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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처형 모습.
 의병 처형 모습.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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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큰 족적을 남긴 의병 918명의 자료가 새로 발굴·정리되어 국가보훈처에 서훈 대상자로 신청되었다. 이는 정부 수립 이후 의병 관련 최대 규모의 서훈 대상자 신청이다.

의병 연구가 이태룡(53) 김해건설공고 교사(국어)는 8·15광복 63주년을 앞두고 국가보훈처에 무더기로 의병 관련 서훈 대상자 서류를 제출했다고 14일 밝혔다.

이 교사가 신청한 서훈 대상자는 총 918명. 이 가운데 828명은 이번에 처음 신청했으며, 이미 서훈을 받은 90명은 등급을 조정해야 한다며 재심을 요청한 것.

그가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관련 신청서와 증거자료는 방대하다. 새로 서훈 대상자로 신청한 828명에 대한 증거자료만 1945쪽이고 신청서는 1696쪽으로 총 3641쪽 분량이다. 재심 대상자 90명에 관한 자료는 611쪽. 모두 4252쪽 분량인데, 이 교사는 15권의 책으로 제본해 제출했다.

이들 자료들은 고종․순종 실록과 매천야록, 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국사편찬위원회), 판결문(독립운동사자료집) 등을 총 망라한 내용이다.

국가보훈처는 올해 서훈 심사가 끝난 상태에 이번 자료가 제출되어 신청서를 검토해 내년 3·1절이나 광복절 때 서훈을 추서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이 교사는 "올해 광복절 때 서훈을 받기에는 신청이 늦었던 것 같다"면서 "국가보훈처로부터 심사를 거쳐 내년에 추서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태룡 교사는 23년간 의병 연구에 몰두해 오고 있다. 1986~1988년 사이 기초연구, 1989~1996년 사이는 답사, 1997~2008년 사이는 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해왔다. 오랜 연구와 조사를 통해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이번에 서훈 대상자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것. 그는 "의병 활동을 벌였지만 서훈을 받지 못한 인물들이 많아 자료를 정리해 제출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의병을 연구한 그는 관련 서적도 숱하게 냈다. 그동안 <의병 찾아가는 길> 1, 2권과 <국사봉에서 바라본 호남의병>,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 1~4권 등을 펴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그가 펴낸 <의병 찾아가는 길>을 우리 민족에게 유익한 책 19권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의병장 찾아 전국 누빈 이태룡 교사.
 의병장 찾아 전국 누빈 이태룡 교사.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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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급 5명은 누구?

어떤 의병들이 신청 대상에 포함되었을까? 국가의 서훈 심사 기준 등을 볼 때 그가 신청한 대상자들은 건국훈장 대통령장급 5명을 비롯해, 건국훈장 독립장·애국장·애족장·건국포장·대통령표창급 등은 수두룩하다. 먼저 건국훈장 대통령장급으로 보이는 대상자 5명을 보자.

박정빈(朴正斌, 이명 기섭). 그는 충남 목천군수를 역임했고, 고종으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관리였다. 고종이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켜서 국권회복을 하고자 노력했다. 황해도 유림에서는 그를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자 해주 지역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던 중, 13도 연합의진이 편성될 때 '교남(嶠南)(영남) 창의대장'이 되어 맹활약했다. 그에 관한 기록은 <독립운동사>에 '박기섭 의병부대'라는 큰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아직 서훈 추서가 안 된 상태다.

이종협(李鍾協). 고종 퇴위 전에는 외부참서관, 총영사관, 법부참서관, 법부민사국장을 역임한 고급 관리였다. 현직 관리가 벼슬을 내던지고 의병장에 올라 직접 일본군경과 싸운 경우는 퍽 드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황해도 도산·금천 지역에서 의병투쟁을 했고, 경술국치 후에도 중국에서 광복투쟁을 했다.

방인관(方仁寬). 고종 퇴위 이후 평안도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13도 연합의진이 형성될 때 '관서창의대장'으로 활약했고, 13도 연합의진이 성공을 하지 못하자 경기도 음죽·여주지역에서 의병투쟁을 벌였던 의병장이다.

우중렬(禹中烈). 전직 황해도 평산 판관 출신으로 경기·황해도 의병장 이진용의 장인이기도 하다. 의병들이 일본 군경과 싸울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총과 탄환임을 인식하고 연해주로 들어가서 총과 탄환을 구입해서 실질적인 의병투쟁이 되게 하였다. 일본의 비밀기록에는 황해도 의병장 18명 가운데, '폭도(暴徒:의병) 총수령'으로 가장 먼저 언급하던 의병장이었다.

최덕준(崔德俊). <독립운동사> 1권에 "함경북도 지역에 있어서 의병항쟁은 이범윤 휘하의 의병부대가 실질적으로 일본군과 싸운 회수와 규모로 보나 그 영향력으로 보나 가장 큰 위치에 있었고, 그 다음은 경성(鏡城)지방에서 활약한 최덕준을 중심으로 한 의병부대의 활약이 가장 뚜렷한 존재였다"라고 평을 하고 있다. 그는 함경북도 의병 수천 명(일본 비밀기록 4000명)을 모집해서 일본군과 싸울 때는 수백 명을 동원해서 싸운다고 기록한 함경북도 최고의 의병장이었다.

