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달리트 인권운동가 칸티. 인터뷰 중 이야기를 하다 착잡해진 모습.
 달리트 인권운동가 칸티. 인터뷰 중 이야기를 하다 착잡해진 모습.
ⓒ 진주

관련사진보기


<기자 주 : 칸티. 제 친구의 이름입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인도 사회의 달리트들에게는 달리트를 달리트가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첫 출발점입니다. 반대로 보면 각자의 이름이 아닌 카스트로 호명하는 것, 이것이 'untouchability(불가촉성)'의 시작이지요.

개인으로서 정체성은 카스트 제도에 기반을 둔 달리트라는 정체성에 의해 사물이 되고 집단이 되어 사라집니다. 카스트로 호명하여 그의 천한 신분을 확실히 각인시킨 뒤, 달리트들에게 차별과 폭행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호명에 의한 억압에서 끔찍한 살인에 이르기까지, 불가촉성과 차별의 스펙트럼은 측정할 수 없게 넓습니다.

칸티는 제가 파키스탄과 접한 인도 중서부의 구자라트에서 달리트들에 관한 현장조사를 실시하는 동안 함께 일해준 친구입니다. 몇 달 동안의 조사를 끝내고 난 어느 날, 또 다른 인도인 친구와 함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칸티는 처음엔 영어로 말하다가, 지난 시절 당한 차별로 인한 설움 끝에 울면서 힌디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절절한 사연은, 제 목소리보다는 칸티의 목소리로 직접 전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아래는 칸티의 목소리로 전하는 달리트의 삶에 관한 두 편의 이야기 중 1편입니다.>

이 이야기는 저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도의 수많은 달리트들은 나와 똑같은 경험을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내 경험을 다른 달리트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우리에게 공통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거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외국인들에게 하는 겁니다. 나는 운이 좋은 거네요. 어쨌든 난 달리트가 아닌, 달리트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니까요.

나의 '오염된' 동전

난 차마르라는 달리트 출신입니다. 인도에서 공식 명칭으로는 지정카스트에 속하는 거지요. 사람들은 흔히 우리를 두고 "언터처블(untouchables)"이라고 부릅니다. 초등학교 시절 이 'untouchability'를 많이 당했습니다. 마을에 있는 자스반트가드 초등학교에서 1학년부터 7학년까지 배웠습니다. 교실에서 나는 늘 맨 뒤쪽에 앉아야 했어요. 파텔로 불리는 상층카스트 학생들과 가까이 앉아서는 안 되었지요. 학교에는 물탱크가 있는데 달리트 출신 학생들은 따로 다른 컵에 물을 마셨어요. 크리켓 게임에도 쉽게 참여할 수 없었고, 신께 드리는 기도도 함께할 수가 없었답니다.

한번은 상층카스트 학생들이 동전을 바꾸어 달라고 했어요.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동전을 바꾸어 주었지요. 그 애들은 물로 동전을 씻은 다음에 동전을 가져갔어요. 우리가 갖고 있던 동전이 오염되었다는 것이었지요. 매일 학교에서 뭔가 창피한 느낌이 들었어요.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나에게 뭐가 문제가 있는 건지. 왜 우리는 열등한 아이들로 취급받는 건지.

나뭇잎 물 접시

학교 다닐 때 부모님은 늘 논에 일을 나가셨지요. 상층카스트네 논에서 일을 하셨어요. 나도 방학이나 휴일이 되면 형제자매들이랑 함께 논에서 일해야 했어요. 기억이 선명해요. 열 살 때쯤인가, 하루는 논에 일을 나갔는데, 갈 때 우리가 쓸 접시나 컵도 가져갔어요. 이웃 달리트들이랑 많이 갔었는데 컵은 달랑 하나였지요. 논에 갈 때도 줄지어서 걸어가야 했어요. 한참 논에서 일했더니 목이 말랐어요. 논 주인한테 물을 좀 달라고 했지요. 주인은 물을 주었어요. 제 손바닥에. 하나 있던 우리 컵은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느라 제 차지가 되려면 너무 참아야 했고, 다른 카스트들이 사용하는 컵이 많았지만, 그건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컵이었지요.

