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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뉴스9>는 28일, '국악 외면하는 개정교과서'라는 뉴스를 보도했습니다. 갑갑한 마음에 댓글을 달기도 했는데 길게 쓸 수가 없어서 정말 오랜만에 기사를 쓰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먼저 댓글 쓴 내용을 좀 더 자세히 풀어서 설명한 후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15년 정도 지난 얘기입니다. 당시 여행 목적으로 홍콩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 비행기는 홍콩을 경유해서 유럽으로 가는 케세이퍼시픽 항공이었구요. 경유해서 가는 항공편이 좀 쌌기 때문에 이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었죠. 제 옆 자리에는 초로의 신사분이 타셨는데 스위스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2시간이 채 안 되는 비행시간이었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외교관에 관한 얘기였죠.

 

"우리나라 외교관들 문제 많다. 어쩌다 외교관들 사교모임에 갈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있더라. 물론 외국어 실력이 좀 부족한 측면도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화소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 무슨 말을 하지? 바이올린은 몇 줄인지 알아도 가야금이 몇 줄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외국 외교관들과 나눌 얘기가 뭐 있겠어?"

 

이어서 그 분은 제게 '정간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냐고 물으셨다. 아마 교과서에서 들어 보긴한 것 같은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지인에게서 '정간보'에 대해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원리가 참 대단하더라.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야. 선조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대부분 사람들이 이름만 들었지, 뭐 아는 게 있어야지. 그러나 외교관은 좀 달라야지. 다른 외교관 사이에 끼이지 못하고 항상 뒷전인 게 우리 것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하고 서양음악이나 문화에 대해 얘기하면 그 사람들보다 더 모를 거 아니야? 외교관들 파견하기 전에 국악교육도 좀 시켜서 보내야 돼.."

 

기존 기성세대들이 우리 음악에 대해 배운 게 뭐가 있죠? 기억나는 것은 ‘궁/상/각/치/우’ 정도. 대부분 사회지도층 인사라는 분들도 자녀들에게 서양음악만 가르칠 겁니다. 대통령의 따님도 줄리어드 음대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양음악만 접하고, 즐기고, 향유하고…. 우리 것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니 진정 우리의 소중한 문화콘텐츠를 써먹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우리 것에 대해 모르니 좋은 정책이나 방향이 나올 수 없는 겁니다.

 

국악은 제 3세계 음악?

 

김치는 맛있기 때문에 먹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맛을 들여 놓으면 평생을 김치 없이 살긴 힘들죠. 국악 역시 1, 2년 좋아하다 싫어하게 되는 음악이 아닙니다. 한번 좋아하게 되면 평생을 좋아하게 되고, 갈수록 그 깊은 맛에 빠지게 됩니다.

 

텔레비전에 국악 프로그램이 나오면 바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제 3세계의 음악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국악도 대부분의 사람에겐 제 3세계 음악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 음악에 대한 교양이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자주 접한 서양, 일본 음악에 더 큰 친근감을 갖고 있는 게 지금의 세대이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잘 알고 경험해 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열대의 나라에서 스키 선수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접하지 못한 것엔 관심이 없고 그 참 맛도 느낄 수 없습니다. 골프를 못 치는 사람도 박세리를 통해 자주 접하고 경기규칙을 알게 되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그래서 지금은 ‘박세리 키즈’라는 말도 나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축구를 즐기지만 미식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경기 규칙도 모르고 접할 기회도 거의 없기 때문이죠. 자기가 알아야만 다른 사람이 얼마나 잘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서양에선 오페라를 들어야 고상해진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일부 계층에서는 클래식을 들어야 교양이 쌓인다는 생각, 젊은 세대에선 재즈를 들어야 고상해진다는 생각이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음악을 들어야 고상해진다는 느낌, 자기가 태어난 나라의 음악을 모르면서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서 가끔 주인공이 가야금을 거꾸로 놓고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바이올린을 거꾸로 한 채 연주를 한다면 그건 아마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묘기대행진 정도로 생각하겠죠. 그러나 제작진이나 시청자 모두 별 문제를 삼지는 않습니다. 우리 음악에 대한 지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죠.

