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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전면 개방을 반대해 촛불을 든 시민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전면 개방을 반대해 촛불을 든 시민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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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너 도대체 누구냐.'

최근 내 삶을 지배한 키워드는 단연 '촛불'이다. 촛불 들고 거리에 나선 사람들의 참신한 '면면'에 끌렸고 그들이 행하는 재기 발랄한 놀이에 반했다. 어느새 나도 촛불 하나 들고 대열에 합류했다. 역동적인 에너지 덩어리에 휩싸이니 흥이 절로 났다. 모든 즐거움은 '계속'이라고 말하는 법. 촛불에 매료돼 문지방 닳도록 촛불을 보러 들락거렸다.

그곳에서 기적의 출현을 목도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액자 표구용 글귀가 시청 앞 잔디밭에서 날마다 위용을 드러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던 옆집 아저씨, 은행 창구의 펀드 상담직원, 지하철 경로석의 할아버지, 극장에서 팝콘 먹던 연인, 공원을 누비던 유모차, 편의점 카운터를 지키던 청년, 교문을 쏟아져 나오던 학생들이 다 모였다.

빨간 머리띠도 안 두르고 '정권 퇴진'을 외쳤다. 지난 수년간 언론운동단체에서 일간지 내듯 성명서를 내도 꿈쩍 않던 '안티 조중동'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언론운동단체는 차마 '폐간'을 입에 담지 못했으나 시민들은 '조중동 폐간'을 주장했다. 과격하되 발랄하고, 우직하나 민첩했다. 밟혀도 솟구쳤다. 기죽는 법 절대 없다. 왁자지껄 요란한 만큼 촛불잔치도 화려했다.

시위가 끝나고 행진할 때면 누군가 '배후시민표' 김밥과 생수를 건넸다. 요술봉으로 마법을 부리듯 성금도 척척 광고도 뚝딱 만들어냈다. 급기야 촛불은 여의도로 삼성동으로 번져갔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늘어나듯 촛불은 날렵하고 유려하게 분열·증식했다. 촛불이라면, 못할 일도 못 갈 곳도 없어 보였다. 궁금했다.

2008년 대한민국을 밝힌 이 매력적이고 현묘한 '촛불'에 대해 좌파 지식인부터 우파 언론까지 많은 보고서가 나왔다. 그 중에 '연구공간 수유+너머' 박정수 연구원의 글 '대중지성과 욕망'을 참조해 '촛불'의 실체를 밝혀보았다. 세 가지 측면이다. 촛불의 집단지성 개념 파악, 촛불의 발화지점 분석, 촛불의 확산현상 진단이다. 

① 집단지성 우린 촛불을 든 '벌떼' '개미떼'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다중>이라는 책에서 '떼지성'이라는 용어로 '집단지성'의 개념을 확장했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다중>이라는 책에서 '떼지성'이라는 용어로 '집단지성'의 개념을 확장했다.
ⓒ 세종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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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집단지성의 개념에 대한 오해부터 풀고 가자.

흔히 집단지성을 '대중의 지성', '지성적 대중', '이성적 군중', '이성적인 대중운동'으로 생각한다. 원래 지성(이성·합리성)은 개인(지식인)의 것이고, 대중은 지성적이기 힘든데 이번 촛불시위에서는 대중이 지성의 주체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민주주의적이라고도 한다.

집단지성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논리, 즉 개인만이 이성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대중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며 충동적이기 쉽다는, 그래서 대중은 반드시 개인(엘리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귀족주의적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 나아가 '인간'만이 지성적 존재라는 휴머니즘까지 넘어서야 '집단지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집단지성'이란 원래 곤충학에서 나왔다. 각 개체는 지능이 없지만 전체 무리는 고도의 지능 체계를 형성하는 개미 등의 군집을 설명하는 데 쓰였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2004년 출간한 <다중>에서 '떼지성'이라는 용어로 그 개념을 확장했다.

