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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과 바람으로 자연 건조시킨 옷을 입으면 더할 수 없이 상쾌하지요
 햇빛과 바람으로 자연 건조시킨 옷을 입으면 더할 수 없이 상쾌하지요
ⓒ 이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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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옥상, 제가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아침 저녁으로 꼭 찾게 되는 곳입니다. 어쩌다 마음이 좀 울적하거나 혹은 컨디션이 안 좋다가도 이곳에 가면 가슴이 확 트이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지요. 세탁기에서 막 꺼낸 젖은 빨래를 바구니에 담고 계단을 올라 자그마한 문을 열고 나가면 환하게 부서지듯 쏟아지는 햇볕과 함께 부는 시원한 바람이 아주 기분 좋게 절 반겨줍니다.

제가 사는 집은 서울의 평범한 동네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5층짜리 빌라입니다. 작년 봄, 갑작스럽게 서울로 이사를 하며 부랴부랴 1~2년 정도 빌려 살 집을 찾아야 할 상황이 벌어졌어요. 학기 초였던데다가 도무지 전세물량이 귀해서 부동산에 나온 집들이 없었기에 이사 날짜를 앞두고 '이러다가 거리로 나 앉는 것이 아닌가'하고 얼마나 불안했던지요.

결국 다른 모든 조건을 뒤로 하고 '무조건 아이 학교와 가까운 위치의 집이 나오면 들어간다'란 원칙으로 골라 잡은 집인데 그러다 보니 솔직히 제 마음에는 안 드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빨랫줄 옆에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소품(?)'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왜가끔 나오죠? 볼 때 마다 웃음이 나서... .
 빨랫줄 옆에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소품(?)'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왜가끔 나오죠? 볼 때 마다 웃음이 나서... .
ⓒ 이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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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가 엘리베이터 문제였습니다. '다리 운동하는 셈 치고 계단 걷기하면 되지 뭐'하고 평소에는 그냥 다니지만 어쩌다 남편이 없을 때, 잔뜩 장을 보게 되는 날이면 몇 개 층의 계단을 무거운 짐을 지고 낑낑 대며 올라가야 하는 것은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자 보수 문제였습니다. 내 집이 아니다 보니 뭐라도 고장이 나면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보고를 해야 했고 그 후 그쪽의 일정에 맞춰 수리맨을 부르고 어쩌고 하는 절차도 너무 번거로웠어요. 그리고 난 후 수리비용 문제로 옥신각신까지 하고 나니 슬슬 이 집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지려고 했던 차였죠. 그러면서 여름을 맞게 되었고요.

옥상에서 빨래를 널다보면 평소에 잘 안보던 하늘도 자주 보게 됩니다.
 옥상에서 빨래를 널다보면 평소에 잘 안보던 하늘도 자주 보게 됩니다.
ⓒ 이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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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이 옥상의 빨랫줄에서 빨래를 널어 말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햇볕에 자연 소독되고 바람에 뽀송뽀송 말끔하게 건조된 빨랫감들을 보는 순간 기분이 더할나위 없이 상쾌한 것이었거든요. 그 이후, 시간만 되면 숟가락, 젓가락, 도마, 세탁솔 할 것 없이 이것저것 내다가 일광소독을 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과가 되어 버렸지요.

마른 바람과 햇볕에 빨래를 말리는 '맛'을 들이기 전에는 옥상에 빨랫감을 널러 가는 발걸음도 무거워서 '찌익 찌익' 슬리퍼를 끄는 소리도 상당히 컸을 테지만 이제는 사뿐사뿐 어쩌면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옥상으로 향하게 되네요. 코끝에 엷게 퍼지는 섬유린스 향을 맡아가면서 탁탁 소리나게 빨래를 털어 줄에 너는 기분도 꽤 좋습니다.

 보면 볼 수록 정겨운 것들입니다. 저도 뭘 좀 심어보려고 하는데 마음만 앞서네요.
 보면 볼 수록 정겨운 것들입니다. 저도 뭘 좀 심어보려고 하는데 마음만 앞서네요.
ⓒ 이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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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이웃 할머니들의 살림 솜씨도 엿 볼 수 있는 곳이에요. 어느 때인가는 상추랑 토마토, 고추도 심어 놓았던데 이번에는 종목이 바뀌었군요. 베란다에서 키우는 식물과는 벌써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건강합니다. 

친정 뒤꼍에도 많이 있는 항아리들을 여기에서도 보게 되네요. 햇빛 받은 장 맛은 기가 막히겠죠? 부지런한 주부들이 날씨 정보 귀담아 들었다가 뚜껑 열어 햇볕 쪼여주는 일을 열심히 한 덕분에 어느 댁에선가는 매일 저녁 맛있는 장을 끓여 드실 수 있겠지요. 늦은 여름 되면 돗자리가 등장하고 빨간 고추들이 그 위에서 바짝 말라갑니다.

