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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가수 아레사 프랭클린은 1967년에 히트곡 '존중'으로 가요 순위 정상에 올랐다. 이 노래는 민권운동가들과 존중받기를 원했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성가가 되었다. 아레사의 히트곡이 있기 훨씬 오래 전 와스디 왕비는 그녀가 해석한 '존중'으로 페르시아의 가요 순위 정상에 올랐다."

...단지 존중받고 싶었다…. - 2008년 6월 11일.

쿠바 최고의 휴양도시 바라데로로!
▲ 출발! 쿠바 최고의 휴양도시 바라데로로!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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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파란 하늘 구름 위로 세상을 밝게 비춰주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가 좋은 그대 있어 지금 난 행복합니다. 룰루랄라."

파란 하늘, 구름, 햇살, 환한 쿠바인들의 미소, 그리고 내 미소. 고개를 까딱까닥 흔들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는 '업' 된 기분에 스피드까지 덩달아 업 된다. 자전거 여행을 하기에 너무나 좋은 환경에 구속된 것이다. 살랑거리는 바닷바람에 적당히 구름에 가려진 햇살에 오르막 없는 평평한 도로. 이런 날씨라면 내 마음의 끝, 네 마음의 시작까지 달려가 주리라!

옅은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뺨을 쓰다듬고 달아나면 뿌옇게 이는 이물질이 고글에 묻는다. 눈이 따가워 고글을 벗으면 수백 마리의 날벌레들이 대책없이 돌진한다. 져지에 날아와 붙은 벌레들과 끈적하게 매끄러운 땀을 닦아내면 다시 전과 같은 사이클이 자동반복된다. 그래도 신났다. 매번 보는 바닷가 휴양지라도 바다를 본다는 설렘과 휴식이라는 이상적 스케줄을 앞에 두고 바람을 가르니 짜릿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지 않을 수 없다.

백사장의 길이가 200m도 되어보이지 않았던 아주 작고 깔끔한 미니 해변.
▲ 마탄사스 해수욕장 백사장의 길이가 200m도 되어보이지 않았던 아주 작고 깔끔한 미니 해변.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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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가 야심차게 리모델링한 국제휴양도시. 바닷가에 별천지를 만들어 놓고 외국자본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곳. 새롭고 거대한 자본주의가 점차 낡아 빠져가는 사회주의를 밀어내고 요란하게 사유재산의 열매를 생산해 내고 있는 곳. 6월 11일 오후에 일찌감치 바라데로에 도착했다.

준호는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오늘의 라이딩을 '참 잘했어요'라고 스스로 만족해했다. 우선은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 의견을 나누었다. 사소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여긴 가능하면 품격을 갖추고 싶은 바라데로였다. 우린 이 토론 과제에 집착하며 오랜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사방팔방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만사가 최초가 최선이요, 최고인 경우가 어디 한두 번 뿐이었을까. 쓸데없이 진을 뺀 후 고심 끝에 주문한 건 다름 아닌 햄버거와 감자튀김. 우리에게 부착된 저주받은 센스는 실로 통탄할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눅눅해진 마지막 감자튀김 한 조각까지도 우린 눈치 보지 않고 훑어냈다. 왜? 배고프니까.

아직까지 잘 따라오고 있는 준호. 이날은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아 쿠바 자전거 횡단 기간 동안 준호가 꼽은 최고의 라이딩 데이 중 하루였다.
▲ 국제 휴양도시 바라데로 도착 아직까지 잘 따라오고 있는 준호. 이날은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아 쿠바 자전거 횡단 기간 동안 준호가 꼽은 최고의 라이딩 데이 중 하루였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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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주인의 샤워 초대... 사건의 시작

이젠 무난한 하루의 마감을 위해 숙소를 정해야 할 시간. 마음은 해변가에 병풍처럼 늘어선 호텔속으로 들어가 체크 인을 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해변가에 앞마당처럼 늘어진 모래사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소방서에서 텐트를 쳐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고, 주민들 역시 텐트 칠 자리와 방법에 대해 적극적인 조언을 해 주었다. 내 인상이 편해서였을까? 텐트를 칠만한 명당자리를 알아보기 전 잠시 석양을 바라보며 주책스런 감상에 젖어들려고 긴장된 마음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정적을 깨 버렸다.

해변 바로 뒷 건물의 주인이 말을 걸어온 것이다. 얘기인 즉 자전거 여행 중임을 알고 혹시 필요하다면 자기네 집에서 샤워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재워 주고도 싶지만, 아시죠? 여긴 그게 불법이라서요."
"아닙니다. 그 정도로도 너무 고마운 걸요. 그렇잖아도 오늘은 그냥 양치만 하고 자려던 참이었는데."

