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구비 구비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위는 정완영 시조시인의 '조국'의 일부이다. 시인은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라고 가야금을 노래한다. 가야금(伽倻琴) 곧 토박이말로 '가얏고'라고 하는 이 악기는 사부(絲部)에 속하는 현악기로, 청아하고 부드러운 음색은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국악기로 인기를 끈다.

 

이 가야금이란 악기로 산조를 만든 것은 19세기 말 가야금 명인 김창조인데 이후 발전, 계승되어 온 유파는 강태홍류, 김병호류, 김윤덕류, 김죽파류, 사공철류, 성금련류, 함동정월류 등이다.

 

이 가운데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는 대표적인 판소리 더늠의 산조로 농현과 시김새, 장단 등이 다른 산조에 비해 매우 독특하다는 평을 받는다. 따라서 김병호류 산조는 깊은 농현과 다양한 시김새, 복잡한 장단 때문에 다른 산조에 비해 조금 어려운 느낌이 있어 그 깊은맛을 즐기기엔 약간의 시간이 걸리지만 그 질박하고 오묘한 맛은 인간의 속마음에 호소하는 산조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 김병호류를 올곧게 이어온 부산대 김남순 교수가 가야금산조 음반을 신나라(회장 김기순)를 통해서 냈다.

 

어라! 일반적으로 듣던 가야금산조와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글쎄 무엇 때문에 이렇게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게 할까? 음반은 다스름으로 시작해서 휘모리, 단모리로 끝나는 김병호류 긴산조가 녹음되어 있고, 진양조로 시작해서 역시 단모리로 끝나는 김병호류 짧은 산조가 들어 있다.

 

거문고와 해금의 명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김영재 교수는 김남순의 산조를 이렇게 말한다.

 

"김남순 교수의 연주는 김병호류 산조를 가장 올곧게 이어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일반적인 가야금 산조와는 달리 터치가 강하고 야무지면서도 농현이 깊은 것은 물론 굴곡이 심하고 박자를 넘나드는 그런 연주다."

 

여기에 더하여 전통음악 음반기획자 양정환 탑예술기획 대표에게도 김남순 가야금 산조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2세대 이후 가야금 연주자들이 대부분 여성 연주가인 탓이어선지 그동안 산조 연주 소리를 들으면 잔가락 위주의 섬세한 맛 일색이어서 좀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김남순 교수가 가야금 여섯 바탕을 모두 녹음할 때 들었던 소리는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김병호류에 걸맞게 남성적인 맛이 우러나면서 시원하게 탄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그와 함께 여성스러운 맛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기막힌 연주라는 생각이 들어 녹음이 끝난 뒤 나는 일부러 기다렸다가 덕담을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 맛이었구나. 김남순의 소리에선 김병호의 음악을 그저 답습한 것이 아니었다. 김병호의 음악을 제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자신의 음악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그것도 김병호 음악의 남성적인 맛에 김남순만이 해낼 수 있는 여성스러움을 적절히 조화시킨 기막힌 작품이라는 양정환씨의 말은 중성적인 연주라는 뜻은 분명히 아닐 터이다.

 

이제 나는 김남순의 김병호류 가야금산조를 음반이 아닌 실제 연주로 듣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 생긴다. 김남순에게 실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기쁨을 달라고 간청해볼까? 많은 이가 단순한 가야금산조가 아닌 김남순만의 기막힌 연주를 들어볼 것을 권해본다.

 

남자의 속울음 소리 같은 슬픔까지도 즐긴다

[대담] 김병호류 가야금산조 음반을 낸 김남순

- 어떻게 가야금을 하게 되었나?

"나는 4~5살 때 한번 듣기만 하면 그냥 부를 정도로 민요를 제법 부르곤 했었다. 그래서 내게서 민요를 듣고자 자주 주변 사람들에게 납치되곤 했었다. 그러다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중등과정)는 내가 가야 할 학교라 생각하여 들어갔다. 그리고 3학년 때 가야금 타는 모습을 보고 전공을 선택하게 됐다. 그 모습은 봉황이 두 날개를 펼치는 듯 아름다웠고, 끊일 듯 이어지는 소리가 나를 황홀하게 한 탓이다."