박정수 연구원은 "촛불시위 속에서 혹은 인터넷에 접속하면서 우리는 '곤충떼'가 된다, '개미떼'가 된다"며 "대중지성은 집합적 신체(무리·떼·대중)를 구성하면서 형성되는 '집합적 지식생산의 양태'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촛불시위를 촛불 '봉기(蜂起)' 벌떼의 일어남으로 정의했다.

촛불이라는 '집합적 신체'의 지식 생산 양태

"분산된 네트워크는 떼를 이뤄 적을 공격한다. 무수한 독립적 힘들이 모든 방향에서 특정 지점을 가격하고 주위 환경 속으로 사라진다… 네트워크는 명령을 내리는 중심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조직적이고 합리적이며 창의적이다… 네트워크는 떼지성을 지니고 있다." (<한겨레> 6월 19일)

집단지성은 이처럼 무리로서 운동하는 '동물-되기' 속에서 생산되는 지식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어떤 사람에게 그런 개인이라는 상상적 관념이 파괴되고, 자신의 신체를 '집합적 신체'의 부분기관으로 체험할까. 우리는 촛불봉기의 현장에서 이를 발견한다.

'촛불들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

'촛불이 승리한다.'

시위참가자들은 자신을 촛불로 지칭한다. 민중(people)이 아니라, 시민이 아니라, 국민이 아니라, 촛불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촛불로 자신을 대체한 환유도, 마음속 염원을 대체한 은유도 아니다. 이것은 거리에 모여 흐름을 만드는 무리를 지칭하는 지표(index)다.

촛불, 그것은 무리의 집합적 신체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다. 촛불로 지칭된 자들은 개인이라는 상상된 자아를 넘어 함께 움직이며 공통의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기관들이 되며, 두뇌로 입으로 휴대폰으로 디카로 카메라로 인터넷으로 구성된 집합적 감각-소통-분석 기관들로 대중적 지식을 생산하고 있다.

시위참가자들은 자신을 촛불로 지칭한다. 민중이 아니라, 시민이 아니라, 국민이 아니라, 촛불이다.
 시위참가자들은 자신을 촛불로 지칭한다. 민중이 아니라, 시민이 아니라, 국민이 아니라, 촛불이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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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발화지점 '기원'은 <PD수첩>, '원인'은 욕망   

박정수 연구원은 "촛불봉기의 발화원인은 프리온의 감염(시키려는 자본과 그것을 허용한 국가라는 괴물)에 맞서 저지하려는 신체적 욕망"이라며 촛불 진화의 허점을 지적했다. 알다시피, 이명박 정부는 '촛불'의 원인을 4월 29일 <PD수첩>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에서 찾고 있다.

"PD수첩은 한미 쇠고기 협상이 갖는 의미를 해석하고, 미국 축산업계의 검역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그 가시적 표상이 대중의 정신을 편집증적 사고, 즉 우연을 필연화 하는 망상적 사고로 오염시켰고 대중은 확률적으로 희박한 위험을 당면한 위험으로 (오)인식하면서 들고 일어났다고 이명박 정부는 분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PD수첩의 방송내용이 진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밝혀진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촛불은 꺼지기는커녕 '그래서? PD수첩이 오역했으니 어쩌라고? 그만두라고? 소가 웃겠다'며 촛불은 정부의 태도를 비웃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분석은 틀렸다. 첫째, 촛불봉기의 원인과 기원을 혼동하고 있다. PD수첩은 촛불봉기의 출발점(기원)이지 원인이 아니다. 원인은 항상 현재형으로 잠재해 있는 법이다. 둘째, 원인을 객관적 외부에서 찾고 있다. 촛불의 발화원인은 PD수첩이나 MB의 막돼먹은 발언이 아니라, 그 상징적 표상에 감응한 '대중적 신체의 욕망'이다." 

