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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 유나이티드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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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각자의 임무에 분주하다. 자신의 자리에서 부여된 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척척 해내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나사를 조이는 일이다. 은빛의 묵직한 스패너를 양손에 들고 참으로 열심히도 조여댄다. 그런데 조금씩 엇박자가 생긴다. 잠깐 주춤하는 사이에도 나사들의 공세는 쉴 새 없이 밀려든다.

겨우겨우 속도에 맞춰 내달리던 그는 나사들이 더 이상 몰려들지 않음에도 양손에서 스패너를 놓지 않는다. 그는 동료의 작업복에 달린 단추를 향해 달려들어 스패너를 연방 돌린다. 나사는 멈추었지만 그의 두 손은 아직도 작동 중이다. 그는 찰리 채플린이다.

'재팬' 아닌 '자판', 일본의 시스템

가게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식권 자동판매기.
 가게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식권 자동판매기.
ⓒ 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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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도착하는 순간 재팬(JAPAN)이 아니라 자판(자동판매기)의 나라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별별 자동판매기가 곳곳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쓸 수 있는 담배 판매기, 과연 아이들의 구매욕구를 불러일으키는지 심히 의심스러운 장난감 판매기 외에도 유명 회사 로고가 찍힌 아이스크림 판매기까지 가지각색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빈번히 접한 판매기는 바로 '식권 자동판매기'였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가게에서는 식권 자동판매기가 떡하니 한자리 차지하고 서서는 효율적인 시스템의 상징인 것 마냥 으스대고 있었다.

식권 자동판매기는 대개 출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가게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어 있다. 판매기에는 금방이라도 침샘을 자극하게 만드는 메뉴의 사진들이 가격표를 달고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다.

지폐를 투입구에 넣은 후 먹고 싶은 메뉴의 버튼을 누르면 '지징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식권이 나온다. 그럼 식권을 들고 앉고 싶은 자리에 가 앉는다. 이것으로 판매기는 제 임무를 마무리하고 나에게 바통을 넘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일본식 서비스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어금니를 꼭 깨물어야 한다. 내가 일한 가게는 저렴한 가격의 스테이크 체인점이었는데 '저렴'과 '체인점'의 상승효과는 종업원에게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선사한다.

밥서비스 안내하고 포인트카드 설명하고 주문을 외친다, 헉헉헉

나는 물컵을 공손히 들고 밝은 웃음을 띤 채 손님 앞에 등장한다. 손님으로부터 공손히 식권을 받아 세부적인 주문을 받기 시작한다. 스테이크 주문 손님에게는 밥이 무료로 제공되는데 밥의 양은 크게 대·중·소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사전에 설명한 후 주문사항을 식권에 기재한다.

더불어 무료 음료권을 소지한 손님이라면 음료까지 주문을 받아야 하고 포인트 카드를 제시하는 손님에게는 "이번에도 한 건 올리셨습니다. 부라보!"라는 표시로 도장을 찍어주어야 한다. 한 끼 식사 때마다 찍어주는 도장이 쌓이면 점수에 따라 무료식사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단골손님들은 대개 포인트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포인트 카드에 대해 1%라도 모르는 손님들을 위해 사전에 설명해야 하며, 원한다면 즉석에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것으로 세부적인 주문과 사전 설명이 끝나면 주방을 향해 암호화된 주문 내용을 기운차게 외친다.

예를 들어 김치찌개 2인분과 콜라 3잔이면 "김치 2, 콜라 3"이라고 외친 후 마지막에는 이것으로 주문이 완료되었다는 표시로 "부탁드립니다"까지 붙여야 한다. 그러면 이에 발맞춰 주방장을 비롯한 나머지 종업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알겠습니다"라고 외친다. 주문 내용을 접수했다는 뜻이다.

안 쪽에 위치한 부엌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열린 구조의 가게 내부
 안 쪽에 위치한 부엌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열린 구조의 가게 내부
ⓒ 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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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몇 초, 꼭 아껴야 하나?

