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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와 극좌는 똑같은 것이다

김영세는 조카에게 일본의 군인들이 기타 이키를 얼마나 숭상하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처형당한 한 장교가 남긴 옥중 수기를 보여 주었다.

기타 이키의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은 한 자 한 획의 수정도 없이 원리대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는 절대 진리이다. 어는 누구도 그를 폄하하거나 훼손하는 일을 방임해서는 안 된다.

삼촌의 이야기를 다 들은 김문수는 나름대로의 소감을 말했다.

“골수 사회주의자가 극우 파시스트로 변화해 가는 입체적 스토리였군요.”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그는 변화하지 않았다. 갈팡질팡했을 뿐이다.”
“그는 극좌에서 극우로 변했잖습니까?”
“넌 과유불급을 알고 있지?”
“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어디서 그렇게 잘 못 배운 거냐?”

김문수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지나침과 모자람은 똑같다는 뜻이다.”
“아, 네.”
“요컨대 나는 극좌나 극우는 똑같은 것이란 말을 하려고 했단 말이다. 그것들은 무늬만 다른 파시즘일 뿐이다.”
“아, 네.”
“문수야, 네가 떠나겠다는데 나는 말릴 명분이 없다. 다만 나는 너 때문에 떠나지 않았었는데 너는 나를 두고 떠나겠다고 하는구나.”

김문수는 긴장했다. 그는 침을 삼키며 삼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실력을 더 쌓은 후에 떠나라. 그래야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독립운동을 할 수가 있다. 세상 모든 일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다른 것을 위한 일은 하나도 없다. 독립운동도 마찬가지임을 명심해라.”
“알겠습니다.”
“또 하나의 '갈팡질팡'은 들어가서 얘기하자.”
“삼촌, 국화주가 좀 남아 있는데 드릴까요?”
“고맙다.”

남자 된장 이광수

김영세는 조카에게 이광수의 얘기를 종합해서 들려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오고 있던 차였다.

새로 지은 양복에 새로 산 구두를 신고 나서니, 나도 제법 양식 신사가 된 양하여 마음이 흐뭇하더이다. 그러나 노상에서 진짜 양인(洋人)을 만나매, 나는 지금껏 가지었던 프라이드가 어느덧 스러지고 등골에 찬 땀이 흘러 부지불각에 폭 고개를 숙이었나이다.

“누구의 말인지 아느냐?”
“이광수의 말입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눈치로 맞춘 겁니다.”
“이광수가 15세의 아름다운 나이에 상해 거리에서 서양인과 마주치고 한 말이다.”

이광수는 일본에 여덟 차례 다녀왔다. 이는 그 시절 왕성하게 활동한 독립운동가가 상해에 다녀온 횟수보다 많은 것이었다. 대부분의 일본 유학생이 그랬듯이 그들은 먼저 미국을 선망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일본으로 돌렸다.

미국 가려고, 미국 가서 공부하려고. 그때 소문에 미국은 문명했고 자유의 나라고 또 돈 없이도 공부할 수 있다기에 미국행을 열망했다.(이광수 씨와의 교담록 삼천리 5호, 1933)

일본에 세 차례나 유학했던 그는 조선 근대화의 모델을 일본에서 찾은 계몽주의자 중의 하나였다.

우리가 사철 옷을 지어 입는 서양목, 옥양목 등 피륙을 짜내는 후지 방적회사의 아름답고 거대한 공장이 보인다. 참 좋은 경치다. 해가 뜨니 초라한 조선의 꼬락서니가 분명히 눈에 띈다.(청춘 9호, 1917, 동경에서 경성까지)

당연히 이광수도 김옥균과 윤치호를 길들였던 후쿠자와를 존경했다. 다만 후쿠자와가 이광수의 그릇이 작고 정치적 역량이 없음을 알고 그에 대해 흥미를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광수는 후쿠자와를 일본의 구사상을 타파한 근대화의 기수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친일 행각이라고 하면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친일의 계기가 된 것은 중일전쟁 이후 전시동원체제에서 빚어진 가혹한 탄압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아마도 대부분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20세기 초부터 민족을 흠집 내고 분열을 조장한 위장 계몽주의자들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파시스트 이광수

이미 이광수는 1917년에 아래와 같은 글을 잡지 <학지광>에 써 놓고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일본은 태서(泰西)의 문화를 수입하기에 성공하여 아세아 전체의 문화 도사(導師) 지위를 얻었고 장차는 동서 문화를 융합하여 독특한 신문화를 조성하여서 금후의 회람이 될 것이다.

이광수는, 일본은 문명의 세상, 과학의 세상, 경쟁의 세상이라고 하면서 구체적으로는 도로, 자동차, 철갑선, 아카시아, 울창한 산림, 관계, 수리조합, 농사개량, 육지면, 제사공장, 기계공장, 호소가와 농장, 신문, 은행, 전화, 전등, 수도, 위생조합, 공회당, 번쩍한 가옥, 후지 방적회사, 근대학교 등이 있는 나라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조선은 쓰러져 가는 모옥, 파리, 파리가 날아드는 음식점, 불결한 도로, 빨가벗은 산, 바짝 마른 개천, 초라한 사람들의 꼬락서니, 계모의 손에 자라나는 계집애, 불결하고 산란한 가옥 등이 있는 나라였다.(오도 답파 여행, 동경에서 경성까지.)

이광수가 2··8독립선언문을 쓴 것은 동경 유학생 중에서 지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거나 아니면 미국의 민족자결주의를 너무 믿은 나머지 국제 정세가 조선에 유리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았다. 그는 독립선언 전 동경을 빠져 나와 상해로 간다.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독립신문 편집을 맡는다.

이광수는 태평양회의가 조선의 독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을 알고는 조선 독립운동 무용론을 펼치게 된다. 그가 오염된 논설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것은 태평양회의가 조선 민족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 판명된 1922년이었다.

총독부는 정책적으로 그가 민족의 지도자급으로 부상하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생활비를 조선총독부에서 받아쓰고 있었다.

이광수는 <재생>이라는 소설에서 한 외국인의 입을 빌려, “젊은 조선 사람들, 셀피쉬한 성질 많소. 저를 희생하는 정신, 심히 부족하오”라고 말하고 있다. 이광수는 개인주의를 혐오했다. 이광수는, 만주사변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내부 균열이 시작되었다고 본 김영세와는 반대로 정국을 읽었다.

그는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되자, 아시아 최강국으로서의 일본의 위상이 확고해진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1933년 조선일보에, ‘오직 전쟁만이 사람의 에너지를 극도로 긴장하고 또 전쟁을 해내는 민족에게 고귀한 인(印)을 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이광수는 총독부가 자금을 마련해 준 잡지 <동광>에서, ‘이태리의 파시스트를 배우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미 이 잡지 창간호의 권두시에서, ‘힘! 오늘의 영광은 힘에 있다. 평화의 흰옷은 다 무엇이냐?  병대의 붉은 복장을 입고 몸과 맘을 다 무장하여라’고 외친다.

그는 일본이 이태리, 독일과 동맹국이 될 조짐을 보이자 조선일보에 ‘문화 높고 부하고 자유로운 이태리’라고 쓰면서 무쏠리니에게 ‘큰 단결의 지도자로 전 민족의 숭앙을 받는 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는 국제연맹을 탈퇴한 히틀러에게는 ‘젊은 독일의 기백’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발간한 동광총서 제1권에 자신의 <민족개조론>과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단행본으로 한데 담았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작자 김갑수는 최근 전작 장편 <오백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태그:#후쿠자와, #기타 이키,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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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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