수영을 즐기는 쿠바 청년들. 단순하지만 전혀 지루함 없이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 "친구, 나 한 컷만!" 수영을 즐기는 쿠바 청년들. 단순하지만 전혀 지루함 없이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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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는 식구들이 모여 있는지 왁자지껄했다. 주인은 이방인의 남루한 행색에서 오는 고충을 먼저 헤아려 따뜻한 환대를 베풀었다. 샤워보단 일단 해변 쪽에 텐트 칠 공간을 알아봐야 했다. 그리고 이내 해변과 이어진 어느 레스토랑 뒤쪽 마룻바닥의 빈 공간을 발견했다. 마침 등을 켜기 위해 나온 주인의 허락을 얻어 하룻밤 몸을 기댈 공간을 확보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하루를 마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뒷마무리를 할 겸 준호를 먼저 샤워장으로 보냈다.

그런 다음 차분히 계단에 앉아 새초롬히 남색으로 물든 카리브 해를 바라보았다. 내일 아침 저 곳에서 물장난(나에겐 수영) 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해져 왔다. 파도는 내내 찰싹찰싹 밀려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데 흰 포말만이 어슴푸레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이런 고요함이 좋았다. 아무런 간섭없이 생각의 나래를 펴는 것. 계산의 이해에 타박받지 않고, 관계의 오해에 상처받지 않는 찰나의 자유. 삶이 각박해지고 치열해질수록 우리 안에 피터팬은 희미하게 사라지고 대신 피터맨 증후군만 남게 되는 건 아닌지.

개구리 모션?
▲ 바다속으로 다이빙! 개구리 모션?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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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내 눈에 끌어들여 물어본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이 하늘에 슬며시 기록되어 있는지. 도와주고 있는지. 가능성은 있는지. 하지만 그 답을 느끼기도 전에 바람은 차가운 흔적만 안기고 대신 나에게서 별의 온기를 뺏어간다. 별과 바람과 파도가 내 곁에 머문 그리운 시간, 그리고 모기를 때려잡는 흥분한 지금.

조금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제 풀에 지쳐 개운하게 말을 맺지 못했다. 몇 마디 내뱉긴 했는데 샤워에 관한 일상적인 것으로 심각하게 고려할 상황은 아닌 듯 싶었다. 나는 샤워용품을 챙겨 주인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나를 반기더니 잠시 불러 세워 나직이 얘기했다.

"아까 당신 친구가 물을 좀 오래 쓰는 바람에 말이죠. 그리고 윗층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괜찮다면 그냥 양동이에 물을 받아 씻으면 안 될까요?"

그 집은 주인뿐만 아니라 친척관계인 또다른 가족이 2층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상당히 조심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헤헤, 괜찮아요. 샤워는 5분이면 끝납니다. 얼른 끝내죠, 뭐."

팬티 입고 샤워를?... 그렇겐 못하지

주인은 살짝 걱정하는 듯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나를 샤워하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어라? 내 예상과는 달리 집 안이 아니었다. 집 뒤뜰에 샤워시설이 있어 뒷마당에서 해야 하는 것이었다. 주인은 한 가지를 부탁했다.

"샤워를 하되 팬티는 꼭 입고 하세요."
"알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솔직히 샤워를 어떻게 팬티 입고 개운하게 한담? 나는 괘념치 않고 옷을 모두 벗어버렸다. 빨리 샤워를 마치고 파도 소리에 실려 달콤한 꿈나라로의 여행을 가고 싶었다. 시원한 물을 온 몸에 받으며 샤워를 하는 건 언제나 룰루랄라 신나는 일이다.

소나기가 내리자 우리에게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하던 쿠바인. 얘기를 나누는 동안 이것저것 간식까지 챙겨주는 그의 따뜻한 마음에 습도 높아 불쾌하던 마음이 단번에 시원하게 뚫렸다.
▲ 초대 소나기가 내리자 우리에게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하던 쿠바인. 얘기를 나누는 동안 이것저것 간식까지 챙겨주는 그의 따뜻한 마음에 습도 높아 불쾌하던 마음이 단번에 시원하게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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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위층에 한 남자아이가 계단에서 내려오더니 나를 본 후 잠시 어디를 다녀와서 다시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는 옷으로 몸을 가린 채 아이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아이는 인사조차 받질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위로부터 쿵쾅쿵쾅 급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진원지는 금세 가까워졌다. 풍채 좋은 웬 중년의 남자가 흥분한 채 내려온 것이다.

"너 뭐하는 녀석이야?"
"네? 아니, 그냥 전… 샤워… 금방 끝나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난 넉살좋게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했다. 그리고 상황이 상황인만큼 충분히 이해해 줄거라 믿었다. 하지만 내가 순진한 건지 바본 건지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남자에게는 신원불명의 웬 낯선 남자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게 아주 불쾌했나 보다.

"당장 샤워 그만하고 내 집에서 꺼져! 옷 입으란 말야, 당장!"