주문을 미리 외치는 것은 식권이 주방장에게 전달되기 전에 조리를 시작해 조금이라도 빨리 식사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그럼 여기서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크게 외쳐서 들릴 정도면 가까운 거리일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점이다.

주방은 손님들이 다 볼 수 있는 열린 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손님들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주방까지는 몇 초 안 걸린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몇초'보다 '걸린다'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몇초 걸려 식권을 주방장에게 전달하면 주방장이 다시 한 번 메뉴를 재확인한다. 계획대로라면 음식은 거의 만들어진 상태다. 뜨겁게 달궈진 철판에 핏빛 고깃덩어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후닥닥 더운 밥을 푸고 득달같이 달려 손님에게 음식을 내려놓는다.

그리곤 이 벌건 고깃덩어리에 혹시라도 당황할 누군가를 위해 요리법을 아는지 묻는다. 흔히 말하는 '레어·미디엄·웰던' 등의 스테이크의 익힘 정도는 주방장이 아닌 손님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원하는 정도로 스스로 익혀먹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손님이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잘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손님에게는 요리법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식권 판매기는 묵묵히 식권만 토해내면 되지만 종업원들은 쉼 없이 입을 놀려대야 하는 형국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세세한 시스템 속에서 나와 같은 타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보너스로 모세혈관 같은 동선이 살기등등하게 그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르는 게 있다면 매뉴얼에게 물어봐!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 때가 거의 끝나 길게 늘어선 줄이 사라져 심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자 이 기세를 몰아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서의 본분을 충실히 이행한 후 자리로 돌아오니 다시 밀려들기 시작된 손님들로 분주한 상황이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서빙 할 채비를 하려 하자 직원(아르바이트 위의 정직원)이 제재를 하였다.

화장실에 다녀왔으니 손을 씻으라는 것이었다. 난 속으로 화장실 다녀와서 손 안 씻는 사람도 있나 하고 어이없어 하며 손을 씻었다고 하니 다시 어디서 씻었느냐며 반문하는 것이었다. 졸지에 비위생적인 인간으로 몰리는 것 같은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묻자 부엌에서 다시 씻으라는 말이 돌아왔다.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어 청결상태에 관한 불안을 잠식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장실은 안 되고 부엌은 된다'는 논리를 성립시켰다. 그리곤 이에 대한 나의 불만에 쐐기를 박아 버리듯 한 마디 덧붙였다.

"박상, 그게 바로 우리의 룰입니다."

세균 덩어리인 돈을 만진 후에는 손을 물로 씻는 것은 안 되고 알코올을 뿌리는 것만이 허용된다는 것도 룰이요, 컵에 담긴 물이 반 이하일 때에 물을 따라 주는 것도 룰이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시스템 속에서 모든 이들이 매뉴얼대로 움직인다.

찰리 채플린을 추억하다

출입구를 드나드는 손님들의 기척에 울려대는 벨 소리에 맞추어 자동으로 '어서 오세요'를 외치는 내 옆에는 찰리가 서 있다. 늙수그레한 찰리를 조롱하듯 그의 양손에 들린 스패너가 반짝인다.

수십년이 흘러도 여전히 보이는 건 시스템이다. 오히려 더욱 발전되어 나를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시스템만 남아 있다. 나 또한 시스템의 일부로 언제든 교체 가능하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세차게 내리쳤다. 물론 이러한 나의 경험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비롯된 특별한 경우일 수 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았을 때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매한가지이다.

시스템은 나날이 발전해가지만 사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불안하게 기우뚱거리고 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를라 치면 내 자리에는 나와 같은 누군가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현기증을 느낀 벌들을 탈탈 떨어내고는 벌집 가득 새로운 벌들로 채워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벌들은 많기 때문이다. 채 가시지 않은 어지러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찰리를 떠올리는 건 비단 나뿐일까?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태그:#일본 아르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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