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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위안부피해자와 함께하는 호주친구들', 후원"호주시드니 한인회','시드니민족교육문화원'
▲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건립 후원의 밤 주최 '위안부피해자와 함께하는 호주친구들', 후원"호주시드니 한인회','시드니민족교육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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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상처를 남긴다. 상처는 잘 치료하지 않으면 짐승이 물어 뜯어놓은 것 같은 이빨자국을 남긴다. 잘 치유된 상처만이 흔적을 줄일 수 있다. 흔적이 남지 않아도 상처는 아픔을 통한 기억이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아픔을 당한 사람과 함께한다.

지난 17일 오후6시부터 저녁10시30분까지 진행된 시드니의  11차 촛불은 상처를 보듬고 아픔을 나누는 일을 했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긴 분들은 힘없는 조국에서 태어나 힘없는 백성으로 살다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폭력에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분들이다.

그들을 보고 뉴라이트는 "위안부 강제동원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일제시대 때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는 없으며 토지수탈도 없었다”(이상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뉴라이트 재단 이사장 겸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라거나 "정신대는 자발적 참여였다"(서울대 이영훈 교수)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람의 상처를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짓뭉개버린다.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그 어떤 폭력도 그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의 모든 상처도 다 합법적이고 합리적이라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길원옥할머니께 질문했다. “안병직 뉴라이트 대표가 위안부 강제 동원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데 그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신대를 자발적 참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때 나는 열세살이었습니다."
▲ 한인회관에서 증언하시는 길원옥님 "정신대를 자발적 참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때 나는 열세살이었습니다."
ⓒ 정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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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옥 할머니는 “13살 생리도 하지 않았던 그 나이, 나는 어린이였다. 어린이가 무얼 알고 했겠는가? 그 사람이 모르고 한 말이다”라고 일축했다. 할머니는 말했다.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나의 삶은 망가졌고, 아픔과 고통으로 큰 상처를 떠안은 나에게는 아직 해방이 아니다”. “나는 아직도 아픔에 갇힌 몸이다”

심리학자 에리히프롬이 말했다. “가난한 사람을 진정으로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뿐이라고, 친일의 대가로 부를 얻은 그들이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살아온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시드니의 촛불은 아픔을 나눈다. 색안경을 낀 그들은 절대 아픔을 나눌 수 없다.

끌려간 날 머리를 심하게 맞아 상처가 났다. 그때 13살이었다.
▲ 머리에 난 상처를 보여주시는 길원옥 할머니 끌려간 날 머리를 심하게 맞아 상처가 났다. 그때 13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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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81세,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라고 말씀하시는 길원옥 할머니는 “한국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줘야하는 거 아닌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치인들은 당한 사람들의 아픔을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은 철저하게 정치 논리에서 생각할 뿐이다. 당한 사람의 아픔에 서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

세상에는 객관성이란 말이 있다. 무어든 객관적이어야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픔은 객관적일 수 없다. 아픔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개인적인 문제를 보듬고 감싸 안아야하는 것은 정부다. 정부는 한 개인의 최후의 보루다.

한 개인이 폭력이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국가는 그가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그가 당한 폭력의 정도가 어떠했는지, 그가 진정으로 그 폭력의 피해자였는지를 객관적 공권력으로 가려 해결해주어야 한다. 정부가 그런 일을 소홀히 할 때 국가의 근간인 한 개인들은 정부에 불평하게 되고 나아가서 불신하게 된다.

“그때 나는 13살, 작은 방에 던져졌고, 그들은 나에게 밥을 주었지만, 나는 울기만 했다. 무서워서 울고, 집에 가고 싶어서 울고, 울기만 하니깐, 먹지도 않은 밥을 내가 버렸다, 배가 고팠는데, 군인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일이 반복되었다.”

정치인은 아픔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 시드니 한인회관에서 증언하시는 길원옥님 정치인은 아픔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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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를 끌고 간 사람은 한국사람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처벌 받은 사람은 없었다.”

개인은 주관적이지만 국가는 객관적이어야한다. 수 많은 개인들의 사정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법칙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객관적인 법칙이 작동하지 않고 일부의 편만 든다면 국가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국가는 다수의 개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정신대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는 “진실을 밝히고 사죄해야 한다.”“하지만 아직도 사죄하지 않았다.” 국가는 국민의 대표다. 국가가 사죄하는 것은 국민이 사죄한다는 뜻이다. 국가가 사죄하지 않는 것은 언제든지 다시 국민을 선동하여 그 짓을 또 할 거라는 암묵적인 의도가 깔려있다. 국민들을 내셔날쇼비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선동하고,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속여 다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직도 해방이 아니다, 갇힌 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길원옥 할머니의 삶을 시드니의 촛불은 보듬었다. 그리고 그 보듬은 마음으로 뉴라이트를 앞장세워 친일의 역사를 만들려는 이명박 정부의 객관적이지 못함을 끝까지 심판할 것이다. 시드니의 촛불은 지난 6월 7일 시작해 11번째 69일째 진행되고 있지만 정부가 객관적으로 개인의 삶을 살필 때까지 촛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진실은 밝혀져야한다는 염원이 담겨있다.
▲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 진실은 밝혀져야한다는 염원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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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관리인에게 머리를 맞아 생긴 상처를 보여주시는 할머니는, 머리에 난 상처는 보이겠지만 성병으로 난소를 절제해버린 보이지 않는 상처까지 아물고 치유되기까지, 아니 이 상처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하기 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길원옥님이 어디든 가서 증언하겠다는 각오처럼, 시드니의 촛불은 정부가 대다수의 국민을 멍들게 하는 정치를 멈출 때까지 놓을 수 없다.

“그때 내 나이 13세, 처음 생리를 했을 때 나는 생리가 무언지 몰라 울기만 했다. 흐르는 피를 막으려고 걸레를 찢어 막아 보았지만 피는 계속 흘렀다.”

정신대는 자발적인 참여였다고 주장하는 친일파들이 이명박 정권의 요직에 있는 한 그들은 국가가 힘없던 시절에 당했던 국민의 아픔을 외면할 것이고, 그 아픔은 오히려 실용이란 이름의 발전의 당연한 부산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시드니의 촛불은 한국에서 파워엘리트 집단으로 자리잡은 친일파가 청산되는 그 순간까지 들 것이다.

'함께가자 우리 이길을', '바위처럼'을 부르며 함께 한 시드니 촛불친구들
▲ 시드니의 촛불친구들 '함께가자 우리 이길을', '바위처럼'을 부르며 함께 한 시드니 촛불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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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건립을 위해 앞장을 선 "호주친구들"과 후원을 한 "시드니한인회"와 "민족교육문화원"에서는 박물관 건립을 위해  후원금을 모았고, 크로스 베이 갤러리에서 후원한 그림 경매를 진행했다. 이날의 그림은 호주 달러로 750달러에 낙찰되었다.

정신대대책협의회와 11차 촛불을 함께한 시드니 촛불친구들이 뜻을 모았다.
▲ 정대협과 함께한 시드니 촛불친구들 정신대대책협의회와 11차 촛불을 함께한 시드니 촛불친구들이 뜻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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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드니 촛불집회는 30일 오후 6시 스트라스필드광장에서 열린다.


태그:#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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