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8일 저녁 주경기장인 궈자티위창에서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며 밤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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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인의 스포츠 제전으로 알려진 올림픽이 다시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세계인에게 올림픽은 어떤 의미일까?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 각국 젊은이들이 우정을 다지고 세계 평화를 이룩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올림픽 경기는) 세계 평화 달성이라는 본래 이상대로 인류의 가장 큰 평화운동으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그 뜻이 있다."

이상은 인터넷에서 올림픽이라는 단어를 두드려 넣으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글귀이다. 이렇게 올림픽 정신, 올림픽 평화, 페어플레이, 스포츠 정신 등 올림픽이 현대인에게 주는 개념은 온통 긍정적이다. 그러나 112년 전인 1896년,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처음으로 근대 올림픽이 재현되었을 때도 이런 긍정적인 사고에서 출발했을까?

'이상적 인종' 백인 우월성 표현 위해 고안된 근대 올림픽

 쿠베르탱.
ⓒ 위키피디아 공공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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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쿠베르탱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근대 올림픽 창시자의 실제 이름은 피에르 프레디로 그리스 문명에 열광한 인물이었다. 프랑스 귀족 출신인 그는 쿠베르탱 남작 작위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역사학자이며 교육가였는데, 스포츠가 개인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1890년경 영국을 방문하고 온 그는 고대 올림픽 경기를 재현할 결심을 한다.
고대 올림픽 경기는 B.C. 776년에 제우스 올림피아 신을 경배하기 위해 창조됐는데 모든 그리스 시민(당시의 지배사상에 따라 당연히 여자와 노예들은 제외됐다)이 참여할 수 있었다. 4년에 한 번씩 열린 고대 올림픽에서는 스포츠 경기뿐만이 아니라 음악과 문학 분야에서도 경쟁이 이뤄졌는데, 올림픽 경기 기간 동안에는 전쟁도 중단됐다. 고대 올림픽은 거의 10세기 동안 지속되다가 서기 394년에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폐지된다.

쿠베르탱은 고대 그리스 선수들에게서 완전한 육체의 미를 발견했다. 그는 서양과 백인의 우월함을 굳게 믿은 사람으로, 백인만이 육체적·정신적인 면에서 우월한 인종이라고 생각했다. '이상적 인종'인 백인의 우월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올림픽 경기 재현을 상상한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스포츠를 통해 인류 평화를 이루는 올림픽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해 동안의 노력 끝에 쿠베르탱은 1894년 12개국의 대표자들을 소집, 올림픽 경기 개최의 필요성을 강조해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896년 제1회 올림픽 경기가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서 열리면서 근대 올림픽이 시작됐다.

백인 남성 우월주의 신봉한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

그 때문에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로 불리며 숭배를 받고 있는 쿠베르탱이지만 그는 사실 인종주의자, 여성 혐오자였다. 그는 이런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며 "월등한 인종인 백인종에게 다른 모든 종족은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등의 말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책 <영국 교육>에서 다음과 같이 편협한 종족관을 천명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종족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솔직한 시선에 강한 근육, 자신감에 찬 행동을 하는 종족이고 또 하나는 병색이 가득하고 비굴하며 체념한 얼굴에 패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종족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첫 번째 종족은 백인 남성이며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이 두 번째 종족에 해당한다. 그는 또한 여성의 올림픽 경기 참가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계집애들로 이루어진 올림픽은 흥미 없고 아름답지 않으며 무례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는 남성들(대부분 백인)만이 참여했으며 참가 허락을 받은 소수의 흑인, 인디언 등은 순전히 백인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이용됐을 뿐이다. 또한 제3회 올림픽 경기가 열린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인류학의 날'이라는 이름 아래 종족간의 경기가 별도로 이뤄지는 기상천외한 사건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백인 남성의 우월성을 굳게 믿었던 쿠베르탱의 자리는 점점 그 힘을 잃어갔다. 세상은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 때 비록 27명이라는 소수이긴 하지만 여자 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했다. 1920년대에 들어 차츰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한 여성운동으로 인해 1928년에 개최된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290명이나 되는 여자선수들이 당당하게 남자선수들과 같이 경기에 임했다. 힘들게 재현한 올림픽이 자신의 이상과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회의에 빠진 쿠베르탱은 1925년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 손을 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경기가 치러졌던 올림픽 경기장.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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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쿠베르탱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까닭