수면욕·식욕·휴식욕으로 충전된 청소년, 촛불 밝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을 반대하는 촛불문화제에서 한 여학생이 정부의 교육정책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을 반대하는 촛불문화제에서 한 여학생이 정부의 교육정책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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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체, 어떤 욕망인가. 바로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 우리는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다"며 수면의 욕망과 식욕의 욕망과 휴식의 욕망으로 0교시, 야자, 우열반 자율화 조치에 반대해온 청소년이었다. 그들이 '이명박 탄핵서명'과 소라광장에 촛불을 켠 대중적 신체이다.

"훈남 만나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은"(5월 2일 청계광장) 욕망하는 신체에 다른 개체들이 속속 결합하여 촛불봉기의 거대한 신체를 구성한 것이다.

대개 상시적인 운동집단은 '가치'를 추구한다. 생태적인 가치, 평화로운 가치, 남녀평등의 가치, 역사진보의 가치 등. 그러나 가치 혹은 대의(Cause)에 대한 신념만으로 지금과 같은 대중적 항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감히 대의(Cause)가 혁명의 원인(cause)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정신적 가치나 이념적 대의는 근본적으로 '말'의 질서, '상징'의 질서에 속해 있다. 그 말이 현실에서 특이한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대중적 신체 안에 그 탈주에 대한 욕망이 잠재해 있어야 한다.

청소년 집단이 그렇다. 그들의 신체는 억압된 리비도로 충전되어 있다. 억압된 리비도의 발산을 위한 집합적 신체를 구성하는 욕망의 강도가 어느 집단보다 크다. 청소년 집단에서 촛불의 불씨가 발화한 원인으로 다섯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학교급식이나 패스트푸드 등 대단위 먹을거리 소비자이지만 소비선택권이 박탈된 집단이라는 점. 둘째, 0교시, 우열반, 특목고 확대, 영어몰입교육 등 신자유주의정책의 핵심 소비자이지만 정책결정권이 원초적으로 박탈당한 집단이라는 점. 셋째, 주체적 요인으로 대중문화나 집단문화의 핵심소비 집단이라는 점이다.

넷째, 이 욕망하는 대중적 신체는 무리동물의 감응수준으로 민감해져 확률적으로 낮지만 실재적으로 잠재하는 변형 프리온의 감염 위험에 대한 감응력이 분열-편집증 수준으로까지 상승했다는 점. 다섯째, 감응과 전염의 소통 강도가 큰 인터넷을 자신의 집합적 신경체계로 장착한 대중이라는 점이다.

이 욕망하는 신체가 소라광장으로 뛰쳐나왔고, 아고라 토론방과 동호회라는 전자-신경-체계를 통해 공감각을 구성해 왔던 사람들이 신체에 결합했다. 물론 대책회의를 구성한 시민단체들, 다함께 등 상시적 운동집단이 촛불의 대리-표상으로 나섰지만, 실재적으로 촛불운동에 특이성을 부여한 사람들은 따로 있다.

"실재적으로 촛불운동에 특이성을 부여한 사람들은 어떤 '대의'나 '가치' 수호를 위한 단체가 아니다. 예술가나 유모차 부대, 먹을거리(82cook), 패션(souldress), 사진 캠코더 동호회(디시인사이드의 각종 갤러리) 등 신체적 연대나 신체적 표현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촛불봉기의 신체에 유연하고도 강력한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 결과 촛불운동의 집합적 신체와 그 신체의 표현 형식은 과거 운동권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인터넷에 연결된 집합적 신경망을 통해 "폭넓게 발굴되고, 순식간에 공유되는 정보들, 날카로운 분석과 과학적인 전망들, 그 지혜"는 놀라운 것이었다. 대중지성의 정서(affect)는 이러한 재기발랄함과 유쾌함, 낙천성이다. 이것이 이전의 시위와 이번 촛불봉기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다. 

