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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김치'가 브랜드 김치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가족 맛'은 '외식 맛'으로 바뀌고 있다. 그만큼 서민들이 접할 수 있는 손맛 가짓수는 줄어드는 추세다. 상대적으로 인간미(人間味)에 대한 그리움도 커지고 있다. 꺼벙이, 고인돌, 맹꽁이 서당 등 추억의 만화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사람이 적지 않은 현상도 그 중 한 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만화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작품에 나타난 인간미의 소중함을 재확인하고, '맛'의 현재적 의미를 모색하는 기획시리즈 '만화미(味)담 오미공감'을 마련했다.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말]
만화가 김형배 선생
 만화가 김형배 선생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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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본 얼굴, 저절로 "혹시 김형배 선생님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신화적인 만화가와의 우연한 만남, 추억의 한 자락을 소개할 때마다 선생은 "아이, 뭘" "에이, 무슨" 하며 쑥스러워했다.

㈔우리만화연대 사무실에서 김형배(61) 선생과 우연히 만났을 때 이야기다.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하고 한편 신기하기도 했다. 선생 얼굴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본 기억이 별로 없는데, 어떻게 선생 얼굴을 금방 알아봤을까. 그렇게 추억의 힘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인 모양이다. 물론 선생의 독특한 외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소탈한 말이나 행동이 '만화계의 이외수'란 별명 그대로인 듯 했다.

22일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작년이 만화계 입문 40주년으로 알고 있는데, 특별한 행사가 있었냐는 질문에 "숫자에 별 관심이 없다"면서 "제자들 때문에 환갑잔치만 많이 했다"는 대답이 고작이었다.

"언젠가 이외수씨와 거리를 걸어가는데, '양아치' 두 명이 신기한지 구경 많이 하더라"며 웃을 때나, '이상하게 꼬인' 하드를 먹다가 뚝뚝 떨어지는 '국물'에 당혹스러워 할 때는 마치 소년 같았다.

허나 마냥 도인 같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로봇태권브이와 관련해 "원작자는 내가 아니다"고 하거나 "애국주의에 묻힌 부끄러움도 있다"고 할 때는 맺고 끊음을 분명히 했다. 돈맛이 문화를 아우르는 세태를 강하게 비판할 때 선생의 눈빛은 형형하게 바뀌었고, 그런 눈빛은 "뜨는 만화가만 있을 순 없지, 나같은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본래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만화계의 이외수', 도인과 소년의 두 얼굴

만화가 김형배 선생
 만화가 김형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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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기사단>을 그리워하는 어른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 남성들은 군대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소년 시절 그런 판타지를 내 만화를 통해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인사동에서 이제는 30·40대가 된 팬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나도 없는 책을 소장한 사람도 있더라. 감개무량하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진지하게 할 걸(웃음)."


- 냉전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도 있던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좋은 비판이다. 실제 <20세기 기사단>에서 아랍 지역을 안 좋은 쪽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편협한 교육을 받았고, 내 생각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열린 사고를 가질 수 있는 시점도 아니었지만…. 박통이나 전통 시절,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하나(웃음)."

- 작품에서 세련되고 깔끔함이 풍겨나고, 특히 그림체에서 그런 맛이 많이 느껴진다. 그렇게 된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궁금하다.
"내가 묘사한 세계는 어떤 리얼함이 요구됐다. 총기, 과학적 병기, 전쟁 장면 등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조금 드라이하다고 할까. 냉정하게 날카롭게 그릴 수밖에 없었다. 또 SF나 군사만화, 처음에는 나도 막연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남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물론 지금 같은 세상이 아니어서 정보 습득에 고생을 많이 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SF나 무기들에 대해 굉장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다른 만화를 선보이게 된 것뿐이다."