거의 10여년을 실의에 빠져 지냈던 쿠베르탱의 활력을 되살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1936년에 열린 베를린 올림픽이다. 나치 치하이던 베를린에서 게르만 종족(특히 아리아족)의 우월함을 부르짖는 슬로건 아래 올림픽 경기가 치러졌는데, 히틀러가 생각한 게르만 종족의 우월성과 쿠베르탱이 믿었던 백인의 우월성이 서로 만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쿠베르탱이 히틀러에게 호의를 품은 건 무리가 아니었다. 또한 히틀러로서도 자신의 권력을 인정해줄 제3자가 필요한 시기에 쿠베르탱 같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인물이 호의적으로 나오니 감지덕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히틀러는 쿠베르탱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까지 한다(히틀러의 제안이었다는 점 등이 고려돼 이 추천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제시 오웬스.
ⓒ 위키피디아 공공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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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올림픽 기간 동안 나치 정권은 그동안 노골적으로 자행했던 반유대인 정책을 세상에 감추고 전 세계인에게 평화롭고 관대한 독일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나치의 독일인과 고대 그리스인이 일맥상통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늘어놓기까지 했다.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에서 일어났던 베를린 올림픽 보이콧 운동은 빛을 보지 못했고, 베를린 올림픽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개회식을 시작으로 성공적으로 개최됐으며(참가한 모든 선수들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나치식 경례를 했는데 당시에 이 경례를 올림픽 경례라 명명했다고 한다) 독일은 이 대회에서 메달을 가장 많이 딴 국가가 됐다.

대회 시작 전 히틀러는 흑인과 유대인이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압력을 넣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역사의 역설일까. 흥미롭게도 베를린 올림픽에서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스타로 떠오른 선수는 흑인이었다. 올림픽 역사에서 최초의 육상 4관왕(100미터, 200미터, 멀리뛰기, 400미터 이어달리기)으로 기록된 '검은 탄환' 제시 오웬스다.

베를린 올림픽을 '생애의 역작'으로 받아들였던 쿠베르탱은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다음 해에 사망한다(물론 흑인 선수의 선전 때문에 쿠베르탱이 사망한 것은 아니다). 쿠베르탱의 시신은 스위스 로잔에 묻히지만, 그의 심장은 올림피아 성전 근처의 기념물에 별도로 안치된다.

정치로 얼룩진 올림픽의 역사

한편 올림픽을 정치 선전의 장으로 최대한 이용한 나치의 경험은 그 후 여러 올림픽 주최국들의 모델이 된다. 주최국들이 올림픽 경기를 자국을 정치적으로 홍보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 것.

이와 관련, 아테네 올림픽이 개막되기 두 달 전이던 2004년 6월, 프랑스의 국제 문제 전문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스포츠의 이상이라는 오용된 가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렇게 '올림픽의 이상'이라는 이름 아래 1936년 베를린에서 '유대인 배척 올림픽'이, 1980년 모스크바에서는 '스탈린 올림픽'이, 1988년 서울에서는 '경찰 올림픽'이 이뤄졌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언급하지 않고 지나간 예도 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이다. 올림픽이 열리기 10일 전인 10월 2일, 멕시코 정부는 당시 세계를 강타하고 있었던 학생운동에 발맞추어 평화롭게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을 향해 발포, 수백 명을 사살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올림픽을 개최했다. 올림픽의 평화주의를 전면에 내건 채.

앞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철학과 민주주의의 요람이던 고대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는 2008년 8월 올림픽 성화를 동양의 독재를 상징하는 베이징에 물려줄 것이다. 스포츠 찬양꾼들은 중국에서 자행된 대형 인권 말살에 눈감고 오직 올림픽 축제의 '성공'만을 바랄 것이다."

1989년 천안문 시위 무력 진압, 티베트 점령, 사형수 공개 처형 등의 부끄러운 경력을 반성하지 않는 중국인들은 올림픽 개막식에서 자국 문화를 세계에 자랑하는 데 주력했다. 80여 개 국가의 국가 원수를 초대함으로써 국력을 자랑한 중국은 이번 올림픽 경기를 통해 세계의 강국임을 선언했고, 다른 나라들은 인구 13억 명의 어마어마한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눈치를 보는 분위기다.

 베를린 경기장 입구 양쪽에 위치한 대형 조각물은 발달된 근육을 자랑하는 아리아족을 상징한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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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 산업혁명이 한창일 때 영국에서 근대 스포츠가 발전했다는 점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경쟁을 기본 축으로 하는 경제 성장을 위해 스포츠라는 또 다른 경쟁 도구를 활성화한 것이다. 또한 이렇게 경제 부흥과 더불어 도입된 스포츠는 19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에 전파되는데,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정치 이데올로기도 이와 더불어 널리 퍼졌다.
스포츠와 함께 성장한 자본주의. 그러한 자본주의를 향해 질주해온 중국에서 지금 올림픽 경기가 화려한 불꽃을 사르고 있다. 스포츠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 국력의 한 지표가 되는 오늘날, 스포츠 챔피언들은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고 그중 일부는 도핑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스포츠는 다시 한 번 세계인을 열광시킬 것이고, 시청자들은 TV 앞에 앉아서 마치 자신의 승리인양 자국의 승리에 환호하며 잠시 삶의 불행을 녹일 것이다. 그렇지만 올림픽이 우리의 삶을 달라지게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쿠베르탱 올림픽 인종주의 남성우월주의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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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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