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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사람들은 보통 2~4개 언어를 할 줄 안다. 수많은 그들의 방언 덕분이다.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은 섬마다, 지역마다 독특한 방언들이 있다. 이들 방언들은 거의 문법, 표현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외국어와 마찬가지다. 여기에 영어가 또 가세하고 있다.

이들은 학교에서는 영어를 사용하지만 집에 가면 각자 고유 언어(방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 영어는 필리핀 통합의 매개체 이들은 학교에서는 영어를 사용하지만 집에 가면 각자 고유 언어(방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 천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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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다시 방문한 Don Bosco 고등학교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한국말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용하세요’, ‘아뇽하세요’

첫날 가르쳐준 ‘anyeonghaseyeo’를 기억하고 이들은 운동장, 교실, 복도할 것 없이 어디서나 하루 종일 ‘아뇽하세요’를 계속하였다. 이들의 한국말 인사 솜씨가 참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럴까?

갑자기 영어와 관련된 이들의 일상 언어생활이 궁금해졌다.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영어를 써야한다. 집에 가서는 어떨까? 집에서도 영어를 쓰느냐는 질문에 많은 학생들이 따갈로그어나 고유 방언을 쓴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영어와 집에서 쓰는 말 중 어느 것이 더 편한가라는 질문에 영어라고 답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부모한테 배운 언어가 더 편할 텐데 왜 그러냐고 하니, 학교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집에 있는 시간보다 훨씬 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때 하나 생각이 떠올랐다. 갑작스런 상황에 처했을 때 이들은 무슨 언어로 말할까? 이것을 알면 이 학생들이 어떤 언어에 더 친숙한지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칠판에 문장 하나를 썼다.

‘When you are confronted with a sudden accident on the street, what kind of language do you speak out unconsciously?’
(길을 가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하게 되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어떤 언어로 말하는가?)

학생들에게 손을 들도록 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왔다. 기껏 한 두 개 정도의 언어를 기대했는데 무려 5개의 언어가 나왔다. English 21명, Tagalog 10명, Pampango 3명, Ilocano 6명, Bisaya 1명. 3명은 중복 선택이다. 아, 필리핀은 다국어 나라
라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싶었다. 38명 한 교실에서 학생들이 무의식적으로 편하게 사용하는 언어 종류가 5개나 되다니. 이것은 좀 충격으로 다가 왔다.

한 교실(38명)에서 무려 5개의 언어가 나왔다.
▲ 필리핀 학생들이 사용하는 언어 한 교실(38명)에서 무려 5개의 언어가 나왔다.
ⓒ 천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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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각자 외치는 소리를 듣고 싶어 각 언어 대표 한명씩을 불러냈다. 길에서 갑자기 트라이시클(tricycle:필리핀의 오토바이 운송기관)이 나를 치고 지나가는 위험했던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소리를 질러보도록 했다. 내가 먼저 우리말로 시범을 보였다. 

“으악! 큰 일 날 뻔 했네!”
아이들이 웃느라 정신이 없다.

Tagalog가 편하다고 말한 학생은, “Ngee!”
우리말로 '아이쿠'에 해당하는 감탄사.

Pampango 학생은, "Ay, Dyos ko! "
영어로 바꾸면 'Oh, my god!'

Ilocano 학생은, "Ayna apu! Matay akon"
우리말로 '아이쿠, 죽을뻔했네'

Visaya 학생은 '악!' 정도에 해당하는 한마디 외침뿐이다.
마지막으로 영어 대표 학생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Oh, my god”.

물어 보니 다른 학생이 하는 말을 일부는 알아 듣고, 일부는 못 알아 듣는다고 말한다. 이렇듯 이들의 언어 환경은 우리와 무척 다르다. 우리는 고유 말과 글을 하나만 가지고 있다. 전국 어느 곳이나 같은 언어, 같은 말이다. 사투리만 좀 심하게 써도 이질감을 느낀다. 그런데 필리핀 사람들은 문법과 표현이 전혀 다르며 서로 통하지 않는 방언들을 지금도 쓰고 있다. 2~3개의 언어(방언)를 말하며 여기에 또 영어를 함께 쓰는 것이 이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Bartolome Cayabyab(57)씨는 고등학교에서 필리핀 역사를 가르친다. 그는 Tagalog, Pampango, Ilocano, English 등 4개 언어를 할줄 안다. 왼쪽은 그의 딸 Joice씨와 손녀. Joice씨는 Tagalog, Pampango, English 등 3개 언어를 듣고 말한다. 손녀딸 역시 부모에게서 2개 방언과 영어를 동시에 배우고 있다. Joice씨는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 영어로 된 역사책을 따갈로그어로 가르치는 역사 선생님 Bartolome Cayabyab(57)씨는 고등학교에서 필리핀 역사를 가르친다. 그는 Tagalog, Pampango, Ilocano, English 등 4개 언어를 할줄 안다. 왼쪽은 그의 딸 Joice씨와 손녀. Joice씨는 Tagalog, Pampango, English 등 3개 언어를 듣고 말한다. 손녀딸 역시 부모에게서 2개 방언과 영어를 동시에 배우고 있다. Joice씨는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 천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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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Capas 지역 Capas National High School에서 국사를 가르치는 Bartolome Cayabyab(57)씨는, "필리핀 사람들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새로운 언어를 익히고 접하고 익히는 데 익숙한 편"이라며, 그 이유로 "섬이 많은 필리핀의 자연 환경이 자연스럽게 다양한 언어를 만들어 냈고, 여기에 적응하며 살아온 것이 큰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또 "300년 이상 스페인 통치를 받으면서 형성된 스페인어와 서구적 문화가 이후 미국의 통치와 학교에서의 의무적 영어 교육 정책에 의해 다시 손쉽게 영어로 옮겨 오게 되었다"고 덧붙인다.

다섯개의 언어가 공존하고 있는 필리핀의 한 교실. 이와 같은 현상은 필리핀 전국 어디나 비슷하다고 한다. 그제야 나는 학생들이 나에게 한국말 인사를 할 때 뭔가 자연스럽고, 어색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 이유를 알만했다. 학생들은 또 하나의 방언을 익히듯 그렇게 편하게 한국말 인사를 배우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이들에겐 한국말도 영어도 외국어라기 보다는 또 하나의 방언인 셈이다.

덧붙이는 글 | 영어 하나 배우기 위해 발버둥 치는 우리에 비해 필리핀 사람들이 언어에 접근하는 태도는 아주 자연스럽다. 그 이유 중 하나를 방언에서 찾았다.



태그:#영어,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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