- 된장찌개의 구수함이 느껴지는 다른 추억의 만화들과는 작품들이 확연히 구분된다. SF만화나 군사만화에 있어 독보적인 평가가 따라붙는데.
"독보적인 표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품 범위가 한쪽으로 축소되는 것 같다. 멜로나 사람 사는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 문제의 로봇태권V를 그렸더니, 자꾸 그런 쪽으로만 청탁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지만…"

"멜로도 그리고 싶은데, 문제의 태권V 때문에..."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문제의 로봇태권V'라고 표현한다는 것이 낯설다. 누가 뭐래도 '로봇태권V'는 세상에 김형배란 이름 석자를 널리 알린 1등 공신이다.

김청기 감독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못지 않게 선생 작품들의 유명세 또한 대단했다. 아직 태권V 원작자를 김형배 선생으로 알고 있는 이가 적지 않다.

"김청기 감독 친구 이영복씨가 로봇태권V 1편 스틸 사진을 보여주면서 작품을 의뢰했다. 그래서 시나리오에 준해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내가 원작자인 줄 아는 경우도 있던데, 나는 원작자가 아니다.

당시 일본에서 마징가Z 같은 거대 모빌이 유행했다. 우리 색깔인 태권도를 넣었지만, 태권V는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일본 로봇물의 아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참 세월이 지나고…. 사람들이 만화나 애니메이션 가치에 눈을 뜨고, 뭔가 없나 찾다보니까 태권V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졌다. 애국주의에 부끄러운 이야기가 묻힌 셈이다."

- 자장면이 우리 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처럼, 태권V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며칠 전, 교토 만화박물관을 다녀왔는데 태권V를 그려달라는 일본인들이 있더라.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캐릭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서울 애니메이션센터 앞에 있는 로봇태권브이
 서울 애니메이션센터 앞에 있는 로봇태권브이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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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어떻게 하느냐다. 기획만 앞세워서는 곤란하다. 걸핏하면 '몇백억 만들어 뭘 한다'고 하니까 신뢰가 덜 간다. '쥬라기 공원 하나가 현대 자동차 몇만대' 이런 이야기가 문화컨텐츠 산업 진흥의 출발점이었다. 정치인부터 다 그 말만 하고 있으니. 갑자기 만화 애니메이션이 떴다. 얼마나 많이 학과가 생겼나. 아마 전 세계 만화학과를 다 합해도 한국보다 적을 것이다. 이거 눈물 나는 일이다. 과연 지금 그렇게 많이 길러낼 풍토인가.

외국 문화를 용해시키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빨리 승부 짓지 않으면 마치 큰일나는 것처럼, 일본문화를 개방했다.  몇 년에 걸쳐 그린 일본의 재미있는 만화들, 그 많은 걸 한꺼번에 다 시장에 쏟아냈다. 우리 만화 제작 시스템이 단단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리 만화광들, 일본만화를 일본인보다 더 잘 알지 않나. 이것은 비극이다."

"갑자기 많아진 만화학과, 눈물난다"

- '돈맛' 때문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 하다.
"맞다. 물론 조미료를 많이 치기도 하지만, 여러 요소가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 일본만화의 '맛'이다. 그런데 돈을 앞세우는 기획으로 그런 맛이 만들어졌을까. 아니다. 단단하게 몇 십 년을 해왔고, 그러다 보니 토종 맛이 세계적인 맛이 된 것이다. 문화가 만들어졌고 그 다음에 돈이 따라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문화를 무슨 전략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이게 잘못됐다는 것이다."

- 독자 연령이 다양해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내 나이 60이 넘었다. 내가 20대 문화, 힙합 만화를 그릴 수 있겠나? 내가 싸워야 할 자리도 아니고, 그렇게 해야 젊은 만화라 보지도 않는다. 내 또래랑 교감할 수 있는 만화를 그려야 한다. 그래야 만화에 대한 이해의 폭도 더욱 넓어지게 될 것이다."

