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문화정치의 실상

1919년 8월 총독 부임을 위해 남대문역에 내린 사이토 마사코는 마차로 옮겨 타자마자 무시무시한 폭발음을 들었다. 그것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국내로 숨어 들어온 강우규가 던진 영국제 폭탄이었다. 기자와 관리들 십수 명이 다쳤지만 다행히 화를 모면한 사이토는 전임자 데라우치의 무단정치를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폭탄을 던진 이는 65세의 흰옷 입은 노인이었다.

사이토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녹록치 않은 문화 국가임을 알고 있었다. 동양에서 절대 강국이었던 중국을 제외한다면 조선은 수천 년 동안 동양의 일등 국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조선의 사신은 중국에서 언제나 다른 나라 사신보다 상석에 앉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조선의 쇠퇴기는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의 50년에 불과했다.

강우규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사이토는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는 대신 병력을 3배로 증강했다. 그는 무단정치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 문화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본격적인 조선인 유화정책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일선융화(日鮮融和)라는 명분을 내걸고 총독부 관리의 문관 등용, 일본인과 한국인 간의 차별 철폐, 지방으로의 분임· 분권, 재래 문화 및 관습 존중,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한국인 인재 등용과 문호 개방 등의 시정방침을 제시했다. 그는 관리와 교원의 제복과 착검을 폐지하고, 태형을 없앴으며, 일본인으로 한정되었던 보통학교 교장에 한국인을 등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는 동아 · 조선 · 시대 등 세 신문의 간행을 허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면적으로 그는 조선인 사상 전담 특별고등계 형사(일명 특고)를 두 배로 증원했고 파출소를 면 단위 마을마다 설치했다. 그는 언론·출판의 검열을 대폭 강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언론인들을 해임 투옥했다. 그는 모든 한국 지식인을 친일파와 배일파로 분류했으며 이들에 대한 감시 거리를 거의 맨투맨으로 밀착시켰다. 그는 민족동화교육의 일환으로 한국어 대신 일본어 사용을 장려했다. 그는 학교 교육에서 일본의 역사와 지리 교과목을 대폭 늘리게 했고, 한국 교육자를 국어(일어) 상용자와 국어 비상용자로 구분했다.

이렇게 되니, 당대에 활동할 수 있었던 언론인과 교육자는 모름지기 문화정치의 분식 요건(粉飾要件)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토가 부임 이후 가장 먼저 한 것은 교육 지침을 만들어 전국에 시달한 일이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신교육 칙어

먼저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잃게 하고, 조선인의 조상과 선인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쳐 내어 가르침으로써 조선 청소년들이 부조(父祖)를 멸시하도록 만들고, 결과로 조선 청소년들이 자국의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여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한 후,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교육하면 동화의 효과가 클 것이다. 이것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다.

사이토는 중추원 부속 기구인 반도사편찬위원회를 총독부 산하로 복속시키고 이름을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꾸었다. 그는 조선사편찬위원회에 직접 참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위원장에 정무총감 사타오카를 임명하고 경성대 교수인 로이타, 미우라 같은 일인 관학자와 이완용, 권중현 등의 친일 인사를 고문으로 위촉했다. 그리고 쓰에마시나, 이마니시 같은 우익 학자를 위원으로, 이병도· 신석호 등의 한국인 학자를 실무 연구진으로 기용했다.

두드러진 활약 보인 이병도

특히 이완용의 숙질이기도 한 이병도의 활약은 매우 두드러졌다. 1914년 와세다에 입학한 이병도는 처음 서양사를 전공하려 했으나, 당시 일본사의 권위자였던 요시다의 <일한고사단>이라는 책을 읽고 강의를 들은 뒤 한국사로 진로를 바꿨다고 했다. 

어느 날 이병도를 비롯한 한국 학생 몇은 요시다에게 질문했다.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짧은 시일에는 안 된다. 그러나 50년이면 충분하다.”

이병도는 평생 자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요시다 박사였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조선사편수회는 먼저 조선인에 대한 역사 강습회를 개설했다. 그리고 1년 후 강의록을 책으로 만들어 <조선사강좌>를 간행했다. 이 책에서 일제는 한국에 대한 외세의 침략과 영향을 과장해서 서술함으로써 한국사의 출발과 과정이 외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주지시켰다.

다시 말해 한국사는 자율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고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이른바 ‘한국사 타율성론’을 도출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한국은 발전할 수 없다는 ‘한국사 정체론’을 부각시켰다. 한국 역사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은 두 말할 여지도 없이 ‘한국 독립 불능론’을 위한 위장의 논리였다.

동아일보 창간 비화 

와세다대학 영문과와 도쿄외국어대학 러시아문학과를 몇 개월씩만 다니다 성적과 학비 문제가 겹쳐 그만 둔 진학문(秦學文)은 국내에 들어와 할 일을 찾던 중 최남선의 추천으로 매일신보에 입사했다. 얼마 후 경성일보에서 그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그는 곧장 수락하고 직장을 옮겼다.

매일신보도 그렇지만 경성일보도 총독부가 식민지 정책을 선전하기 위해 만든 어용 언론이었다. 그는 경성일보 사장 아베의 신임을 얻게 된다. 아베는 진학문을 쓸모 있는 한국 언론인으로 점찍은 것이었다. 그는 진학문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시켜 언론계 경력을 쌓게 만든다. 진학문은 아사히신문 경성지국에서 근무하면서 총독부와 산하 각급 기관을 출입하며 식민지 통치 세력과 친분 관계를 맺는다. 1910년대 당시 대부분의 한국 지식인들은 차라리 백수로 지낼지언정 일제의 어용 신문에 지식을 팔아 생계를 해결하는 일은 모욕이라고 여기고 있던 터였다.

