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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은 평생 세 번 본다지요. 어려서 한 번, 저처럼 아이를 키우면서 한 번. 그리고 초로에 손주들 앉혀놓고 또 한 번. 

 

어느 일본인 그림책 마니아는 60이 넘어 빠져든 그림책의 기쁨을 한 권의 서평집으로 소개 했습니다. 그 분보다 운이 좋아 서른 중반에 그림책의 매력에 빠져든 저는 오마이뉴스 책동네에 차례로 소개할까 합니다.

 

눈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책 휴식

 

하루 5분, 눈을 편안하게 하고 지친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그림책의 세계로 오세요. 오늘 보여드릴 책은 권윤덕의 <일과 도구>입니다.

 

일부러 갤러리를 찾아가거나 두꺼운 미술사 책조차 펼치기 귀찮은 날. 잘 그린 그림으로 엮은 얇은 그림책 한 권이면 충분합니다. 그림책은 본문이 대체로 짧아서 읽기 편하고, 대개 아이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거친 말이 없습니다.

 

책장을 넘기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작가의 메시지가 적혀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한마을에 모여 살았습니다.

농사짓고, 옷을 만들고, 집을 짓고, 병을 고치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필요한 도구들을 하나씩 만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과 먹는 음식, 사는 집 모두

누군가 많은 도구와 기계를 이용해 만들었습니다.

 

 

이야기는 한 여자 아이가 고양이와 함께 마실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동네 지도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을 보여줍니다. 아이와 고양이는 의상실 쇼윈도 앞에서 안을 들여다 봅니다.

 

책에는 일곱 가지 작업 공간이 등장합니다. 농장, 병원, 구두 공장, 의상실, 중국집, 목공소, 화실. 하나의 직업마다 각각 두 장의 펼쳐진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장면에는 일터에 빼곡히 들어서 있는 도구들이 나옵니다. 복잡한 그림 어딘가에 고양이가 숨어요. 아이들은 이런 숨은그림 찾기에 능숙합니다. 세 살짜리 쿠하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도구들 사이에서 씨익 웃고 있는 고양이를 저보다 빨리 찾아냅니다.

 

손때 묻은 도구에 일과 꿈이 담겨 있어요

 

 

자주 사용하는 도구는 크게 배열하고 덜 쓰는 도구는 작게 흐트러뜨려 어떤 게 중요한 도구인지 알게 합니다. 눈에 익어도 이름이며 용처를 잘 모르는 도구가 많아서 책 맨 뒤에 안내된 도구 설명 '이런 일을 할 때는 이런 도구를 써요'를 여러 번 들척입니다.

 

 

두번째 장면은 도구를 사용해서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의상실에 들어간 아이와 고양이는 언니가 만들어주는 옷을 입어보네요. 줄자로 가슴둘레를 재어 보고, 품이 맞는지 대보기도 합니다. 옷본을 그리고 재단한 천을 가위로 싹둑 자르고, 재봉틀로 박는 과정이 한 화면에 나옵니다. 옷 한 벌이 만들어지는데 들어가는 공력을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책에는 실톳이나 노루발 같은 재봉틀 용어가 등장합니다. 그림은 공업용 재봉틀이지만 집에 있는 가정용 재봉틀에서 똑같은 부위를 찾아주니 쿠하가 재미있어 합니다. 그림 한가운데서 핀쿠션을 끼고 고양이 조끼를 만들어주는 아이를 보더니 핀쿠션에 대한 경험담을 꺼냅니다. 

 

"엄마 나 핀쿠션 잡았지? 맞지?"

 

돌잡이 할 때 흔히 올리는 돈, 실, 마우스, 연필 같은 물건들은 아이에게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은 물건들이어서 이모, 고모, 삼촌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개성있는 것들로 대체했습니다. 핀쿠션, 그림책, 도자기, 발레슈즈, 한의사가 쓰는 침 등을 올려줬는데 그때 이모의 핀쿠션을 잡았거든요.

 

요즘에는 바느질 놀이를 하자고 나서는 통에 감당이 안됩니다만, 옷 모양새에만 관심을 쏟지 않고, 옷을 만드는 일에도 관심을 갖는 아이로 자라면 좋겠습니다.

 

 

그림책의 마지막 부분. 각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이와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아이와 고양이는 여러 작업장에서 자신들이 만든 것들을 들고 돌아갑니다.

 

손때 묻은 도구와 일하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마다 다른 도구를 쓰지만 표정은 모두 비슷합니다. 살짝 미소 지으며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제 생활을 이렇게 그림으로 나타내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사용하는 부엌 살림, 손때 묻은 일기장, 책상의 중심을 차지한 손에 익은 컴퓨터, 읽다가 엎어둔 책과 밑줄 그을 때 쓰는 연필들... 그 도구들과 나는 어떤 표정으로 함께 하는지 앞으로 자주 돌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누군가 하나하나 땀 흘려가며 만들어 낸 소중한 것들

 

출판사 블로그에 실린 작가 인터뷰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구두공장 아저씨가 그러셨어요. 이런 일을 왜 취재하느냐고. 이렇게 대답했죠. 아이들이 백화점에 가면 진열대에 구두가 엄청 많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구두들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 하나하나 땀 흘려가며 만들어 낸 소중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그제야 그 아저씨가 경계심을 풀고, 오히려 고생한다고 위로까지 해 주시더라고요. 취재 가는 곳마다 이 비슷한 과정을 거쳤어요. 그러면서 책의 구도도 많이 바꾸었지요. 책의 마지막 장면은 본래 등장인물들이 다 같이 모여 음식을 먹는 것이었는데, 아이가 일터에서 어른들이 만든 물건들을 입고 들고 돌아가는 것으로 바꾸었지요. 지금 우리는 생산현장과 생활공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물건을 사고 사용할 때마다 이 물건을 어디에서 누군가 정성들여 만들었겠구나, 그런 생각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일하는 사람의 노동이 얼마나 가치있는가 보여주고 싶었다는 권윤덕의 그림책 <일과 도구>는 불화를 공부한 작가가 비단 위에 그린 그림들입니다.

 

나무틀에 비단을 매고 아교를 칠한 후에, 먹으로 선을 뜨고 가루물감을 아교에 개어 색을 냈다고 합니다. 고려 불화 기법에 따라 주로 붉은 색, 녹청색, 군청색을 비단 앞뒤로 여러 번 칠해 색을 냈는데, 이렇게 하면 색을 접시에 만들어 칠하는 것보다 색감이 풍부하고 깊이있게 표현된다고 합니다.

 

비단은 물감이 곱게 스며들고 뒷면에서 밑칠을 할 수 있어 은은한 색과 선명한 색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네요. 일하는 공간, 일하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재료라는 작가는 "화면의 빨강, 초록, 파랑, 검정색을 좇아 시선을 옮겨 가다가 여기저기 도구에 묻어 있는 사람의 흔적을 읽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책 마지막 자리에는 성수동 구두공장 사장님과 연희동 중국원 등 '도움 주신 분들' 리스트가 실려 있습니다. 작가 권윤덕은 열여섯 명의 일하는 사람들이 보여준 일터를 꿈터로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일과 도구>를 통해 자기만의 일터, 꿈터, 삶터를 더 행복하게 가꿨으면 좋겠습니다.


일과 도구

권윤덕 글.그림, 길벗어린이(2008)


태그:#그림책, #일, #도구, #노동,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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