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번에 소개할 곳은 갈라파고스처럼 실제의 섬이다. 한강에 있었던 밤섬(栗島)이라는 곳인데, 모양이 밤처럼 생겼다해서 밤섬이라 불리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잉화도(仍火島, 지금의 여의도)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실록에는 잉화도라 하였으나 다른 기록에는 밤섬이라 되어 있다. 밤섬 역시 육류를 궁중에 바쳤고 외부인들과 차단되었기 때문에 반촌과 외양(外樣)이 매우 흡사한데,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명종실록'을 인용해보자.

잉화도는 양화진(楊花津, 지금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일대)과 밤섬 사이에 있는 별도의 구역으로 국초(國初)부터 돼지와 양을 방목하여 가축을 기르는 곳으로 만들어 국가의 관리들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여왔습니다.

그런데 그 관서에 딸린 노복(奴僕)들이 나라에 바칠 돼지와 양을 기르는 일 때문에 그 섬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데, 그들의 풍속이 족친(族親)끼리 서로 혼인을 하여 사촌이나 오촌도 피하지 않는가 하면 홀아비나 과부가 있으면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다른 곳으로 보내어 결혼시키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같이 살면서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밤섬을 관리하는 곳은 제사와 연회에 쓸 고기를 담당하는 전생서(典牲暑)와 궁궐에서 소모되는 육류를 담당하는 사축서(司畜署)였다. 전생서와 사축서는 궁궐과 가까우면서 외부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밤섬에 노비들을 상주시켜 가축을 기르게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촌이나 오촌끼리 마구 혼인한다는 것은 지금의 도의와 법규로도 용납되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조선에서는 어땠을 것인가?

밤섬은 반촌과 전혀 달랐다. 반촌이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했을 뿐 자신들은 자유롭게 바깥으로 나다녔으며, 성균관에 배치된 여종들과 혼례가 가능한 것에 비해 밤섬은 근친상간이 예사로 벌어지는 해괴망측한 곳이었다.

또한 풍기가 문란하기 짝이 없었다(당연한 일이겠지만). 실록에도 깊은 물을 건널 때는 옷을 홀딱 벗었다고 되어 있으며, 남녀가 서로 붙들고 가는 모습이 추잡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좀 더 상세하게 다룬 기록에는 '남자가 여자를 업고 물을 건너기가 예사였으며, 가축을 바치려고 배를 타고 오는 가운데서도 남녀가 서로 주무르고 쫙쫙 빨아대었다'고 되어 있으니 참으로 목불인견이었을 것이다. 오죽하였으면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대간(臺諫)의 주청이 실록에 기록되었겠는가.

그러나 별다른 조치와 처벌은 없었다. 밤섬은 주변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그들의 업무에 충실했다. 그들은 이리저리 어우러지며 흐르는 한강의 물결처럼 스스로 살아왔을 뿐이었다. 반강제로 외부와 구획되어 그날그날 먹고사는 것이 전부이던 민초들에게 삼강오륜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잘못 아니겠는가. 

또한 밤섬과 유사한 곳은 그리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산속에 틀어박혀 화전(火田)을 일구어 먹고사는 자들이나, 뭍과 이격(離隔)된 섬에서 나고 죽는 자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외부의 시각에 그대로 노출된 밤섬이 유별나 보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도덕과 법규를 들이대던 사람들이 더 추악한 경우가 많았다. 가장 근신해야 할 국상(國喪)은 물론, 부모의 상을 당한 양반들이 버젓이 기생과 간음한 기록은 그리 적지 않다. 아름다운 기생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높으신 분들이 발정 난 수컷들처럼 드잡이를 벌이는 것이 예사였다. 심지어는 아비가 첩으로 들인 기생에게서 낳은 계집을 첩으로 데리고 살거나, 아비의 첩을 간음하여 자식까지 낳은 추악한 자들까지 존재했을 정도였다.

또한 질투에 눈에 먼 대갓집 마님들이 남편이 들인 비첩(婢妾)을 차마 입에 담기조차 끔찍할 정도로 잔혹하게도 죽였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실제로 밤섬에도 그런 시체가 유기된 적이 있었다). 배운 자들도 서슴없이 그러는 세상에 도의와 규범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밤섬의 행태가 무슨 대수겠는가. 차라리 그들이 훨씬 인간적이고 가식적이지 않다.

섹스의 해방구였던 밤섬은 봉건과 근대를 지나 1960년대까지 존재했다. 그때도 밤섬의 주민들은 가축을 키우고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하였는데, 조선 시대 같은 행태는 이미 예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가르친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깨우치고 행한 결과였다. 예전에 밤섬에 살았던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 밤섬이 사라진 것은 1968년 2월 10일이었다. 여의도를 개발하기 위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밤섬은 폭파당해야 했다. 폭약에 박살난 잔해에서 끄집어낸 토사와 자갈은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지만 밤섬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저리 찢기고 뜯겨 떠내려간 밤섬의 탄식이 자못 처량하다.     

* 밤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약간 남은 터에 다시 토사가 밀려와 쌓이는 바람에 지금은 제법 섬 같은 모양이 되었다. 섬이 유실되지 않도록 나무를 심고 생태계를 조성하자 철새를 비롯한 야생동물들의 쉼터가 되었는데,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태그:#조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