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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사라진 옛길을 살린 '올레'에는 자연 그대로의 숨결이 살아있다. 여성위원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느릿느릿 간세다리로 걷고 있다.
 제주의 사라진 옛길을 살린 '올레'에는 자연 그대로의 숨결이 살아있다. 여성위원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느릿느릿 간세다리로 걷고 있다.
ⓒ 김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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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만든 섬에, 여성이 길을 내고, 그 길을 여성이 걸었다. 아름다운 우연이다. 천혜의 땅 제주도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설문대라는 할망이 망망대해 가운데 만든 섬이다. 내 고향 제주도에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걷는 길'을 만들고자 소망한 서명숙(전 <시사저널>·<오마이뉴스> 편집장)씨는 작년 여름 제주의 사라진 옛길을 찾아 '올레' 길을 냈다.

그리고 5월 30일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여성위원 20여 명은 느릿느릿 간세다리(게으름뱅이)가 되어 올레를 걸었다. 넉넉한 엄마의 품 제주의 젖줄 따라 몸을 길게 뉘였다. 아이처럼 초롱초롱 세상을 둘러보고 멋진 풍광 배불리 들이켰다. 꿈틀대는 흙길을 밟으며 자연, 사람, 일, 사랑 등 그 억척스러운 생명력을 논했다.

'아득한 신화에서 지극한 현실'로 이어지는 여성의 초월적 연대, '평화·생태·노동'의 공생을 도모하는 진보적 여행. 제주는 그들을 반겼고, 그들은 제주에 반했다.

한라에서 광화문까지 '미친 쇠고기 수입 반대'

그들이 처음 발을 디딘 곳은 대평 포구다. 소설에나 나옴직한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다. 관광객도 매표소도 상점도 없다. 달력 그림도 아니다. 이른바 제주도의 '생얼'이다. 세계자연유산의 맨얼굴을 목도한 그들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당연하다. 제주도는 최소한 한 번씩 다녀갔지만 '립스틱 짙게 바른' 제주도만 봐왔으니.

일행은 먼저 바다를 등지고 관광 사진 대열로 섰다. 김금숙 사무금융연맹 여성국장은 현수막을 펼쳤다. '우리집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합니다.' 이번 일정이 아니었으면 도심에서 촛불 밝혔을 터. 아쉬운 대로 원정 시위에 나선다. 한라에서 광화문까지. '고시철회 전면재협상'의 함성을 실어 보낸다. 찰칵!

사무금융연맹 여성간부들이 제주올레 걷기에 나서며 '한라에서 광화문까지' 미친소 수입반대의 함성을 실어보냈다.
 사무금융연맹 여성간부들이 제주올레 걷기에 나서며 '한라에서 광화문까지' 미친소 수입반대의 함성을 실어보냈다.
ⓒ 김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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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걷기가 시작됐다. 줄지어 '몰질'을 간다. 제법 가파르다. 뮤직 비디오처럼 우아한 바닷가 산책을 상상했던 여성 위원들은 난데없는 극기 훈련 코스에 진땀을 흘린다. 흙길에 바짝 몸을 붙여 오르고 또 올랐다. 제주올레 탐사대장 서동철씨는 "몰질, 조슨다리, 기정길, 안덕계곡 등으로 이어지는 5코스는 30여 년 동안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이라고 소개했다.

정상 부근에 이르자 '조슨다리'란 팻말이 보인다. 200여 년 전 대평리 기름장수 할머니가 화순으로 빨리 넘어가기 위해 바윗돌을 호미로 콕콕 쪼아서 만들기 시작한 데서 유래한 길이란다. 어느 주민의 증언으로 찾게 된 길이다. 할머니의 등에 업혀 다니던 손자가 유년시절 기억을 더듬어 일러준 것처럼 오래 전 고무신 자국 남아 있는 사람의 길이 바로 '올레'다.  

제주의 모든 길은 사실상 다 누군가의 올레다. '올레'는 집으로 통하는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발음상 "제주에 올래?"라는 살가운 인사말도 된다. 쓰레기와 바가지 요금의 스트레스만 남는 기존의 주류 여행과는 다르니 한 번 와보라는 솔깃한 제안이다. 