피부색은 달라도 우리는 하나.
▲ 방과 후 아이들 피부색은 달라도 우리는 하나.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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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비누칠도 남아있는 상태였다. 더욱이 난 지금 나체 상태에서 중요부위만 손으로 가린 채 남자와 대면해야 했다. 심히 당황했다. 그런데 남자는 인정사정 봐주질 않았다. 별안간 옆에 쌓아 둔 내 옷들을 거칠게 풀어헤치며 마치 덫에 걸린 쥐를 보는 것처럼 고약한 인상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빨리 옷 입고 나가라고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역겨운지 나는 한동안 아무런 행동이나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의 행동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럴수록 남자는 고래고래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나를 코너로 몰아넣었고, 아닌 밤중에 놀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이 장면을 제대로 목격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 아직 비누칠도 다 씻어내지 못했다구! 샤워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짓이야?"
"당장 꺼져! 네 일은 내가 알 바 아냐. 누가 네 맘대로 남의 집에 들어오래? 꼴보기 싫어, 어서 나가!"
"지금 나가면 되잖아! 어디서 큰 소리야? 나가면 될 거 아냐?"

설상가상... 폭발 일보 직전에 경찰까지!

나조차도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남자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분을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더욱 기가 막힐 일이 벌어졌다. 어차피 옷을 집어야 하기에 한 손으로만 가릴 곳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옷을 집는데 남자가 내 엉덩이를 툭툭 치는 것이었다. 서두르라는 의미다. 내 손이 최홍만 손이 아닌 이상 보일 건 다 보이는 치욕의 순간에서 이 행동은 감정의 날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손 안 떼, 이 자식아! 너 뭐야? 너 뭔데 남의 몸을 함부로 만지는 거야! 응?"

그런데 어설픈 스페인어에 흥분한 영어가 그의 귀에 들어갈 리 없었다. 그는 내 말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더 크게, 더 빠르게 날 몰아내기 위한 고함만 외칠 뿐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싸움의 하이라이트가 나왔다. 남자가 두 차례 더 내 히프와 옆구리를 툭툭툭툭 친 것이다. 이건 사디즘(sadism)도 아니고….

완전히 화약고에 포탄을 터트린 격이었다. 정말이지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들이 느낀다던 그 성적 수치심을 바로 지금 치욕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폭력도 성추행도 아닌 어중간한 터치였지만 도무지 혈관의 모든 피가 얼굴로 모여드는 심한 굴욕 앞에 자중할 수 있는 한계선은 이미 나노 단위로 폭발해 버렸다.

통제불능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논리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남자의 행태에 격분해 정말 주먹이 나갈 뻔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바람의 파이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나라망신이 먼저 떠올랐다. 이 행동 하나에 여러 사람 불편하고 피곤해 질 것들이 내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부득부득 이를 갈고 참아냈다. 참아야 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만 내 몸에 붙은 이상 미친듯이 제거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눈에서 눈물이 나는 대신 주먹이 울고 있었다.

마차에서 먹을거리를 파는 상인. 사진기를 들이대자 1달러를 요구한다.
▲ 황금 마차 마차에서 먹을거리를 파는 상인. 사진기를 들이대자 1달러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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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대며 급하게 옷을 입고 나가는데 밖에 누군가 와 있다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사람 모습을 보고 눈이 위에서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릴 때 괜히 심장도 철렁 내려앉는다면, 강도 혹은 경찰이다. 언제 불렀는지 경찰이 와 있었다. 내가 텐트로 돌아왔을 때 경찰과 그 남자, 그리고 몇몇 무리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경찰은 내게로 오더니 분위기 파악을 위해 이런저런 조사를 했다. 남자는 옆에서 계속 시끄럽게 침을 튀겨가며 떠들어댔다.

"너 말이야,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면 주거침입인 거 몰라? 누가 남의 허락없이 함부로 물을 쓰래? 게다가 넌 사람들 있는 곳에서 벌거벗었어! 그건 풍기문란이야! 제기랄, 아니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옷을 홀딱 벗다니? 정신나간 놈 아니야?"

통역을 해 주던 준호의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뭐라고 말 못할 절망감과 허무함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야! 조용 안 해? 넌 내 몸에 손댔잖아 이 자식아! 성추행이야 그건! 넌 인권도 몰라? 너 뭔데? 너 변태야? 천천히 말로해도 될 것을 이런 경우가 어딨어? 뭐가 잘났다고 큰 소리야!"