열 살짜리 손은 물을 담기엔 너무 작았어요. 손바닥을 모아 접시 모양을 만들었지만 물이 채워지질 않았어요. 논 주인이 제 손바닥보다 훨씬 위쪽에서 물을 부었거든요. 제 작은 손이 물통에 닿을까봐. 제 작은 손이 물을 오염시킬까봐. 물은 손가락 사이로, 옆으로 다 샜어요. 목은 말라 죽겠는데. 언제 물을 마실 수 있는 거지? 논 주인은 보다 못해 저더러 근처 나뭇잎을 따오라고 했어요. 그 위에 물을 부었어요. 나뭇잎 물 접시. 생애 처음으로 나뭇잎에 담아 마신 물. 알 수 없는 서러움. 다시는 이렇게 목이 마르지도, 나뭇잎에 물을 담아 마시지도 않았으면. 열 살의 나는 몰랐어요.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나도 이름이 있다구요, 칸티

 구자라트 주(빨간색으로 표시된 곳).
 구자라트 주(빨간색으로 표시된 곳).
ⓒ 위키피디아 공공자료실

관련사진보기

사람들은 나를 칸티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나를 '다헤드'라고 불렀지요. 나와 같은 출신의 카스트들을 이렇게 불렀어요. 이게 우리 카스트 이름이었지요. '어이, 다헤드.' 차마르라는 이름은 새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달리트에 대한 차별과 언터처빌러티를 법으로 금하면서 이렇게 부르는 것도 금지되었어요. 다헤드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를 부르는 이름이었어요. 아주 경멸적으로, 깔아뭉개면서. 구자라트에 사는 달리트들 중에서도 가장 천한 사람들로 치부되는 카스트가 발미키인데, 그들은 '방기'라고 불렸어요. 그들은 사람들의 분뇨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해요. 발미키는 '방기'라는 이름을 금하면서 새로 붙여진 이름이구요.

내가 속한 차마르는 신발수선공들이에요. 인도 사람들이 많이 신는 가죽 샌들이나 각종 신발을 수선하지요. 상층카스트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신발을 수선하라며 멀리서 신발을 던져주곤 했어요. 절대로 가까이 오지 않아요. 아버지도 신발을 다 수선한 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신발을 두면 신발주인들이 와서 가져갔어요. 서로 접촉하지도 아예 가까이 가지도 않는 거예요. 고쳐준 대가는 주는 사람 마음이었죠.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이라기보다는, 카스트 위계질서에 따라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을 의무로서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아무 대가가 없을 때도 있고, 뭔가를 줄 때는 남은 음식을 주거나 곡식을 주거나.

마을에는 결혼식이나 축제들이 많아요. 우리는 그런 행사에 참여하지도 않고 초대받지도 않지만, 할머니가 대개 마을에서 벌어지는 행사를 다 알고 계셨어요. 우리도 갈 수 있기는 하죠. 참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남은 음식을 가지러. 할머니는 우리 카스트의 다른 사람들이랑 함께 가서 행사가 끝날 때까지 다른 손님들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기다리셨어요. 혹시라도 눈에 띄면, 심지어 그림자라도 보일라치면, 다른 카스트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염되고 만다고 믿었죠.

행사가 끝나면 남겨진 음식들을 다 모아서 행사장 밖에다 버려요. 버려진 음식들을 한 곳에 두어달라고, 우리는 땅 구덩이를 파두곤 했어요. 사람들이 남은 음식을 모아 그곳에 버리면 우리가 얼른 가져와야지요. 며칠 동안 굶은 뒤에 먹게 되는 그 남은 음식들.

"칸티, 선을 넘지 마라"

가족이나 친지들 중 형들이 항상 동생들을 가르쳤어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든 카스트 규율과 관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요. 우리는 달리트라는 걸, 천한 카스트라는 걸 끊임없이 머릿속에 각인시켜야 했어요. 철저하게 체화될 때까지. 상층카스트들은 훨씬 우월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열등한 존재임을 말이에요. 절대 선을 넘어서지 않고 행동해야 했지요. 일상생활에서 저절로 선을 넘는 게 위험하다는 걸 알게 돼요. 선을 넘으면 바로 벌을 받거든요. 그것도 대부분 공개적으로 벌을 받았어요. 게다가 처벌은 상징적이고 집단적이었어요. 내가 실수를 하면 아버지가 벌 받기도 했고, 우리 카스트 공동체 전체가 대가를 치르기도 했거든요.