- 최근 불교 이야기를 만화로 옮기는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
"다양한 작가들이 자기 세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 비록 돈 되는 만화가 왕이란 대세를 바꿀 수 없겠지만,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어야지. 뜨는 만화가만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또 상업만화 추구한다고 돈을 버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돈이 따라오도록 해야지, 특히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애장 작품 목록에 로봇태권브이 없어…
리얼함에 대한 목마름, 베트남전 자원 이력


'리얼'에 대한 김형배 선생의 목마름이 어느 정도였는지, 베트남전 자원 이력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선생은 "막연하게나마 작가를 하려면 자신을 극한 상황에 놓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 물론 그림 잘 그리는 작전과 병사를 소속 부대에서 놔주지 않아 베트남에 갈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선생은 '베트남 전쟁사'를 파고들게 된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나 책, 베트남 교과서도 구해서 봤다. 그랬더니 들여다 볼수록 내가 알고 있었던 베트남전은 점점 작은 세계가 되고, 나중에는 그 세계가 점점 커지면서 참으로 많고 복잡한 논리가 들어있는 전쟁이란 사실을 깨닫게 됐다. 우리가 배웠던 베트남전이 전혀 아니구나. 자유주의를 지키는 투사? 거지같은 소리였구나."

만화가 김형배 선생
 만화가 김형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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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에 대한 '갈증'이 작가 자신의 인식을 확대시키는 '필연'으로 이어진 셈이다. 그래서 같은 베트남전 소재 만화임에도 '투이호아 블루스(1987)'와 '황색탄환(1993)'이 그리는 전쟁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전쟁의 아픔'이 주로 나타나는 전작과 달리 '황색탄환'에서는 '용병의 고뇌'까지 나타나고 있다. 주인공 '훈'의 마지막 독백은 이렇다.

"통일된 베트남과 수교를 앞둔 오늘의 시점에서 20여 년 전의 시각으로 월남전을 조명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적 개념도, 이데올로기도 탈색된 전쟁. 그러나 당시 아무도 우리에게 베트남의 참된 역사를 말해주지 않았고, 또 우린 우리가 딛고 선 군화 발 넓이만큼 밖에 볼 수 없는 병사들이었어."

선생이 애착을 갖는 작품 목록에는 '로봇태권V'가 빠져 있다. '혹시 작품을 위해 많은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했느냐'는 질문에 선생은 "그런 면도 있다"고 답했다. 자신의 작품에 충실하기 위해 '작가가 딛고 선 군화발 넓이'를 넓히려 한 선생에게 '로봇태권V'는 애증어린 작품이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박인하 교수 "일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
김형배 선생 작품, 양식 코스요리에 된장찌개 맛 더해져

로봇태권V를 일본 로봇물 아류로 볼 수 있을까.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만화평론가)는 "파일럿 탑승이나 파일럿과 로봇이 일체가 돼 고통을 받는다든가 하는 당시 거대 로봇물의 트렌드를 반영한 작품"이라며 "최고로 발전된 일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김형배 선생의 SF만화보다 군사만화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박 교수는 대표작품 하나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투이호아 블루스>라고 답했다. 그는 "초기 SF류 작품을 많이 하다가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킨 작품"이라며 "한국에서 전쟁만화를 보기 힘들었던 시절, 리얼리즘 시각에서 전쟁을 마주보려 했던 초유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박 교수는 선생의 그림체에 대해 "만화적 과장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당대 만화들 그림체와는 아주 다른 성격으로,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70년대 미국 애니메이션 스타일과 가까웠다"면서 "당시로는 아주 독특한 화풍으로 이런 점이 독자들에게 상당히 현대적인 느낌으로 다가와 높은 호응을 받았다. 지금 봐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세련도가 떨어지지 않는 화풍"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끝으로 박 교수는 "선생의 옛 작품을 음식 맛에 비유하자면 양식의 코스요리를 맛보는 것과 같았다"면서 "휴머니즘 밀리터리 만화로 오면서 점점 인간의 맛도 담게 됐고, 그 결과 더욱 맛이 깊어져 된장찌개와 같은 맛도 함께 갖고 있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고 말했다.

투이호아 블루스 (게렉터 블로그 gerecter.egloos.com)
 투이호아 블루스 (게렉터 블로그 gerecter.egloos.com)
ⓒ 게렉터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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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태권브이, #김형배, #만화, #기사단, #황색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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