요즘 도심에서는 거미줄 찾아 보기도 힘들어진 듯 합니다.
 요즘 도심에서는 거미줄 찾아 보기도 힘들어진 듯 합니다.
ⓒ 이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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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한 구석에 걸린 거미줄을 아이에게 보여주면 기겁을 하고 도망가다가 다시 와서 유심히 들여다보곤 하지요. 이제 이 공간에 정이 붙어 그런지 거미가 집 짓는 모양도 재미있습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거미줄을 보다 보면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도 없이 설계도도 없이 어쩜 저리 똑같은 간격으로 잘 지었을까?'하는 생각에 말이죠. 자연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빨래를 개는 일은 미루다 보면 끝이 없어요. 빨래를 걷어오자 마자 바로 해 두어야 합니다.
 빨래를 개는 일은 미루다 보면 끝이 없어요. 빨래를 걷어오자 마자 바로 해 두어야 합니다.
ⓒ 이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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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마른 빨래를 걷어다가 착착 접어 분류해 쌓아두는 것까지가 제 일입니다. 이젠 딸아이가 제법 커서 있어야 할 곳에 잘 가져다 두거든요. 빨래 개는 것도 많이 도와주고요. 작은 바구니 하나 들려주면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빨래 정돈을 싹 해줍니다.

100% 손 안가는 링클 프리 와이셔츠 어디 없을까요?
 100% 손 안가는 링클 프리 와이셔츠 어디 없을까요?
ⓒ 이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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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남편 와이셔츠가 남았군요. 저것들은 좀 널어두었다가 제가 다려야 하지요. 몸 좀 편하려고 주름 안 간다는 와이셔츠 사 입혀 봤지만 결국은 잔손이 가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이제는 매대에서 행사하는 저렴한 와이셔츠 사다가 마구 돌려 입게 합니다.

게다가 제 남편의 와이셔츠에는 왜 늘 얼룩이 많은지 싸인펜 거꾸로 집어 넣어 잉크 번지게 하는 것은 기본이고 뭘 그리 잘 잡숫고 돌아다니시는지 양념 국물 묻혀 오는 것까지 메뉴도 다양합니다.

저녁 무렵 빨래를 걷으러 가니 오롯이 저희집 빨래만 남아있습니다. 대부분 아이 옷이네요. 위에 올린 사진과 before/after로 비교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저녁 무렵 빨래를 걷으러 가니 오롯이 저희집 빨래만 남아있습니다. 대부분 아이 옷이네요. 위에 올린 사진과 before/after로 비교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 이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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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보다 부지런한 이웃들이 벌써 각자의 빨래를 다 걷어간 덕분에 저희 빨래만 남았네요. 옛날에는 동네 다니다보면 이런 빨랫줄에 양말이며 속옷도 마구 널어 말리는 모습 많이 볼 수 있었지요? 요즘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간이 빨랫줄에 넣어 각자의 집 베란다에서 말리니까요. 그만큼 민도가 많이 높아졌다는 얘기겠지요. 좀 민망한 광경이었긴 하지만 그 덕분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많았잖아요? 웃을 일도 많았었구요.

아, 그리고 재미있는 한가지! 빨랫줄에 잔뜩 걸려 있는 빨래집게랑 옷걸이들 있죠? 아무래도 여러 집이 빨랫줄을 공동으로 이용하다 보니 이리 묻어가고 저리 묻어가면서 자꾸만  몇 개씩 줄어들게 돼요. 하지만 좀 부족하다 싶은 어느 날이면 또 누군가가 사다가 싹 새 것들로 걸어 놓지요. 돌아가면서 사다 놓자고 순서를 정한 것도 아닌 데 나도 한 번 사고 너도 한 번 사고 그렇게 자연스런 시스템이 갖춰진 것입니다.

아직 저는 빨래집게를 사다 보충해 놓은 적이 없는데 다음에 마트에 가면 작은 행주 걸이를 사다가 걸어 놓을까 봐요. 여름철에 행주 일광소독하면 참 좋은데 아직 마땅한 걸이가 없어서 못 해봤거든요.

이제 좀 있으면 계약기간이 끝나 어차피 이사를 갈 수밖에 없을 텐데요. 이 옥상과 이렇게 담뿍 정이 들어버려서 못내 아쉬울 것 같습니다. 솔직히 아직 계단과는 사귀지 못했고요. 장마철에 빨래 말리기가 어려워서 사실 가스 의류 건조기를 하나 구입할까 생각했었는데 살짝 마음을 접습니다. 대신 새로이 집을 구하면서 무엇보다 빨래 잘 널어 말릴 수 있는 햇살 가득한 옥상을 조건 1위로 넣는다면 남편과 아이가 동의해 줄 지 궁금하네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요리를 들려주는여자 http://blog.empas.com/happymc/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빨래, #옥상, #자연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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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방송에 홀릭했던 공중파 아나운서. 지금은 클래식 콘서트가 있는 와인 바 주인. 작은 실내악 콘서트, 와인 클래스, 소셜 다이닝 등 일 만드는 재미로 살고 있어요. 직접 만든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고 피아노와 베이스 듀오 연주를 하며 고객과 공감과 소통의 시간을 가질 때의 행복이 정말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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