익성이 썼다고 합니다. 전액은 김상용의 글씨구요. 비면의 굵은 상처들은 6.25 한국전쟁 때의 총알자국들이 아닌가 짐작이 되었습니다.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 오른편에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왼편 골짜기에 강인당, 그 뒤편에 사당인 문성사가 있었습니다. 문성사에는 선생의 위패뿐만 아니라 커다란 초상화도 비치되어 있었지요.

그리고 정문에서 맞은편 산자락에 선생과 모친인 신사임당 등 가족들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묘역으로 들어가려면 여견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경사가 완만한 돌계단을 오르자 가족묘역이 아늑한 모습입니다.

율곡선생의 사당 문성사
 율곡선생의 사당 문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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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선생의 묘가 조상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서 조금 이상한 모습이네."

아우는 묘의 배치가 일반 다른 가족묘들과 다른 모습이어서 조금은 낯설어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묘는 중간쯤에 있고 율곡 선생과 부인의 묘가 맨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묘역의 배치가 율곡 선생이 부모님과 가족들을 품에 안은 형상이어서 오히려 좋아 보입니다.

백성과 국가를 위하여 개혁을 추진했던 정치가

기념관 안에는 율곡 선생과 어머니인 신사임당에 관한 각종 자료들과 시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선생의 일생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일대기 그림이 눈길을 끕니다. 2층에는 선생의 학문과 사상, 문학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율곡 선생은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주의자였으나 당시 시대가 처한 정치와 현실 세상에 대해서도 예리한 판단력을 가졌던 현실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을 통해 경서와 학문을 익힌 천재였습니다. 과거시험에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한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지요.

묘역의 맨 위에 있는 율곡선생의 묘
 묘역의 맨 위에 있는 율곡선생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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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유학의 근본이념에 따라 스스로 수양하여 지혜와 덕을 쌓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은 인본주의자였지요. 그는 당시 유행이기도 했던 지방이나 산 속에 숨어 세상을 관조하고 비판만 하는 은자가 아니라, 조정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진짜 유학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또 그의 학문과 양심에 따라 세상 사람들이 서로 돕고 각자의 삶을 영위하며 보람을 찾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선생은 조선사회에 수준 높은 도덕정치를 실현함으로써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개념을 통한 차원에서 인권이 보장되는 평화로운 세상을 열어가려고 했습니다.

율곡선생이 살던 시대는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00여년이 지나 건국이념과 가치체계가 쇠퇴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선생은 당시 아무도 말하지 않던 악법과 폐습 등 국정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여 나라의 부흥을 꾀한 개혁가이기도 했습니다. 인재등용에 있어 서얼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가 시행하고자 했던 개혁의 한 부분이지요.

기념관 안에 있는 선생의 6조계
 기념관 안에 있는 선생의 6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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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개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첫째,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格君心), 둘째, 조정을 정화하는(淸朝庭)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 해이해진 관료벼슬아치들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肅官紀) 군마를 양성하여 국방을 공고히 하며(固藩屛) 도탄에 빠져 있는 민생을 구제하고자(救民生) 했습니다.

율곡선생은 이 다섯 가지 일을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조정에서 18년 동안 헌신적인 정치활동을 펼쳤지요. 그러나 선생의 개혁사상은 당쟁이 심했던 당시의 정치상황이 실현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군주였던 선조임금의 의식체계에도 문제가 많았던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결국 선생은 정치에서 손을 떼고 이곳 파주로 낙향합니다. 그가 말년을 보냈던 곳에 세워져 있는 정자가 바로 화석정입니다. 자운서원을 돌아보고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으로 향했습니다. 길가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논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임진강변 벼랑 위에 서있는 화석정
 임진강변 벼랑 위에 서있는 화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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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임진강변 높직한 벼랑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정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모습의 팔작지붕 형태였습니다. 임진강이 안쪽으로 굽어진 벼랑 위에 세워진 정자는 조망이 일품이어서 율곡 선생이 말년을 지낼 때는 정말 풍치가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낸 임진강변의 풍치 좋은 화석정

그러나 지금은 정자 아래 임진강과 정자 사이에 뚫린 강변도로를 씽씽 달리는 자동차소리가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강 건너 평야에서는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도 바라보였지만 거리가 멀어 자세한 모습은 볼 수 없었지요.