식민지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한국인에게 언론·출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개량주의 민족 세력을 육성하여 총독부의 감시권 내에 두면서 그들을 골수 민족 세력과 분열· 대립시키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가 한국인이 사주가 되는 신문사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그의 의도를 간파한 사람은 주위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언론인과 언론 지향 기업인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위의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아주 자신 있게 일을 추진했다.

그는 민원식에게 시사신문을, 송병준에게 조선일보를 허가했다. 그러자 주위의 우려가 다소 가라앉았다. 민원식과 송병준의 성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모르게 제3의 신문 창간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만은 극비리에 진행했다. 동아일보만은 관제 신문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효과가 극대화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는 경성일보 사장 아베를 만나 극비 신문 창간 프로젝트의 지휘를 맡겼다.

아베는 진학문을 불러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진 기자, 관제가 아닌 민간 신문을 한 번 만들어 보지 그래. 그것도 민족 세력이 주체가 되는 신문 말일세.”
“총독부에서 허가해 줄 리가 없지요.”
“아, 그런가?”

아베는 더 이상 신문 창간 얘기를 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사무실로 돌아온 진학문은 점심도 먹지 않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베 말대로 민족주의 색채를 띠는 신문을 만든다면 그것은 성공을 담보해 놓은 거나 진배없었다. 왜냐 하면 유일한 민족 신문이라면 독자를 확보하기가 너무도 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총독부의 인가였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아베가 자신을 불러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일을 놓은 채 다시 깊은 생각에 빠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작년에 총독부 내무장관 우사미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 그는 정말 실없이 투정이나 부린다는 듯이 우사미에게 말했었다.

“장관 각하, 관제 신문은 많이 허가해 주시는데 민간 신문은 안 내 주실 겁니까?”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농담으로 해 본 말이었다. 그랬는데 우사미는 의외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한참이나 머뭇머뭇 하더니,“한데 뭉쳐서 출연해 보지 그래”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모를 일이었다. 민간 신문 하나 정도는 표내지 않고 만들겠다는 의도를 총독부가 갖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서로 모르는 것처럼 하면서 추진해야 될 일이었다.

그는 즉각 아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제가 민족 신문 하나를 창간하고 싶은데 도와주시겠습니까?”
“이 사람아!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면서 내는 신문이 무슨 민족 신문인가?”
“그렇군요.”
“알았으면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지 말고 인가 신청서를 내 보는 게 어떨까?”

송수화기를 놓은 진학문은 희열에 휩싸여 들었다. 그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하기가 어려워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 했다. 얼마 후 민간지 창립 허가를 예상보다 손쉽게 얻어낸 진학문은 최두선을 통해 자금주로 김성수를 소개받았다.

마침내 1920년 4월 민족지를 표방하는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동아일보는 창간사에서 ‘문화주의’와 ‘연맹주의’를 표방했다. 그런데 당시 총독부는 ‘문화정치’와 ‘세계주의’를 구호처럼 내세우고 있었다. 진학문은 동아일보의 정경부장 겸 학예부장 겸 논설위원을 맡게 된다.

그런 그가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퇴사하면서 러시아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대학에서 전공했던 러시아 문학에 대한 열정을 도저히 못 버리겠어.”

그러나 러시아에 가겠다던 그는 상해에 가서 조소앙, 홍명희, 안창호 등을 만났다. 그는 이광수를 따로 여러 번 만났다. 그리고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이동휘를 만났다. 그가 도저히 열정을 못 버리겠다던 러시아 문학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여정이었다.

국내로 들어온 그는 총독 사이토와 10여 차례 면담하고 기밀비를 받았으며 총독부 경무총장을 비롯한 고위 관부들과 계속 접촉했다. 얼마 후 이광수가 상해를 버리고 국내에 돌아와 세간의 예상과 달리 간단한 조사만 받은 후 풀려나게 된다.

한편 기미독립선언으로 2년 6개월의 형을 받고 1년도 안 돼 가석방된 최남선은 주간지 <동명>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어떻게 자금 조달을 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진학문이 조선은행 총재 미노베에게 자금을 부탁했는데 빨리 나오지 않아 그것을 사이토에게 독촉성으로 건의했다는 기록은 일본의 총독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총독부는 최남선을 도와주면서 진학문과 이광수의 생활비까지 마련하려 했다는 내용도 기록되었다. 그것은 조선총독부의 한 고위 관리가 사이토 총독에게 올린 제안서에 있었다.

소생의 생각으로는 최남선의 잡지가 발행되면 내지의 건전한 출판물을 적당히 쉽게 조선 어로 번역해서 소책자로 만들어 팔 수 있습니다. 그러면 출판업이 활성화되고 그 결과 조선 사상계가 건전해질 것이며 아울러 진학문과 이광수의 생활비 조달도 할 수 있습니다. 동경 유학생들의 공기를 살피건대, 최남선은 어지간히 낡은 인물이라고 배척되는 추세입니다. 따라서 최남선도 이런 분위기에 맞설 수 있도록 해 줘야 합니다. 그가 유생과 학생 사이에 끼어서 그들끼리 논전을 일으키게 하면 조선 사상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묻혀진 역사와 사건들,그리고 영혼으로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인물들을 그림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창조적으로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진학문, #이병도, #사이토, #강우규, #이광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