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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칼국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싫어하는 편이라 하는 게 더 옳다. 예전 우리집은 유난히 칼국수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는 칼국수를 자주 밀었다.

 

어머니가 만든 칼국수 먹지 않아 혼났던 어린 시절 

 

지금처럼 밀가루 값이 비싸지 않았던 시절이라 우리집은 칼국수로 끼니를 때우는 적이 많았다. 그 일은 비단 우리집뿐만은 아니었다. 쌀이 귀하던 그 시절 밀가루는 어느 집을 가리지 않고 배고픔을 잊게 해주는 중요한 식량이기도 했다.

 

긴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쓱싹쓱싹 밀어대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칼국수 맛은 어린 나를 늘 실망시켰다. 두어 젓가락 뜨다가 수저를 내려 놓으면 아버지의 타박이 어김없이 날아왔다. 

 

"이놈의 자슥, 왜 안 먹냐?"

"맛이 없어서요…."

"맛이 없어? 그럼 먹지 마라. 며칠 굶어보면 배고프다는 말이 쏙 들어갈 게다."

 

그때부터 나는 칼국수를 만드는 날이면 아예 밥상머리에 앉지도 않았다. 며칠이 아니라 보름을 굶는다 해도 칼국수만큼은 먹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몇 번 그렇게 하니 칼국수를 만드는 날이면 어머니는 내 밥을 따로이 지어야 했다.

 

너나 없이 가난하던 그 시절. 당시 밥상에 오르는 밥은 강냉이밥이나 조와 보리, 콩 등이 들어있는 잡곡밥이었다. 지금은 건강식이라 하여 일부러 챙겨 먹는 세상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의 강냉이밥은 가난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다. 

 

강냉이밥조차 해먹을 수 없는 집은 찐 감자 몇 알로 점심을 때우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이웃도 많았던 시절. 맛없다며 칼국수를 먹지 않는 것을 두고 아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버지로서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어린시절을 그렇게 통과했고 어른이 될 때까지도 '칼국수는 맛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깔고 살아왔다. 그런 인식을 여지없이 바꾼 역사적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서울 명동뒷골목(명동성당 가기 직전에 있는 골목)에 있는 '명동교자'의 칼국수였다.

 

 

80년 대 중반쯤 처음 먹어본 그 집의 칼국수는 그동안 내가 지니고 있던 칼국수에 대한 인식을 확 바꿔놓았다. 당시 나는 그 집의 칼국수를 먹으며 '세상에 칼국수가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다니"하며 감탄사를 몇 번이나 늘어 놓았다. 그날 나는 며칠이나 굶은 사람처럼 단숨에 세 그릇이나 비워냈다.

 

세상에 칼국수가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다니...

 

물론 그동안 칼국수를 먹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일행들과 맛있다고 하는 칼국수 전문점이라는델 갔지만 국물은커녕 면발 하나 먹지 못했다. 내 입맛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집에서 만드는 칼국수와 다른 집 혹은 어머니가 만드는 칼국수가 무슨 차이가 있어 내 입맛을 천당과 지옥으로 오고 가게 했을까.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어머니표 칼국수를 유독 나만 싫어했던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 답은 면발과 국물에 있었다. 어머니가 만드는 면발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으며, 국물 또한 된장을 풀어 끓인 탓에 텁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식당에서 파는 바지락 칼국수 등도 내겐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국물이 시원하다며 잘도 먹었지만 내 입맛은 전혀 요동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명동교자의 칼국수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기에 내 입맛을 사로잡았을까. 

 

그 집에서 만드는 칼국수는 면발부터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했다. 입안의 혀처럼 착착 감기는 그 집의 면발은 지금까지 맛 본 칼국수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매끄럽게 넘어가는 면발은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비슷했다.

 

면발만 그러할까. 닭고기를 오랜 시간 푹 고아 만든 그 집의 육수는 시원함은 기본이고 얼큰함과 담백함, 구수함, 진함 등등.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맛이란 맛은 다 갖추었다. 아니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낄 수 없는 맛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게 더 정확하다.

 

한마디로 그 맛이 오묘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육수에다 부드러운 면발을 넣고 만들었으니 그 집 칼국수 맛이 없을리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볶은 야채와 함께 고명으로 얹은 고기와 만두는 칼국수 맛을 한층 배가 시킨다.  

 

 

나만 그렇게 맛있을까 싶었지만 갈 때마다 그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점심 시간엔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먹을 수 있을 정도이고 비교적 한가한 시간대인 오전이나 오후무렵에도 빈자리는 늘 없었다. 

 

마음 껏 먹을 수 있는 칼국수집, 가난했던 시절엔 '오아시스' 

 

지난 5일(토)에도 그 집엘 갔다. 촛불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간 날이기도 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명동교자에 간 시간은 오후 3시 30분. 그 시간에도 빈자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늘 그렇듯 혼자 온 손님을 위해 준비한 일인용 식탁에 앉았다. 그 식탁은 몇 해 전 칸막이를 설치했다. 낯선 이와 마주보면서 먹어야하는 어색함을 없애기 위한 주인의 배려이다.

 

칼국수 값은 7천원. 보릿고개와 다름없는 요즘 세상에 조금 비싸다 싶지만 몇 배나 오른 밀가루 값에다 맛 또한 그 값어치를 훌쩍 뛰어 넘으니 계산 치루는 일도 즐겁다. 선불로 계산을 하면 얼음물과 후식으로 껌 하나가 식탁에 놓여진다. 예전과 다르지 않은 익숙한 방식. 잠시 후 주문한 칼국수와 차조를 넣어 지은 밥이 나왔고, 반찬으로는 배추김치 하나가 나왔다.