 

‘아는 만큼 들린다!’

 

신토불이는 음식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피자나 햄버거에 입맛을 들인 아이들이 된장찌개나 김치를 먹지 않는 것처럼 뱃속에 있을 때부터 브람스나 모차르트의 자장가를 듣고, 자라면서부터는 서양음계만을 전부로 받아들이는 음악 교육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쇼팽 같은 이름은 학교에서 배웠지만 우륵이나 왕산악, 백결, 박연 같은 이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있습니까? 유홍준 교수가 말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국악에도 그대로 통합니다. ‘아는 만큼 들린다.’   

 

그러나 우리 음악이어서 좋아해야 한다는 당위성만으로는 국악이 경쟁력을 가질 순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의 음악교육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국악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 중에 연주할 수 있는 국악기가 하나라도 있을까요?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민요나, 국악가요가 한 곡이라도 있을까요? 국악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 다양한 음색과 표현기교 등은 서양 음악과 견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국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영화 <서편제> 때문입니다. 단성사에서 영화를 관람했는데 영화를 본 후 한동안 정신이 멍했죠. 아마 신선한 충격 때문이었을 겁니다. 영화 OST로는 처음으로 CD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주제음악인 대금곡으로부터 심청가, 춘향가 등 10여 곡의 소리는 우리의 정서가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에 대해 한을 간직하고, 그 한이 소리로 응고되어 나왔는가를 잘 들려준 것 같습니다. 안숙선과 오정해의 폐부를 찌르는 한의 소리와 현재 전 문화관광부장관 김명곤의 구성진 소리는 한없이 깊은 인생의 심연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그리고 <서편제>와 관련해서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을 쓴 현각스님의 말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한국인들이 남의 나라 사람 같지가 않다. 참 설명하기가 어렵다. 내가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고 싶다면 황병기씨의 가야금 소리를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면 서편제 CD를 사서 들어보시든지. 특히 비오는 가을 날 듣는 서편제 소리는 얼마나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 바로 이런 감정, 이런 느낌, 이런 경험, 이런 의식이 내가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남의 것만 배울 것인가?

 

19세기 후반 서양미술은 일본미술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도자기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고 일본회화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이죠. 우리가 잘 아는 마네, 모네, 고호 등은 일본회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그 작품들을 흉내내어 직접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9세기부터 서양에선 일본문화=동양문화라는 등식이 수립되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동서양은 서로 문화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까지 외국문화의 수입국으로만 남아있어야 할까요? 언제까지 남의 것만 배우고 있어야 할까요? 우리가 우리 것을 모르고, 우리 음악, 춤이 가진 잠재적인 가치를 모르는데 누가 그 가치를 알아줄까요?

 

우리 문화 콘텐츠에다 외국 콘텐츠가 어우러질 때 새로운 양식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세계에 내보일 콘텐츠는 우리 고유의 자산인 우리 음악, 우리 전통 문화입니다. 현대에 맞게 퓨전화 되더라도 그 원류는 우리의 음악과 춤입니다. 한국적인 것이 가미되어야만 부가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서양음악이나 춤이 아무리 대중화 되어도 그건 남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산업시대 성장한 현재의 정책 입안자들은 우리 것에 대해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서양 것이 무조건 더 좋다고 배웠습니다. 그런 분들이 지금 문화, 교육 정책을 좌지우지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국악을 축소하는 것도, 그 중요성에 대해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 기소르망이 이런 얘기를 했죠.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우리가 가진 자산은 오랜 역사를 통해 구축된 문화콘텐츠입니다. 문화콘텐츠의 원형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옷을 입힐 때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됩니다. 비보이 공연에 국악을 접목하거나, 한국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외국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나요?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것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면, 그 어린 친구들이 외교관이 될 때쯤이면 우리나라 외교력도 좀 나아지겠죠.

 

이번 논란이 우리 문화, 우리 음악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반전의 계기로 작용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태그:#국악교육, #정간보, #서편제, #외교관, #KBS 9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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