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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가게 풍경 (위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상관 없습니다)
 옷가게 풍경 (위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상관 없습니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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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4억청년 쇼핑몰'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 인터넷을 넘나드는 편집매장(Multi-Shop)을 차리려 했던 것. 2003년 가을, 나는 경험을 쌓을 요량으로 덜컥 휴학을 감행했고, 마침 춘천 개점을 앞둔 어느 의류매장에 판매직으로 들어갔다.

1·2층 매장만 약 330㎡(약 100평)에 직원은 나를 비롯해 고작 셋. 개점 준비부터 절대 녹록지 않았지만, 꼬박 일주일 고생해 개점하니 개국공신이라도 된 양 뿌듯하기만 했다.

날 위해(?) 수많은 일거리 주신 사장님

그러나 자기도취도 잠시. 며칠 지나지 않아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어마어마하게 들어온 화환이 발단이었다. 30여 개 넘는 화환을 옮기는 일이 고스란히 내 몫으로 돌아온 것이다. 더욱이 목적지는 건물 5층. 물론 사장님도 살짝 거들어 주셨지만, 공사장 막노동에도 말짱했던 내 강건한 신체도 다음날 몸살을 피하지 못했다.

사실 어느 정도 예견한 일이긴 했다. 브랜드 의류 매장마다 한 명씩 두는 남자직원은 대체로 창고관리직이라는 게 업계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판매직으로 선호하는 성별은 단연 여성이라는 얘기다. 여자가 더 싹싹하고 섬세하다는 편견 때문일 터.

실제로 나는 한동안 판매는커녕 식사시간 외엔 창고밖 세상을 보기 어려웠다. 외려 이따금 매장으로 내려가면 여자직원들의 제품을 가져다주느라 3층 창고를 오르내리길 하루 수십 차례.

이런 내 하소연에 사장님은 자신의 깊은 뜻을 밝혀 한낱 범부를 일깨워 주셨다.

"너 나중에 옷가게 한다며. 재고 정리하고 이러는 거 다 알아둬야 한다. '다 너를 위해서' 시키는 거야."

아, 이 쯤에서 오롯이 떠오르는 노랫말. '넬'의 'Thank you' 중 "정말, 다 나를 위해서였죠?" 되겠다.

"들어온 손님은 양말 하나라도 사서 나가게 하라"

창고정리가 얼추 끝나자 제품박스가 들어오지 않는 날엔 짬짬이 판매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판매 실력을 십분 발휘하는 하려던 순간. 이게 웬걸. 뜻밖의 난관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판매 실적에 대한 압박'이었다.

"덕원아, 왜 그냥 나가? 살 것 같더니."
"그냥 구경만 한댔어요."
"야, 일단 들어온 손님은 양말 하나라도 사서 나가게 해야 하는 거야."

그런 사장님의 판매 철학에 손님을 맞는 직원들의 마음이 편할 리 만무했고, 다들 '무조건 팔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문제는 그럴수록 정작 손님이 성가셔진다는 점. 가령, 눈요기만 한다는데도 점원이 졸졸 쫓아다니며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는 꼴이다.

심지어 두 명의 직원이 한 명의 손님을 에워싸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웃지 못할 광경도 연출되곤 했으니 말 다했다. 이 때문에 두 여자직원 사이에 "손님을 뺏어간다"며 갈등도 싹트기 시작했다.

장사하시는 아들 21년에 '뜨내기장사' 하고 말 것도 아니고 잘못됐다 싶었지만, 나 또한 별 수 없었다. 자칫 '만년 창고관리직'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처지가 아닌가.

급기야 내 강박관념은 궁극에 이르러 '비양심적인 판매'마저 저지르고 말았다. 어느 날, 매장 2층에서 고가의 보드 재킷에 관심을 보이는 내 또래의 남자 손님. 체격이 왜소해 한눈에 가장 작은 사이즈를 입어도 좀 클 성 싶었다. 더더구나 그 제품은 스몰 사이즈뿐만 아니라 미디엄 사이즈도 동난 상황.

하지만 그는 재킷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나는 라지 사이즈라도 한번 입어보길 권했다. 말이 라지 사이즈지 미국 사이즈라 한 치수쯤 크게 나오는 걸 고려하면 105사이즈를 입힌 격. 세 사이즈는 족히 큰 재킷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고, 다른 매장이나 본사에 스몰사이즈의 재고를 알아보는 게 옳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때, 내 주둥이에선 '헛소리'가 줄줄 새 나왔다.

"잘 어울리시는데요! 손님, 체육관 롱 파카 아시죠? 이건 그렇게 길게 입는 거예요." 
"아, 그런가요? 그런데 이거 평상시에 입고 다녀도 괜찮겠죠?"
"그럼요, 디자인이 무난해서 상관없어요."