건국훈장 독립장에 해당하는 의병장 43명

의병 모습.
 의병 모습.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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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에 해당할 것으로 보이는 의병장은 43명이다. 도를 대표하거나 전국 규모의 거대 의진에서 참모를 한 의병장 또는 그런 행위로 인해 15년 징역, 종신징역, 교수형을 받은 의병장들이 해당한다.

박화남은 1907년 여름 이후 강릉·양양·울진·횡성·창평·영월·정선 등지에 의병의 깃발이 펄럭이게 한 의병장. 강원도 중북부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의병투쟁을 벌였던 이두항 의병장도 있다.

김준식은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나와 참위로 임관하여 활동 중, 군대가 해산되자 의분을 느껴 국권회복 투쟁에 나섰던 의병장으로, 당시 영관급 장교에게는 도지사급을, 위관급 장교들에게는 군수급을 제의했는데도 이를 뿌리치고 국권회복 투쟁에 나섰던 인물이다.

이익삼은 육군 참교 출신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켜 경기도 광주·용인·죽산·양성 등지에서 맹활약하는 바람에 그 명성을 듣고 찾아온 의병들이 2000여 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던 의병장.

민창식은 무관학교를 마치고 참위로 임관하여 활동 중, 군대가 해산되자 의분을 느껴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예산·신창·죽산·진천·음성·음죽 등지에서 활약을 벌였던 의병장이다.

영남 지역에는 전기의병 투쟁 때 노응규 의병장이 경남 안의로부터 의병을 일으켜서 진주성을 점령하자 진주부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노응규 의병장과 호응을 같이했던 정한용 의병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09년 봄 의병을 일으켜서 경북 영양·영덕·진보 등지에서 맹활약을 벌였던 정문칠 의병장이 있다. <매천야록>에는 그를 '영남의병장'이란 호칭을 썼으며, 그가 체포되자 영남지역은 평온해졌다고 할 정도였다.

북한 지역 의병장 발굴도 상당수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묘역.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묘역.
ⓒ 이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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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역의 의병장 발굴은 그동안 저조했는데, 이태룡 교사는 이번에 상당수 의병장을 서훈 신청했다.

황해도 지역 의병장은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는 해주군 주사였던 공태원이 있다. 당시 주사는 오늘날 시·도의 국장급에 해당되는 관리인데도 그가 선뜻 의병에 참여했던 것은 전 해주군수 정인국이 박정빈을 대신하여 황해도 의병 총대장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해주·평산·연안 등지에서 50~15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맹활약을 벌였다.

신경칠은 1907년 여름부터 2년 동안 의병 100~200명을 거느리고 황해도와 경기도 인접 지역에서 맹활약을 벌였다. 일제는 이른바 <폭도사편집자료>에서 그를 "황해도 지역에서 가장 맹렬한 수괴(首魁:의병장)"로 지목했을 정도였다.

평안도 지역에서 채응언 의진에서 활동하다가 독자적인 의진을 형성하여 채응언 의병장과 항상 100리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의병투쟁을 했을 만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강두필 의병장도 있다. 그는 경기도·평안남도·함경남도·황해도 경계 지역을 중심으로 경술국치 이후까지 활약했던 의병장이었다.

이태룡 교사는 "함경도 의병장은 수십 명인데, 실명 김일성이란 이름을 가졌던 의병장은 몇 년 전에 서훈을 한 바 있고, 많은 수의 의병장이 이번 서훈 대상자에 올랐다"고 밝혔다.

신돌석 장군은?

건국훈장 애국장급으로 신청한 의병은 436명이다. 1907년 충북 옥천·금산 등지에서 군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다가 붙잡혀 징역 7년을 받은 경북 상주 출신의 신돌석(영덕 출신 신돌석 본명은 태호) 의병장. 그의 행동으로 인해 신돌석 의병장은 실제와는 달리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했던 인물이다.

1907년 왕회종 의진에 참여해서 활동하다가 독립의진을 이끌고 의병투쟁 중 1910년 전사 순국한 김참봉 의병장과 의병 70~80명 정도를 인솔하고 강원도 영월·평창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채경천 의병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건국훈장 애족장급으로 서훈 신청자는 박종환 의진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은 양충신 의병, 민종식 의진의 운량관으로 활약했던 박제현 등 351명이다. 이밖에 건국포장·대통령표창 신청자는 각각 10명, 13명이다.

90명은 재심 요청

이태룡 교사는 이미 서훈을 받은 90명에 대해 재심을 요청했다. 그는 이들 중에 1명은 서훈을 박탈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나머지는 서훈 등급을 올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광복 후 정부가 수립된 지 60년이 지나도록 과거 일부 자료로 서훈했던 것을 바로잡고, 새로 발굴된 자료로 지금까지 서훈했던 1600여 명의 훈격을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재심사도 아울러 해야 할 때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서훈을 받은 인물 중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급으로 노응규·민종식·이인영 등 14명의 자료로 179쪽, 대통령장급으로 유종환·정경태 등 20명의 자료 180쪽, 독립장급으로 양상기·정주원 등 56명의 자료 252쪽을 제출했다.


태그:#의병, #이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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