"옛날 임진왜란으로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 갈 때  바로 이 정자를 불태워 불빛을 이용하여 어두운 밤에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일까요?"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고 정자가 서 있는 위치를 보면 그럴 듯한 이야기였다. 율곡 선생의 앞날을 내다보는 깊은 혜안을 드러내고자 하는 다분히 호의적인 전설이겠지만.

이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자세한 문헌 기록은 없습니다. 그 후 세종 때 선생의 5대 조부인 강평공 이명신이 세운 것을 성종 9년에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보수하고, 이숙함이 화석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합니다.

화석정에서 바라본 임진강 풍경
 화석정에서 바라본 임진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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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율곡 선생이 다시 중수하고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는데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아예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전합니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 황홍헌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이 밤에 강을 건너기 위해 정자를 불태운 이후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선생의 증손인 이후지와 이후방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6·25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답니다.

지금의 정자는 1966년도에 이 지역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에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이 되고 주변도 정화되었습니다. 건물의 정면 현판 화석정(花石亭)은 박정희의 글씨라고 하며, 정자 내부에는 율곡 선생이 여덟 살 때 바로 이곳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었습니다.

임진강 건너편 풍경
 임진강 건너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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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들 가에 달은 어둡고
빈숲에 범 우는 소리 들리는데
나를 뒤밟아 온 것 무슨 뜻인가
옛날의 명성을 그려서라네.

문을 닫는 건 인정 없는 일
같이 눕는 건 옳지 않은 일
가로막힌 병풍이야 걷어치워도
자리도 달리 이불도 달리

온정을 다 못 푸니 일은 틀어져
촛불을 밝히고 밤새우는 것
하느님이야 어이 속이리.
깊숙한 방에도 내려와 보시나니
혼인할 좋은 기약 잃어버리고
몰래 하는 짓이야 차마 하리오.

- 율곡 선생이 기생 유지에게 써준 ‘유지시’ 중에서 중간부분-

율곡 선생이 황주기생 유지에게 써준 '유지시' 중 일부입니다. 율곡전서에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어느 학자에게 발견되어 지금도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랍니다. 사랑의 시는 전혀 쓰지 않았을 것 같은 율곡선생에게도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사실입니다.

율곡 선생의 사랑이야기

사연은 이렇습니다. 율곡과 유지라는 기생 사이의 사랑은 율곡이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해주에 있을 때 생겼답니다. 당세를 풍미하던 대학자요 정치가인 율곡의 나이 서른여덟 살, 용모와 재능이 뛰어났던 기생 유지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고 합니다. 유지는 본래 몰락한 양반의 딸로 관기여서 많은 시간을 관찰사인 선생 가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은 애틋한 정만 갖고 있었을 뿐 깊은 정을 나누지는 않았답니다. 기생 유지에게 시를 써준 사연과, 기생 유지를 생각하면서 쓴 율곡선생의 글에 이런 것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계미년(율곡의 나이 48세 때) 가을, 내가 해주에서 황주로 누님을 뵈러 갔을 때에도 유지와 함께 여러 날 술잔을 들었다. 해주로 돌아 올 때 유지는 조용한 절까지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이별 했는데 내가 밤고지(재령) 강촌에 묵게 되었을 때 밤에 어떤 이가 문을 두들겨 나가보니 유지였다. 밤새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나눴다.

기생이란 다만 뜨내기 사내들의 정을 사랑하는 것이거늘 이렇게 도의를 사랑하는 여인이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 더구나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감복하는 것은 더욱 보기 어려운 일이다. 아깝다. 여자로서 천한 몸이 되어 고달프게 살아간다는 것이, 그래서 노래에 사실을 적어 정으로 시작하여 예의에 그친 뜻을 알리는 것이다. 보는 이들은 그리 짐작하시라.

"난 조선시대 우리 유학의 쌍벽이라는 퇴계와 율곡 중에서 율곡 쪽에 훨씬 더 호감이 가는데 왜 그럴까요?"

화석정을 돌아 나오며 아우가 하는 말이었습니다. 자운서원과 화석정을 둘러보는 사이 아우는 어느새 율곡이이의 열렬한 팬이 되어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자운서원, #화석정, #율곡이이,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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