노조 여성 간부가 제주 품으로 행군한 까닭은

"작년에 올레를 걸어 보고 여성위원들과 꼭 같이 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조의 활동이 일터에만 국한되는 건 아닙니다. 특히 살림 육아 등 '돌봄 노동'을 해온 여성은 일상 자체가 생태나 환경에 연관이 깊습니다. 노동운동이 생활 속의 진보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여성위원들과 함께 걸으면서 고민해 보고 싶었습니다."

'반 개발, 친 자연'을 주제로 한 제주 올레의 설립취지가 환경과 생태, 평화를 표방하는 여성국의 사업방향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김금숙 여성국장은 말했다. 2박3일로 진행된 이번 행사의 공식명칭은 '2008 연맹 여성위원회 수련회 및 제주올레 걷기'. 현대해상화재보험 부위원장 정선경씨, 한국은행 부위원장 김선희씨를 비롯해 생명보험 손해보험 등 금융권 노조 여성간부 20여 명이 참가했다.

제주올레는 파란 리본과 화살표 등의 파란색 표시로 길이 안내되어 있다.
 제주올레는 파란 리본과 화살표 등의 파란색 표시로 길이 안내되어 있다.
ⓒ 김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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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걷기에 나선 도시의 여인들은 힘들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안색은 해처럼 환하다. 둘 셋씩 짝지어 걷거나 혹은 외따로 떨어져 걷는다. 저마다 몸의 속도대로 간다. 일행과 뒤처지더라도 올레 표시인 파란 화살표와 파란 리본만 따라 가면 되니 걱정 없다. 잡풀 무성한 낯선 흙길도 한 발만 내딛으면 아늑한 푸른 융단으로 변한다.

발아래 깎아지른 절벽과 옥빛 바다가 수시로 펼쳐진다. 개울가에선 넙적한 돌을 놓아 징검다리를 만들어 가며 건넌다. 새소리에 귀가 간지럽고 찔레꽃 향에 코가 시큰하다. 가다보면 한들한들 들길이고 돌아서면 찰랑찰랑 청계수 넘실댄다. 지루할 틈이 없다. 어디로 시선을 두어도 태초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살아있으니, 올레 길엔 외마디 감탄사와 셔터 소리로 가득했다.

추임새처럼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한층 숨 가쁘다.

"와, 감동이다. 제주도에 이런 데가 있었다니!" 

느리게 걷고 공사에 반대하는 '안티 MB' 운동 

제주올레 5코스는 8.81Km로 비교적 짧다. 세 시간 넘게 걸었을까. 종착지인 화순해수욕장에 이르자 올레를 탄생시킨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마중을 나와 있다. 여성위원들은 "제주도의 새로운 발견"이라며 "제주도에 반했다"고 입을 모았다. 서명숙 이사장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탐라공주'답게 제주설화를 들려주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제주도가 여러모로 여자와 인연이 많은 섬이에요. 제주신화도 설문대 할망이 주인공이죠. 해녀는 세계 최초의 여성 전문직이고요. 올레 길에 각계각층 다양한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이렇게 여성 간부들이 와주니 더 뜻 깊습니다. 조직생활이 기운이 많이 빠지죠. 사람이 좋아서 시작한 일도 지치게 마련인데 이틀 간 걸으면서 자연의 치유를 받길 바랍니다."  

제주도에 비교적 태초의 자연이 살아있는 건 육지와 연결이 안 됐기 때문이라고 서명숙 이사장은 말했다. 몇 년 사이 펜션과 호텔이 난립한 일부 관광지의 사례가 말해주듯 자동차 한 대가 자연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은 사람 백 명과도 비교가 안될 만큼 막강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올레는 길을 내는 과정부터 자연에 대해 예의를 갖췄다. 차와 콘크리트를 철저히 배격하는 등 공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제주올레는 이명박 대통령과 가장 대척점에 선 정치적 선언입니다. 느린 걷기로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상 운동이죠. 대한민국은 압축 성장 과정에서 이미 너무 많은 곳을 파헤쳤습니다. 그러고도 또 대운하를 파겠다고 하니 답답합니다. 우린 아직도 자연에 배가 고픈데 말이죠. 자동차 경적 소리 들리지 않는 길, 단절 없이 마냥 걸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사람에게 꼭 필요합니다."

