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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2년, 당시 26살이던 나는 대학을 휴학하고 군대를 다녀와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가정을 꾸리며 대학교를 다니는게 너무 힘에 부쳐 일단 학업을 접었다. 설상가상으로 첫 아이가 태어났다. 이어 다음해 연년생으로 또 아이가 태어났다. 이젠 죽었구나 하고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아내와 함께 맞벌이를 하며 두 딸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결혼생활 7년이 지난 2000년에 대학교를 다시 다니겠다고 얘기를 했다. 물론 당시 형편으로는 어림없는 소리였지만, 더 늦기전에 대학 졸업장을 따야 되겠다는 내 의지를 아내는 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그것도 조카뻘 되는 동기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묵혔던 머리를 재가동 시켜야하는 고통은 해 보지않은 사람은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서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데. 그렇게 시작한 대학생활이었지만 문제는 역시 학비도 벌어야 되고 가족들의 생계도 책임져야 하는 일이었다. 각오는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무조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다행히 예전에 신학교를 다녔던 경력을 인정받아 어느 작은 교회에서 주말이면 유급봉사를 할 수 있었다. 평일에는 야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는데, 당시 '대리운전'이 한창 유행하던 때라 인근의 모 대리운전 사무실을 찾았다.

대리운전에 대해 전혀 모르던 내가 막상 남의 차를 운전하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고, 운전 경력은 나름대로 쌓아 온 터라 내게는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수업을 해야 하는 학기 중에는 불가능하다. 주로 방학 기간 동안에 했었다.

"오늘 저녁부터 출근 하시면 됩니다"

취직이 됐다. 기뻤다. 지금은 대리운전 시스템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약 8년 전에는 기본급과 인센티브를 합한 액수를 받았는데, 인센티브는 내가 대리운전 해 준 횟수만큼을 금액으로 환산해 주는 것이다. 즉 많이 돌아다니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대리운전 기사들에게는 무전기가 제공됐다. 지금은 DMB폰을 많이 활용하고 있지만 당시엔 무전기를 들고 운전을 하고 도착지를 알려주면 소형승합차가 와서 태워가는 식이었다. 

요즘은 대리운전업체가 많이 영업을 하면서 이용 요금도 낮춰졌고 평준화 되는 추세지만, 당시에는 업체마다 서비스의 차별화를 명목으로 손님과 가격을 흥정해야 했었다. 부산을 비롯한 경남 일대의 시내는 대략 1~2만 원 정도에서 미리 사무실과 합의하고, 운전기사에게 요금을 받아 다시 사무실에 입금했다.

대리운전을 하다보면 자주 이용하는 고객이 생긴다. 또 특정 기사가 마음에 드는 고객은 그 기사만을 찾기도 한다. 대리운전을 찾는 고객들이 좋아하는 기사의 유형이 몇 가지 있다.

자기 차처럼 고객의 자동차를 아끼며 운전을 안전하게 하는 기사,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운행 도중에 고객에게 전해주는 기사, 또는 입심이 좋아서 도착할 때까지 말벗이 돼 주는 기사, 잘 생긴 외모나 매너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사 등등.

당연히 이런 기사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손님들에게 팁을 많이 받는 경우가 많다. 불행히도 나는 어느 곳에도 해당사항 없었다.

간혹 새벽 2~3시 정도에 시내 외곽으로 고객을 모시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 때는 회사에서 보내주는 승합차를 기다리는 동안 낙오자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거기에다 승합차가 시내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데리러 올 수 없다는 통보를 받으면 그야말로 새벽이슬을 맞으며 하염없이 첫 버스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콜택시를 부를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새벽이면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잠을 청한다. 그리고 오후에 일어나 또다시 출근 준비를 하게 된다.

"엄마 아빠는 왜 밤에만 나가?"

당시 아침에 잠을 청하려 누운 내가 잠이 든 줄 알고 작은 딸이 엄마한테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빠 왜 맨날 밤에만 나가?".. 그러자 엄마가 대답하기 전에 한 살 많은 언니가 가로채며 대답한다. "바보야, 아빠 경찰이야. 저기 무전기 안보여? 도둑놈 잡으려면 밤에 나가야 되는거야."

그랬다. 간혹 사무실에 들렀다가 무전기를 반납하고 퇴근해야 하지만 현장에서 바로 집으로 오는 경우에는 무전기를 들고 왔는데, 이럴 때면 켜 놓은 무전기에서  "삐리릭, 응답하라"며 기사들 소리가 들리고, 이 소리는 영락없는 경찰 무전기와 똑같다.

순간 속으로 긴장했다. 눈치없는 마누라가 "아냐 아빠는 술취한 손님 태워주는 대리운전 기사야" 라고 할까봐.

다행히 웃고 지나갔지만 아마 지금도 두 딸은 아빠가 옛날에 경찰일을 했었다고 기억할 지 모르겠다. 졸지에 '경찰경력(?)을 가진 나는 그렇게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 뒷바라지와, 뒤늦은 만학의 꿈을 키워갔다. 지금도 무전기의 "삐리릭" 신호음은 나를 긴장시킨다.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추억> 에 응모하는 글입니다.



태그:#대리운전, #대리운전알바, #아르바이트, #대리운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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