마을에 산림업을 하는 목재상이 있었는데, 우리 공동체 사람들이 거기서 일을 많이 했어요. 거기도 우리가 사용할 컵이 따로 있었어요. 우리가 물 마시러 갈 때 소리를 내야 했어요. 그래야 우리가 온다는 걸 알고 상층카스트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아 오염될 일이 없을 테니까요. 우리가 직접 물을 따라 마실 수도 없었죠. 물을 따라주는 사람이 우리든 컵이든 물통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따랐죠.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안하면 모두 대가를 치러야 했어요. 일주일 품삯을 모두 다 못 받기도 했고, 더 심한 대가를 치를 때도 있었고. 마을에 목재 상인들이 여럿 있었는데 힌두 상인들만 그랬어요. 무슬림 상인들은 우리를 특별히 차별하지 않았지요.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을 그만두거나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이런 일이라도 하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안 그럼 굶어야 하니까요.

할머니와 어머니는 상층카스트인 파텔에게 가서 우유를 샀어요. 우유 살 돈을 땅위에 올려두고 멀찍이 서 있어야 했지요. 상층카스트 사람들은 그 돈을 우선 물을 뿌려 정화시켰어요. 소위 말해 "성스러운 물"로 말이에요. 더럽든 깨끗하든 상관없이 달리트들이나 우리가 만진 것들을 정화시킬 명목으로 뿌려지는 모든 물은 이 "성스러운 물"이 되는 거예요. 애초에 "성스러운 물"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니까요. 지금도 이렇게들 해요. 도시는 훨씬 덜하지만 시골에서는 다들 이렇게 하지요. 시골에서는 누가누구인지 다들 아는 사이고 도시에서야 누가 누구인지 다 아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달리트들이 도시에서 집과 같은 부동산을 구매하는 거 쉽지 않아요. 구매를 위해 서류를 제출할 때 주소나 이름을 모두 기입해야 하니까요. 주소나 이름을 보면 카스트를 알 수 있어요. 달리트라는 걸 알게 되면 처음엔 팔려고 했던 사람들도 구실을 만들어서 팔지 않겠다고 해버리거든요.

"어이, 정부 사위, 와 봐"

 암베드카르(1893~1956). 억압받는 달리트를 위해 평생을 바친 운동가이자 정치인. 달리트 해방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인도 독립 후 공화국 헌법 제정 과정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했다(자료 사진).
 암베드카르(1893~1956). 억압받는 달리트를 위해 평생을 바친 운동가이자 정치인. 달리트 해방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인도 독립 후 공화국 헌법 제정 과정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했다(자료 사진).
ⓒ 위키피디아 공공자료실

관련사진보기

중고등학교 시절 상층카스트 출신 선생님이 두세 명 있었는데 늘 우리더러 "정부의 사위"라고 했어요. 비꼬는 말이었죠. 달리트들을 주류 사회에 편입시키는 정부의 정책들, 예를 들어 달리트들을 위한 법정 유보 정책(공직 임용 등에서 일정 비율을 달리트에게 할당하는 정책)이나 각종 복지, 서비스, 교육 정책들을 비꼬는 것이었어요. "어이, 정부 사위, 와 봐."

평생 잊지 못할 영어 선생님이 두 분 있어요. 한 분은 안슈야벤이라는 여자 영어 선생님인데 상층카스트인 브라민에 속했어요. 방과 후에 제게 따로 영어를 가르쳐 주셨어요. 제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에요. 자식처럼 대해주시면서 선생님 댁에도 데려가고 저희 집에 오시기도 했지요. 상층카스트와 달리트 사이에 집을 방문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늘 학급에서 일, 이등을 차지했었거든요.

중고등학교 마지막 시절 영어를 가르치던 상가니라는 남자 선생님도 있었어요. 이 분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아주 상반된 기억으로요. 이 선생님은 제게 늘 이렇게 말했죠. "넌 무엇 하러 영어 공부하니? 넌 영어 공부 할 필요 없어. 해서도 안 될 일이지." 늘 저를 절망하게 만들었죠. 이 선생님이 보기에 저 같은 달리트들은 결국 비인간적인 천박한 일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거지요. 한번은 제가 되물었어요. "왜 나는 공부를 해선 안 되나요?" 이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어요. "학교 공부를 하고 나면 네가 뭘 할 거냐? 설령 네가 좋은 성적을 받더라도 뭘 할 수 있겠냐? 너는 차마르다. 대학에 갈 수도 없어. 대학에 가서도 안 돼. 누가 너를 대학에 보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중고등 과정이 모두 끝난 시기에 제가 전교에서 일등을 차지했어요. 상가니 선생님이 성적을 알고는 제게 그랬죠. "너 성적이 뭔가 잘못된 거 같다. 뭘 한 거냐?"