올레에 압도당한 그녀들 "내 인생의 로또"

입장료도 상점도 관광객도 없다. 진짜 제주를 느낄 수 있다.
 입장료도 상점도 관광객도 없다. 진짜 제주를 느낄 수 있다.
ⓒ 김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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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바람꼬리가 한결 포근하다. 일행은 금빛 햇살 부서지는 화순해수욕장에서 만났다. 최근 개장한 6코스를 걸을 예정이다. 여기부터는 "흙빛 모래와 완만한 해안선, 고즈넉한 풍광이 일품"이라고 서명숙 이사장은 소개했다. 이어 "올레 우등생은 간세다리"라며 "등산하듯 정면 주시형 자세는 곤란하다"라고 당부했다. 

여성위원들은 맨발, 샌들, 등산화, 운동화 등 자유로운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5코스와는 색다른 여로다. 바다를 옆에 끼고는 바위를 타고 동산을 넘는다. 갑자기 두 눈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일망무제의 초원이 펼쳐진다. 걷다가 쉬다가 찍다가. 몇 명은 바다로 뛰듯이 '입장'했다. 나머지는 널찍한 바위에 철퍼덕 누워버렸다. 뒤로는 삼방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우주의 치맛자락에 폭 안겨 천연 돌침대에서 찜질을 즐긴다. 그 순간 하늘에 일곱 빛깔 무지개까지 떴다. 지나치게 극적인 풍경이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했나. 잠시 말문이 막힌다. "지상의 낙원이 바로 여기"라며 여기저기서 행복한 비명이 들려온다. 조용한 해안가를 접수한 그들은 로또라도 당첨된 양 환호한다. 

줄곧 캠코더로 여행을 기록하던 한국상호저축은행 윤연주 지부장은 이내 심각한 고민에 빠져버렸다. "이걸 블로그에 올려야 하나 말아야하나. 사람들이 많이 알아서 이 좋은 곳이 관광지처럼 망가지면 어떡하지…." 유독 말없이 걷던 박영숙 AIG생명 부지부장은 "사람과 기계의 손이 닿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다 난다"라고 울먹였다. 사연은 달라도 결심은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꼭 다시 오리라.'

'수용 가능한 인간적인 속도'로 걸어 '나를 찾는다'

"산티아고에서 무척 아끼던 가죽 샌들을 잃어버렸어요. 자꾸 생각나네요. 그 여행에서 잃어버린 물건이 한 스무 가지는 될 걸요. 하긴 그래도 아까워 말아야죠. 나를 찾았으니."

하도 걸어 틈이 벌어진 슬리퍼의 뒤축을 매만지는 서명숙 이사장. 그가 20년 간 언론인의 생활을 접고 산티아고로 떠난 일은 유명하다. 20㎏의 배낭을 메고 하루 25~30㎞를 걸었다고 전한다.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는 한라산이 생각났고 총 800㎞의 대장정을 마친 피니스메라(땅끝마을)에서는 서귀포가 생각났다고 회상했다. 제주도에도 산티아고와 같은 도보여행코스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 그 꿈이 빚어진 길이 '올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걷는 길 '제주올레'를 만든 서명숙 이사장은 수용 가능한 인간다운 속도로 살길 소망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걷는 길 '제주올레'를 만든 서명숙 이사장은 수용 가능한 인간다운 속도로 살길 소망했다.
ⓒ 김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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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가르며 휘적휘적 사람이 걷는다. 그가 길을 만들고, 길이 그를 만든다. 신묘한 삶의 이치다. 그의 뒤를 사뿐사뿐 따라가 물었다. 열여덟 이후 청춘을 다 보낸 서울인데 생각나지 않느냐고. 사랑하는 벗들을 두고 온 그곳이 그립지 않느냐고. 제주의 무엇이 그리 좋으냐고.

"인간다운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죠. 수용 가능한 인간다운 속도. 경적소리 안 들어도 되니까. 목욕탕 하나를 가더라도 편히 다녀올 수 있고. 요즘 같이 촛불집회 할 때면 한 번씩 서울 생각날까…여기가 좋아요."

그렇다면 애면글면 살던 그 시절 중 가장 '후회막급'한 점은 무엇일까. 마감과 특종 전쟁터인 언론사에서 느림이 미덕일 순 없겠으나 생의 노른 자위에서는 가속페달을 세게 밟아줄 필요도 있지 않은가.