하지만 내 주장은 허공으로 허무하게 사라지고 오직 그 남자의 의견만이 분위기에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남자는 마치 마녀재판이라도 벌이는 양 나를 손가락질 하더니 이 따위 놈 당장 처벌하라는 식으로 나를 몰고 갔다. 경찰 역시 애초에 한 통속인지 내 말에는 시큰둥하니 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남자의 말에는 이것저것 확인해 가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다 대화 중에 남자가 군대에서 중역이며 나름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난 그만 허탈한 쓴웃음을 뱉었다. 이렇게 되면 정의가 있더라도 승산이 없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통역을 하던 준호도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최악의 경우 우리는 강제추방이 될 수도 있었다. 급박했다.

샤워를 허락한 1층 남자도 이 장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우리는 여기서 1층 남자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하기로 말을 맞추었다. 우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 남자의 행위를 발설하면 남자에게 큰 짐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배은망덕은 동방예의지국 COREA의 두 청년이 남의 나라에서 절대로 할 짓이 못 되는 것이다.

여전히 남자는 나를 가리켜 몹쓸 놈이란 아우라를 씌워내려 발악하고 있었고, 그 목소리는 줄지도 않고, 쉼도 없었다. 참으로 대단한 외곬꾼이었다. 우리는 침묵했다. 일단 경찰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남자는 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떤 결론에도 트집을 잡을게 뻔했다. 사실 경찰이 남자의 말 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국민 우선보호에 의거한 것일 테고, 양심이 있고 눈치가 있는 이상 말 짧은 외국인이 무력하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간파했을 것이다.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인생사 새옹지마?

바라데로 해변에서 바라본 카리브 해의 일몰.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바닷가의 촉촉한 낭만에 젖어 있었다.
▲ 노을 바라데로 해변에서 바라본 카리브 해의 일몰.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바닷가의 촉촉한 낭만에 젖어 있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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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정적의 틈이 생기고 이 때 경찰은 자신의 결론을 양쪽에게 통보했다.

"어쨌든 당신이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간 건 사실이오. 그리고 옷을 벗고 다니는 것도 안 됩니다. 여긴 쿠바에요. 그건 불법입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지금 저 쪽에 쳐 놓은 텐트 모두 접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세요. 시간은 10분 줄테니. 그리고 이쪽 주변에 텐트를 치면 안 됩니다. "

소란했던 사건은 경찰의 한 마디로 일단락되었다. 경찰의 심판은 그래도 서로에게는 최선의 결과물이었다. 무엇보다 이 장면을 지켜본 1층 남자가 가장 만족했을지도 모를 끝맺음이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준호 역시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우리는 쿠바를 이해하는데 좋은 경험을 했다고 위안했지만 존중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무례한 남자의 행동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빛의 속도로 달려가 멱살을 잡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는 낭만으로 점철되어야 할 해변가의 텐트를 접고서는 물어물어 결국 바라데로에서 가장 싼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예정에 없는 경비를 지출했지만 호텔은 에어컨이 작동되었고, 푹신한 두 개의 침대가 따로 구비되어 있었으며, 속사포처럼 터지는 스페인어가 감칠맛 나게 들리는 TV까지 있어 기분의 정화작용을 해 주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정말로 오늘 일은 시간을 떼어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준호와 난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누다 각자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그전에 준호가 머뭇거리며 지난 얘기에 대해 다시 끄집어 냈다.

"형, 실은 아까 저 때문에 위층에서 조금 눈치 챈 것 같았어요. 휴."
"그래요?"

별로 마음 쓸 말은 아니었다. 이미 지나간 일.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랴? 수원수구로다. 모든 게 내 덕이 부족해서다. 샤워한 번 잘못했다가 졸지에 주거침입과 풍기문란자로 몰린 현실이 얼척 없기도 했지만 웬일인지 다른 한쪽 마음에선 그래도 밑에 층 남자를 보호했다는 자부심과 덕분에 팔자 좋게 호텔에서 편히 자게 됐다는 만족함이 저 깊은 마음에서부터 차올랐다.

어둠이 내려앉고, 텐트를 친 후. 이것이 바라데로에서의 마지막 사진이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 바라데로 해변 어둠이 내려앉고, 텐트를 친 후. 이것이 바라데로에서의 마지막 사진이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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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다. 어떤 때는 사막의 황무지처럼 맥 빠질만큼 지루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사나운 파도처럼 두려움으로 매번 세차게 요동치는 여행길. 꼭 인생의 미니어처 같다. '잘못했다면 화낼 자격이 없고, 잘못하지 않았다면 화낼 필요가 없다'는 간디의 말을 곱씹었다. 생각해 보니 아까는 화를 낼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한 거친 인격 때문에 또 모난 행동을 했었던 것 같다. 여전히 네 이웃을 넘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거룩한 말씀과 내 삶은 괴리가 깊어 보여 부끄럽기만 하다.

등을 끄고 스르르 눈을 감기 전, 갑자기 하일성의 명언이 패러디되어 생각났다.

"아~ 예상과 반대로 흘러가고 있어요. 여행 몰라요."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쿠바, #세계일주, #문종성, #자전거, #비전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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