③ 확산 신명의 크기가 승리의 크기다

지난 7월 5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국민승리선언 범국민촛불대행진'이 열려 촛불의 큰 몸집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지난 7월 5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국민승리선언 범국민촛불대행진'이 열려 촛불의 큰 몸집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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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촛불의 신체가 거대해지고 태평로가 광장이 되면서 촛불의 욕망은 다시 대리-표상을 향했다. 대책위의 연단과 방송 차량의 규모가 커지는 만큼 촛불의 율동적인 운동속도는 느려졌다. 사람들은 촛불의 집합적 신체를 느끼기보다는 대형 스크린이나 TV화면의 스펙터클에 이끌렸다. 당연히 6·10 백만촛불의 스펙터클 이후 촛불은 잦아들었고,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정부와 보수언론, 전투경찰의 대대적인 반격이 가해졌다. 이에 분노한 촛불은 '국민 줄다리기'와 '국민토성 쌓기' 등으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6월 말의 긴장과 울혈국면 이후 종교단체들의 합류로 촛불을 지키며 위로와 성찰을 통한 몸집 불리기 국면을 통과했다. 이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촛불'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표현해냈다.

"흥겨울수록 승리가 가깝습니다. 신명의 크기가 승리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7월 2일 김인국 신부)

이어지는 시국법회, 시국기도회 등 종교행사의 외관으로 촛불을 지켰고, 정부는 주춤한 듯 보였다. 촛불은 지난 7월 5일 다시 한 번 큰 몸집을 과시했다. 그 집합적 신체의 욕망은 무엇이며 어디로 갈까. 돌변한 정부의 초강경 자세에도 아랑곳 않고 촛불의 욕망은 여전히 막힘없이 분출되고 있다.

법의 한계선 넘나드는 유연한 신체... 게릴라 시위 전개

"'촛불'은 법이 정한 구획들을 넘고자 욕망한다. 일단 시위의 방식에서 게릴라 시위형태를 보인다. 막으면 다른 데로 흘러간다. 법의 한계선을 굳이 위반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욕망대로 흐름 자체에 몸을 맡기면서 흘러가겠다는 것이다."

촛불은 7월 8일 검찰청 앞으로 여의도로 흘러갔다. '아고라 강남 직장인 카페' 소속 등 100여 명은 강남역 주변에서 게릴라 시위를 펼쳤다. '출국금지' 등 으름장 국면에서 조중동 폐간 운동은 더욱 거침없이 영리해지고 있다.

동네 가게를 돌며 "삼양라면 있어요? 요즘 인터넷에서 맛있다고 난리라던데…"라고 묻고, 카드서명과 온라인 상품평에 '조중동 폐간'이라고 쓰기 운동을 펼친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보는 미용실과 병원, 음식점을 가자고 제안한다. 일상 속의 즐거운 저항이 쉼 없이 전개되고 있다.

오는 7·30 교육감선거는 촛불의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은 자신들의 삶이 걸린 문제에서 늘 그랬듯이 완전 배제됐다. 그들의 욕망은 '선거권 연령을 낮춰라'등의 요구로 서서히 분출되고 있다. 하지만 법에 매달리거나 호소하는 방식만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불법이야? 아님 말고"가 촛불이다. 법에 '생까는' 방식으로 저항해온 도도한 촛불이다.

청소년은 우리의 욕망을 표현하는 정책이 뭔지, 어떤 후보가 우리의 욕망에 근접하고 대리하는지 민감한 더듬이로 짚어내고 인터넷, 핸드폰 등 전자신경체계로 확산시킬 것이다. 꼭 참정권 투쟁이 아니더라도 인터넷 모의 투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의견을 펼치지 않을까. 최대한 발랄하게, 창의적으로, 막히면 돌아가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 속에 인용된 박정수 연구원의 '대중지성과 욕망' 원문은 연구공간 수유 너머의 홈페이지(http://www.transs.pe.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PD수첩, #촛불, #게릴라시위, #조중동폐간, #교육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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