"그렇죠. 그런데 삶에는 균형이 중요한 거 같아요. 난 인생 전반부와 후반부의 균형은 맞췄는데 그 한 시기의 균형은 전혀 없었어요. 7:3 정도로 해도 될 것을 9:1의 극단을 취한 거 같아요. 아무리 예쁘던 후배도 휴가 쓴다고 하면 미워지고 (웃음) 휴식이 재충전이란 것도 몰랐어요. 휴가를 가도 사람 많은 관광지만 가니까 더 스트레스 쌓여서 돌아오곤 했거든요."

다시 걷는다. 인간다운 삶, 인간다운 여행은 '인간다운 걸음'에서 열리나 보다. 걸음은 삶의 최소 단위다. 인간 본연의 생생한 지각능력을 되살리는 깨어 있는 걸음으로 걸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도 사는 것이라고, 올레가 말해준다.  

생명 살리고 품는 찰떡궁합 '여성과 올레'  

서명숙 이사장은 제주는 머문 만큼 느낄 수 있고, 체험한 만큼 만족도가 높아지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걸어서 두 발로 지문을 찍어온 길은 자기 땅 같은 느낌을 갖게 되고 몸이 기억한다. 그러니 걷는 관광이야말로 재방문율을 높일 최고의 프로그램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우주의 치마폭에 감싸인 여성위원들. 자연과 나를 발견하는 제주올레에 사랑하는 사람과 꼭 다시 오겠다고 다짐한다.
 우주의 치마폭에 감싸인 여성위원들. 자연과 나를 발견하는 제주올레에 사랑하는 사람과 꼭 다시 오겠다고 다짐한다.
ⓒ 김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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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고향이나 동네의 옛길을 찾아보세요. 산보길이 바로 올레길이에요. 전국 도보여행자들의 올레길을 엮으면 대동여지도가 되겠죠. 구석구석 골목경제도 살아날 테고요. 전국에 올레길 낸다는 건 상당한 정치적 실천입니다. 밀어붙이기식 추진, 가시적 성과를 강요하는 사회에다 대고 '아니오'라고 말하는 거죠. 개발은 위험하다, 자연보존이 최고다. 환경만 뜯어먹고 살 수 있다는 걸 각자 삶의 터전에서 보여주면 좋겠지요."

도로 한복판에 마련된 정자에 앉아 잠시 다리를 쉬던 여성위원들은 하드를 먹으며 서명숙 이사장의 '길거리 특강'을 경청했다. 이어 힘을 충전한 일행은 걸었다. 두런두런 수다의 물꼬가 터졌다. 여성위원들은 아이들 교육 정보를 나누거나 조합 활동의 고민을 논의했다. 햇볕 가득 머금은 바람이 은은한 풀향기를 실어 나르니 모든 인생사 화젯거리가 '보송보송' 싱그러워진다. 송악산을 넘어 하모리해수욕장까지. 약 16㎞의 해안도로 코스를 마쳤다.

숙소로 돌아간 여성위원들은 한국은행노동조합의 생협운동과 윤리적 소비운동 사례를 모델로 향후 노조활동 방향에 대해 토론했다. 지부 단위의 식품안전교육 실시, 지부 단위의 농촌체험, 구내식당에 생협물품 이용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밖에도 대형 마트나 프랜차이즈 안 가고 작은 가게 이용하기 등 양극화를 해소하는 윤리적 소비운동 방안도 논의했다. 누군가 회의록에 적힌 '생각하지 않고 살면, 결국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스콧 니어링의 말에 밑줄을 긋는다. 여성위원들은 숭고한 '올레 정신'을 일상에 적용하고 널리 알려 확산시키자고 손가락을 걸었다.

여성과 올레. 생명을 낳고 거두고 살리는 일에 능한 여성과, 살아 있는 대자연을 품은 올레는 닮았다. 여행도 사람과 장소에 맞는 궁합이 있다면 둘의 연분은 축복이다. 사랑하는 자는 창조한다. 올레를 통해 증식되는 생명 사랑의 길을 그려본다. 생이 무르익는 올레… 좋지 아니한가.


태그:#제주올레, #사무금융연맹, #여성노동운동, #생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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