 

- 김병호류를 계승했는데 김병호 가야금산조의 특징은 무엇일까?

"김병호 선생님의 산조는 그야말로 '옥을 깨는 소리'처럼 정말 맑디 맑은데 선생님이 남겨주신 소리를 듣노라면 그냥 가슴이 저리다. 인간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정신세계로 하늘에 비나리를 하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인생은 처절한 것만은 아니라고 가르쳐주는 듯한 진흙탕 속에 핀 고고한 연꽃 바로 그런 소리가 아닐까?"

 

- 음반을 낸 뒤의 느낌은 어떤 것이고, 앞으로 어떤 자세로 연주할 것인가?

"음반을 내고 보니 정말 부끄럽다. 음반에 빈 곳이 너무 많아서다. 훌륭한 선생님의 음악을 이 정도밖에 소리 내지 못했다니 정말 안타까움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나는 앞으로 남자의 속울음 소리 같은 슬픔까지도 즐길 수 있도록 연주하고 싶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몇 사람 앞에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연주할 것이다."

 

- 김병호 가야금산조를 소리내기까지 어떤 분들에게 공부를 했나?

"김병호류를 맨 처음엔 김정숙 선생님께 배웠고, 고 강문득 선생님은 신기에 가까울 연주로 김병호류의 매력을 일깨워 주셨으며, 김병호 선생님의 조카딸 김덕희 선생님은 다스름을 가르쳐 주셨음은 물론, 김병호 선생님이 세상을 뜨시기 1년 전 녹음한 잇모리 테이프를 전해주셔서 귀한 바탕이 되었다. 그밖에 '그게 가야금 소리가 아니다'라고 하신 아버지는 어쩌면 내게 가장 무서운 스승이었을 것이다."

 

- 요즘 가야금을 개량하여 25현 연주가 보편화하였다. 악기의 개량을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는가?

"지금 세상은 다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음악을 세상에 알리려면 다양한 계층 사람을 끌어 모으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25현도 필요하다. 발효된 김치를 알리려면 겉절이도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하지만, 오동나무와 명주실로 만들어진 12줄 가야금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 순응했던 우리 겨레가 만든 자연의 소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가야금산조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나는 지난해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회 때 연주회를 보러 오셨던 권남혁 당시 부산고등법원장님께 인사를 드렸었다. 그 뒤 찾아가 내가 단장으로 있는 부산가야금연주단 제3회 정기 연주회에 오십사 말씀을 드렸더니 쾌히 10장의 표를 사서 연주회에 오셨다. 고위 공직자가 연주회에 뜨자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은 만석이 되었고, 100여 명은 자리가 없어 돌아갈 정도였다. 권 고등법원장님은 문화를 좋아하시는 공직자로 정말 잊을 수 없는 분이다."

 

- 앞으로 가야금 산조를 위한 어떤 계획이 있나?

"예술은 '법고창신'이어야 한다. 국악은 기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악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 지금은 기교(테크닉) 위주의 교육 풍토인데 이를 극복하려는 일에 앞장설 것이다. 바른 인격이 바탕이 되어 음악의 정수를 되살리는 교육을 하고 싶다. 그래서 그런 방향의 부산대 평생교육원 전문가 재교육과정을 여름 방학 때 개설할 예정이다.

 

연주자는 소리를 들어보면 자기 고백이 나온다. 현재의 내 소리는 김병호 선생님의 옥돌 깨는 소리에 견주면 벽돌 깨는 소리쯤 될까? 그래서 나는 더욱 정진할 생각이다. 특히 아무리 김병호 선생님의 소리가 감동이더라도 그대로 타지는 않겠다. 나만의 소리가 되도록 온 정성을 쏟을 것이다."

 

김 교수는 "산조 인생은 500년 살지만 정악으로 살면 천 년을 산다"라는 말이 있다며 대나무처럼 속을 비우고 청초하게 살 것임을 내비치기도 했다. 대담 내내 따뜻한 성품이 물씬 품어나오는 향기에 나는 도취해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남순, #가야금산조, #신나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