말을 뱉고 내가 '팔아야 한다'는 생각에 미쳤구나 싶었다. 순전히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보드복 재킷을 힙합 스타일로 입는 사람이야 많았지만,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일은 전무후무하다. 그것도 평상복으로….

그럼에도 나는 기어이 그 재킷을 허리춤에 끼고 카운터로 내려왔고, 그는 계산을 하기 전 한 번 더 입어보겠다면서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내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는 그의 뒤로, 사장님을 비롯한 직원들의 폭소가 터졌다. 그제야 나는 내가 뭔가 단단히 잘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손님은 왕이다'를 부르짖으며 정작 뒷구멍으론 사장님의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50여만원이라는 거금을 선선히 내고 사라졌지만, 나는 퇴근 후에도 그 모습이 어른거려 마음이 불편했다. 창고에서 썩을지언정, 이건 정말 아니었다. '중이 절 보기 싫으면 떠나야 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도망치긴 싫었다. 대신 잘릴 때 잘리더라도 소신껏 일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얄팍한 상술 따윈 걷어치우고 내 가족, 친구처럼 손님을 대하겠다고….

잘릴 때 잘리더라도 소신껏 일하자

실제로 그 후 사장님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대로 일했다. 하루는 편한 신발을 찾아 우편집배원 아저씨가 오셨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은 슬그머니 내 뒤로 다가와 뜬금없이 고가의 고어텍스 등산화를 권하라고 속삭이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볍고 비교적 저렴한 하이킹 슈즈를 권했고, 아저씨는 "편해서 좋다"며 사가셨다. 비 오는 날 신는 신발은 우체국에서 나온다는데, 평소 신을 신발로 굳이 무겁고 비싼 고어텍스를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장님은 그런 내 행동이 못마땅하신 눈치.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즈음부터 동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가 직원 중 연일 가장 많은 판매액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레 사장님은 내 판매에 간섭하지 않으셨고, 되레 창고관리까지 도맡아 주셨다. 아마도 덜어낸 상술만큼 마음도 가벼워 자신감 넘치게 손님을 대한 게 통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점입가경으로, 나만 찾는 단골손님도 하나 둘 늘어났다. 늘 함께 오는 단란한 가족, 수다스럽지만 인정 있는 아주머니들, 패션에 한창 눈뜬 고등학생 모두가 진정한 인센티브 같았다.

물론 매일같이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거나하게 취해 꼬투리를 잡더니 다짜고짜 욕을 퍼붓는 손님에겐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저 마음 속으로 '꿀밤 펀치'를 날리며 참을 뿐.

사실 그보다 큰 애로사항은 '업계 표준'에도 못 미치는 근무여건이었다. 하루 13시간 근무, 월 2일 휴무에 월급은 달랑 70만원. 시급으로 환산하면 꼭 2000원이었다. 그렇다고 최저임금(당시 2510원)을 다 채워받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원하는 바는 업계 표준이었다.

어느덧 매장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직원들은 이를 개선하고자 움직였다. 틈틈이 오다가다 만나는 앞집 '나이스' 직원, 옆집 '파마' 직원 등을 통해 업계 시장조사에 나선 것. 그 결과 '월급 80만원에 월 3일 휴무'라는 업계 표준을 사장님에게 제시했으나, 역시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직원들은 '하루 한 끼 먹기 운동'에 돌입하기에 이르렀다. 애초 우리 매장은 다른 데와 달리 매달 식대를 포함한 총 90만원에서 20만원 정도가 밥값으로 공제되는 식. 고로, 한 끼라도 덜 먹으면 한 푼 더 벌충할 수 있었다. '단식투쟁'의 성격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덕분에 두 번째 달엔 80만원에 가까운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매일같이 저녁을 거르니 해가 떨어지면 다들 빌빌거릴밖에. 결국 그런 직원들을 보다 못한 사장님이 식대를 별도로 하는 조건으로, 월급을 75만원으로 올려 주시면서 우리의 보이콧은 끝을 맺었다. 더불어 휴무도 월 3회로 늘어났으니 소기의 성과를 쟁취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이미 직원들은 해묵은 갈등으로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3개월을 채우고 그만뒀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고, 나는 현재 수중에 4억원커녕 4만원도 없는 '취업준비생'이다. 그 사이 더 값진 꿈을 만나 좇고 있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본 게임'을 앞둔 지금, 지난날의 '예행연습'은 분야를 떠나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한다. '까짓 소신쯤(이야)'가 돼버리는 요즈음이야말로 이를 시험할 절호의 기회라고.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기사 입니다.



태그:#아르바이트, #알바, #의류 판매, #옷가게, #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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