제가 일등을 한 걸 알고 사람들이 저희 집에 많이 왔어요. 먹을 거랑 스위트랑 들고 와서 축하해주었죠. 근데 우리 집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었어요. 너무 가난해서 차 한 잔도 대접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 모두 내가 높은 점수로 일등을 했다는 걸 알았어요. 신문에도 났거든요. 정말 기분이 최고였죠.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깨닫게 되었죠.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거지? 나는 더 공부를 할 여건이 안 되잖아. 부모님은 돈도 없으시고. 난 일을 해야 했지요.

학교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받은 학생에게 그동안 마을에서는 251루피를 상금으로 주었지만, 저에게는 학교도 마을도 상금을 주지 않았지요. 난 달리트니까요.

제 삼촌 가운데 한 분이 당시 지방 정부에서 행정 공무원 일을 했어요. 돈이 조금 있으셨죠. 삼촌이 아버지께 저를 도시로 보내서 전기 기술을 배우게 하자고 제안하셨어요.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어요. 제가 공부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던 게 아니라 빚을 져가면서 공부를 시키고 싶진 않으셨던 거죠. 심지어 형제지간에도 말이에요. 결국 삼촌이 끝까지 밀어붙여서 아버지가 동의하셨어요. 삼촌이 말씀하셨죠. "칸티는 우리 중의 하나에요. 공부를 잘하잖아요. 우리가 용기를 줘야죠. 이게 어쩌면 칸티가 카스트라는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인지도 몰라요."

대학에서도 계속된 카스트 차별의 악령

학교는 바브나가르 타운에 있었어요. 나 같은 시골사람은 도시에도 카스트 차별이 있을 거란 걸 처음엔 알지 못해요. 학교에 등록할 때 내 출신지역이나 카스트를 알리게 되지요. 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대학에서도 상층카스트 출신의 학생들은 늘 그렇듯 우선권을 갖는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그 애들은 자기가 원하는 기숙사 방에서 지낼 수 있었어요. 나와 같은 달리트 출신의 학생들은 모두 따로 분리된 숙소에서 지내야 했지요.

인도에서도 구자라트는 여름을 지내기가 너무 힘들어요. 더위가 극심한 데도 물은 매우 부족한 탓이죠. 대학에는 상층카스트 학생들을 위한 물탱크가 따로 있었는데 우리들에겐 없었죠. 샤워도 할 수 없었고 옷을 세탁할 수도 없었어요. 물이 없으니까요. 마실 물도 충분하지 않았는걸요. 우린 상층카스트 학생들이 사용한 뒤 남은 물을 쓰려고 기다려야 했어요. 걔네들 숙소엔 전기도 들어오고 텔레비전도 있었지만 우리 숙소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대학도 시골과 다를 게 하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

난 삼촌이 주신 자전거로 통학을 했어요. 기숙사에서 대학까지 거리가 좀 멀었거든요. 시내에선 곧잘 영화가 상영되곤 했어요. 하루는 다바드라는 상층카스트 출신의 학생이 나에게 이러더군요. "네 자전거 좀 줘. 오늘밤 시내에 가서 영화를 봐야겠어." 나는 싫다고 했죠. 그날 밤 내 자전거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한편 너무 슬프더군요. 내 자전거를 망가뜨린 그 상층카스트 학생에게 불만을 드러낼 수 없었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야 했죠. 아무 말 없이.

상층카스트 학생들은 아무 달리트 학생이나 골라서 패곤 했어요. 이유 없이 때릴 때가 많았죠. 술에 취해 가지고 와서 심심풀이나 화풀이로 달리트 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둘렀어요. 우리에게 "No"를 말할 권리는 없었지요. 때리면 그냥 맞아야 했어요. 불만을 표시하면 대학 행정부로부터 욕을 얻어먹어야 했으니까요. 복종하는 게 낫죠. 

상층카스트 학생들은 우리에게 기숙사로 여자애들을 데려오라고 시키기도 했어요. 우리 숙소에서 여자애들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하면 방을 비워줘야 했지요. 우린 대학의 하인들처럼 일했어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학교를 암렐리라는 지역에 있는 도시로 옮겼어요.

암렐리에서 난 달리트 학생들을 중심으로 모임을 조직하기 시작했어요. 학교에 들어오는 달리트 학생들을 유심히 지켜보았지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학생회를 만들었어요. 달리트 청년학생연맹. 우리는 달리트 학생들의 학교 생활, 장학금이나 복지에 관련된 문제에 관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고소, 고발문이나 수상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어요. 나도 장학금을 받을 자격이 있었는데 못 받았거든요.

(*칸티의 이야기는 2편에서 계속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