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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대구 군의학교에 입소했을 때 처음으로 먹어본 군대밥. 특유의 증기로 찐 밥 냄새가 코를 찌른다. 플라스틱 배식판에 보리밥과 멀건 된장국, 콩나물, 큼직한 감자조림이 올라온다. 아! 군대밥에 감자조림이 다 올라오다니!

 

'감사히 먹겠습니다'라는 구호와 함께 숟가락으로 약간 덜 익은 듯한 감자를 하나 올려 입안에 넣고 씹는다. 우적 소리와 함께 짠물이 나오는 감자. 차마 뱉지는 못하고 계속 씹으니 감자조림의 정체는 고춧가루물을 도강(渡江)한 짠 무였다.

 

사제(私製) 깍두기는 당연히 빨갛고 감자조림은 으레 노르스름했었는데, 뭐에 씌웠는지 배가 고팠는지 나는 그게 당연히 감자조림이라고 생각했다. 장교가 아침에 병식(兵食)을 축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만 가끔 일찍 부대에 도착해서 물 말아먹는 보리밥과 고춧가루를 셀 수 있는 콩나물과 감자조림 아니 무김치 아니 짠지도 입에 길들여 질 즈음 길고 긴 3년3개월의 복무기간도 끝나고야 말았다.

 

 

아침 일찍 출근하게 되면 종로 5가가 근무지인터라 웬만하면 명륜동에서 내려 걸어온다. 밤새 흥청이던 흔적은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는 쓰레기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을 뿐, 잘 꾸며놓은 점포며 학교 등교하는 학생들 틈에 끼어 걷는 것도 재미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등교시간에 상관없이 길거리를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는 것을 보면 세월이 지났어도 아이들 노는 것은 변함이 없다. 낮에는 길거리 조형물도 사람에 치어 눈에 띄지 않는데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모자이크 타일이나 제법 계곡물소리가 나는 인공폭포도 아침에만 느낄 수 있는 재미 중의 하나이다.

 

 

이화동 사거리와 종로 5가 사이는 분위기가 싹 바뀐다. 거리 한쪽 편에 큰 건물들만 들어 서있어서 상가가 형성되기 힘든 환경이기는 하겠지만, 문명과 문화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한 티가 풀풀 나는 구간이 한 블록 정도 계속된다.

 

주차장, 고물상, 학원, 분식집, 구두방, 요리학원, 1층 치과. 그 사이로 전에 보지 못했던 해장국집이 눈에 띄는 건 전날 과음 탓일 것이다. 뱃속은 느글느글 거리고 뜨끈한 국물로 속을 달래주고 싶은데 기름 둥둥 뜨는 뼈해장국이나 깔깔한 백반은 생각만 해도 올라올 것 같다.

 

 

가스불 위에 철판을 올려놓은 커다란 조리대가 활짝 열어 놓은 창문 너머로 시원스레 보인다. 차림표 옆에 셀프, 선불, 금연이라고 쓴 글씨를 붙여놓은 넓은 홀에는 해장국 먹을 시간은 지났는지 겨우 두 사람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치 콩나물, 우거지, 선지 해장국 등 해장국류와 알덮밥을 비롯한 4가지 철판 덮밥류가 보인다. 2500원, 3천원. 마치 IMF 직후 메뉴판을 보는 것처럼 착한 가격이다. 아니 요즈음 서민들 주머니 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서글픈 가격이다.

 

 

'나왔어요', 배식대에는 쟁반 위에 해장국 플라스틱 뚝배기와 밥 한 그릇이 달랑 올려져 있다. 김치와 깍두기는 식탁에 놓인 항아리에서 꺼내 작은 접시에 담으니 1식3찬이라 하여 국까지 포함된 군대 식판이 연상된다.

 

국을 한술 뜨니 '어!' 의외로 괜찮다. 새우젓, 김, 달걀이 따로 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콩나물 해장국은 묵은 김치의 새콤한 맛과 콩나물의 시원한 맛을 새우젓으로 미리 간을 해놓은 것처럼 맛이 수준급이다. 뜨끈하고 칼칼한 해장국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 뱃속의 느끼함을 걷어낸다. 날 계란을 아쉬워하며 밥을 반 그릇 말아 훌훌 떠먹으니 그제서야 세상이 똑바로 보이는 듯하다.

 

 

뻔한 반찬에 뻔한 해장국이지만 다른 해장국은 어떤지 궁금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그 집을 그 후로 네 번이나 더 갔다. 약간 새콤한 된장국물에 큼직한 선지가 들어 간 해장국, 양이 충분해서 위장운동에 분명히 도움을 줄 것 같은 우거지 해장국, 신 김치로 맛을 낸 철판 알덮밥.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집은 아니지만 푸짐하고 느끼한 국물을 생각 만해도 거부감이 느껴질 때 한 번 들를 만한 집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연세56치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해장국, #철판덮밥, #종로5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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