 

맛있는 집의 특징은 반찬이 적다는 것. 그 집 역시 주인이 준비한 것은 겉절이 배추김치 달랑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반찬 가짓수가 적다고 투정부리는 손님은 없다. 적당히 절인 배추에다 매운고추와 마늘을 갈아 만든 명동교자의 겉절이 배추김치는 그 집의 명물이 된지 오래되었다.

 

그 집의 김치가 얼마나 매운지 칼국수와 함께 먹다보면 땀을 비오듯 흘리는 것은 기본이고, 입안이 어찌나 아린지 식사를 끝낼 때까지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해야한다. 그런 고통(?)을 알면서도 그 집을 찾는 이유는 그만큼 칼국수와 김치 맛이 독보적이고 좋기 때문이겠다.

 

그 집의 장점이라고 하면 칼국수를 원하는대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 집을 찾을 때면 언제나 한끼 정도는 굶고 갔다. 매운 것을 먹어야 식사를 제대로 한 것처럼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식사 습관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명동교자. 1966년에 시작했으니 올해로 42년 째를 맞이했다. 그 맛 또한 한결 같으니 단골 또한 많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주머니가 비었던 어느 때는 두 사람이 가서 한 사람 몫만 시킨 적도 있었다. 빈 그릇 하나를 청해 그 집의 장점인 무한 제공을 마음 껏 활용하여 배고픔을 해결하기도 했다. 그래도 뭐라 눈치 한 번 주지않았던 그 집이 새삼 고맙다.

 

일본인 관광객들에게도 필수 코스인 칼국수집 '명동교자'

 

칼국수 값이 1500원 하던 시절부터 단골로 삼았으니 내가 그 집과 맺은 인연도 꽤 되는 셈이다. 도시를 떠난 지금에도 서울에만 가면 그 집을 찾으니 칼국수 맛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한국 사람들만 그 집의 칼국수를 좋아할까 싶지만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일본인 관광객 또한 그 집을 즐겨찾기 해두고 있다. 일본인들에게까지 필수 코스가 된 칼국수집 명동교자. 애초 시작은 명동칼국수집이었다. 그런 것을 1978년 지금의 '명동교자'로 상호를 바꾸었다.

 

전국에 '명동칼국수'라는 상호가 우후죽순 들어서자 차별성을 두어야 했던 것이다. 그 집에서 칼국수 맛을 본 손님들이 같은 상호를 단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더니 그 맛이 아니라는 말이 많이 나왔던 게 상호를 바꾼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집은 분점을 많이 두지 않아요. 명동에만 본점과 분점(구 제일백화점 후문)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손님이 하도 많이 와서 분점을 하나 더 만든 것을 빼면 더 이상의 분점은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명동칼국수와 명동교자를 혼동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실내를 둘러보니 다들 나와 비슷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화장이 지워지던 말든 흐르는 땀을 어찌하지 못하고 훔쳐내는 미모의 아가씨들. 손부채로 연신 입안을 부채질하는 어린 아이. 할머니와 함께 나들이 나온 할아버지. 그들 모두 '맵다 맵다' 하면서도 김치 먹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입안은 얼얼, 땀은 뻘뻘 "그래도 또 먹으러 올래요"

 

그 집의 또 다른 이색 풍경은 손님 사이를 오가는 종업원들. 각자의 업무가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 있는 탓에 손에 들려 있는 것들이 다 달랐다. 어떤 이는 김치통만 들고 다니고, 어떤 이는 얼음물만 나른다. 또 어떤 이는 주문만 받고, 어떤 이는 빈 그릇만 치운다.

 

칼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선 김치를 몇 접시는 먹어야 하는데, 김치가 떨어질 때가 되면 김치를 담당한 종업원이 알아서 김치를 놓아준다. 칼국수를 더 먹고 싶으면 '사리 하나 더~'라고 말하면 빈 그릇이 금방 채워진다. 무한 제공인 칼국수와 밥 그리고 김치. 먹고 돌아서면 또 먹고 싶은 칼국수라 포장을 해 가져가는 손님도 많다.

 

입구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 아가씨 둘에게 칼국수 맛이 어땠냐고 물었다.

 

"음식 먹으면서 이렇게 땀을 흘린 적은 없었어요. 매운 김치 덕분에 덕분에 화장이 지워졌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요. 또 올거예요." 

 

그날 내가 먹은 칼국수는 세 그릇. 거기에다 덤으로 나온 차조밥까지 국물에 말아먹으니 면발이 목젖까지 채워졌다. 그보다 일주일 전에도, 보름 전에도 촛불을 들기 위해 서울에 갔던 나는 그 집에 들러 혼자 칼국수를 그렇게 많이 먹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군침을 삼키게 만드는 명동교자의 칼국수. 하루 4천 그릇이 넘게 팔리는 그 집. 세상은 변했지만 그 집의 칼국수와 김치 맛 만큼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칼국수를 싫어하게 된 것이 밀가루 음식이 싫어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만든 칼국수가 맛이 없었기 때문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그 집. 변함이 능사가 아닌 것을 묵묵히 증명하고 있는 그 집의 칼국수가 지금 그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던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노모를 모시고 가서 "어머이, 칼국수는 이렇게 끓여야 하는 겨"라고 말하고 싶은 집. 이번 주말 촛불 들러 서울 가게 되면 또 찾아갈 집. 내 까다로운 입맛을 사로잡은 그 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게 아쉬울 뿐이다. 

 


태그:#칼국수, #누른국수, #명동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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