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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성 구조물 '명박산성'

 

지난 10일, 촛불문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광화문 일대 세종로 사거리에 도착한 시민들은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들을 보고 눈길을 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오전에 언론에서 보도한 바 있지만, 직접 보면 그 느낌은 또 다르다. 그 컨테이너 박스 모음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이름을 붙여줬다. 뭘까? '명박산성'이다. 보라, '명박산성'의 웅장한 자태를….

 

 

6·10 항쟁 기념일에 맞춰 '100만'이라는 숫자를 내걸고 최대 규모의 촛불문화제를 지향했던 6월 10일의 촛불문화제, 그야말로 역대 최대 규모의 인파가 몰렸다. 경찰 추산 집계는 8만이었지만, 직접 봤다면 그 수치를 믿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엄청났다. 주최 측 추산 집계는 70만이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세어보겠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을 정도였다.

 

'명박산성'은, 그 최대 규모 인파가 몰릴 것에 대비해 서울경찰청 경비과가 주도해 건축하고 일용직 노동자를 동원해 건설했다. '폭력과잉진압'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청와대로 향하려는 시위대와 매일같이 공방전을 벌였던 경찰이, 아예 컨테이너 박스를 20개나 동원해 용접은 물론, 그리스 칠까지 해놓아 든든한 방어벽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산성'은 산에 있어야 하지만, '명박산성'은 대로변에 위치해 도로를 빈틈없이 막았다는 점에 있어 세계건축사에도 특기할 만한 구조물이다. 물론, 경찰은 청와대 방어를 '명박산성'에만 맡기지 않았다. 청와대로 갈 수 있는 길목마다 전경버스와 경찰 병력을 동원해 물샐틈 없는 방어선을 구축한 뒤에, 전경버스에도 마찬가지로 그리스 칠을 해놓은 것이다.

 

 

그동안, 시위대가 전경버스에 올라가거나, 흔들기 및 끌어내기를 시도했던 것에 단단히 상처를 받은 것임이 분명하다. 시위대가 전경버스를 3대나 끌어낸 적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최대 규모 인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형의 요체를 이용한 구조물 쌓기, 기름붓기, 병력의 복병 배치 등, 우리 역사 속 성 방어전의 핵심을 그대로 따와 활용하면서 그 뒤에는 '반격'을 대비한 대규모 병력과 정보과 형사들이 배치됐다는 점을 돌아보라.

 

세계 전쟁 역사상 돌멩이 하나 들지 않은 적을 대비해 이렇듯 삼엄한 방비를 구축했다는 전례는 없었다. 그뿐일까? 그 이전에 이미 '갑호' 비상 경계령까지 내리면서, 서울 시내 지하철은 '무정차 통과'까지 결정했다. 그야말로 물샐틈 없는 완벽한 방어선 구축이었다.

 

'명박산성'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

 

전경버스를 향해 기막힌 센스가 담긴 낙서와 메모 등을 남겼던 시위 참가자들이, '명박산성'이라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구조물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미 시위가 시작도 되기 전에 '명박산성' 구축이 알려지면서, "정말 이명박다운 방법"이라거나 "권력을 얼마나 유지하려고 저러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오갔다는 사실을 돌아봐야 한다. 하물며, 눈으로 직접 봤으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시민들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겨놓았다.

 

 

 

 

인근 골목을 막은 전경버스에도 이런 낙서가 써 있었다. '명박산성'은 알고 봤더니 '초소'까지 겸비된 것이었다. 역시나 역사에 남을 만한 가장 든든한 성벽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에는 이런 패러디까지 떠돌고 있다.

 

"명박산성(明博山城)

 

광종(狂宗) (연호:조지) 부시 8년(戊子年)에 조선국 서공(鼠公) 이명박이 쌓은 성으로 한양성의 내성(內城)이다.

 

성(城)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당시 육조거리에 막아놓은 기대마벽(機隊馬壁)이 백성들에 의해 치워지매, 그에 대신하여 더 견고한 철궤로 쌓아올린 책(柵)에 불과하다.

 

이는 당시 서공(鼠公)의 사대주의 정책과 삼사(三司: 조선, 중앙, 동아) 언관들의 부패를 책하는 촛불 민심이 서공의 궁(宮)으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 만든 것이다.

 

무자년(戊子年) 유월(六月) 패주(敗主) 두환을 몰아낸 일을 기념하여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한성부 포도대장 어(魚) 아무개의 지시로, 하루 밤낮만에 쌓아올려져서 길 가던 도성의 백성들이 실로 괴이하게 여겼다.

 

한편으로는 그 풍경을 관람코저 모여든 백성이 그 머릿수를 헤아리매 팔만(포도청 추산)이 넘어, 도성 내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고도 전한다. [출처:불명]"

 

명박산성, 일부 시민의 '호승심' 자극

 

만화 <창천항로>에서는, 조조는 만리장성에 올라 "이 어리석은 장성은 오히려 적으로 하여금 넘어와 보라고 도발하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명박산성'을 보면서 떠올란 만화 속 대사다. 그런데 그런 감상을 나만 느낀 것은 아닌 것 같다.

 

인근 광화문역 공사장을 향해 넘어가려는 시민들이 있어 이를 말리는 시민들과 언쟁이 붙은 적도 있고, 깊은 새벽이 돼서는 스티로폼 박스들을 대거 동원해 쌓아놓고 '명박산성' 정상 등반을 시도하려던 일부 시위 참가자들이 있어 마찬가지로 큰 언쟁이 붙은 것이다.

 

 

결론은 "'깃발'을 든 사람만 정상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각 대학이나 노조에 소속돼 깃발을 들고 온 시위 참가자들이 '명박산성' 맨 위에 올라가 열심히 깃발을 흔들었고, 가운데에는 태극기를 든 시위 참가자가 위치해 태극기를 흔들었다.

 

성 안에는 청와대 방비에 나선 경찰 병력이 대규모로 배치돼 있어 성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정상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었다는 점, 그리고 깃발 흔들기를 끝낸 이후에는 스티로폼 박스를 동원해 태극기를 꽂아뒀다는 점에서 "경찰이 진압을 시작하기 전 '명박산성'은 대한민국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이다.

 

 

 

'명박산성' 해체 작업에도 물 샐 틈 없는 방비

 

아침에 이르러, 노동자들이 동원돼 '명박산성' 해체 작업이 시작됐다. 재미있는 것은 그와 더불어 경찰 병력이 시위진압을 위해 성 밖으로 출격을 했다는 점이다. 심각한 문제 하나는, '시위진압'까지는 좋은데 '도로교통'을 위해 시위진압을 하겠다는 경찰이 인도에서 진압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예비군'이 맨 앞에 서서 그들과 대치에 나섰으며 곳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마스크를 착용한 사복경찰들이 '채증'에 나서고 시위참가자들이 '역채증'에 나섦에 따라 '채증전쟁'도 벌어졌다.

 

하지만, 경찰의 아침 목표는 오로지 '명박산성'이었나 보다. '명박산성' 해체작업 도중 4개의 컨테이너가 치워져 세종로 사거리 일대의 길이 일부분 뚫리자 경찰 병력이 뒤로 후퇴하면서 시위대도 한걸음 물러섰다. 아침 6시가 되면 어김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방패를 들고 강제진압을 시도하는 경찰이었지만, 11일 아침은 '명박산성' 해체 작업을 뒤로 한 채, 대치만 벌인다.

 

'명박산성'이 모두 해체된 11일 아침 9시 경에는 300여 명 가량의 시위대가 남아 경찰 병력과 대치하고 있다. 성이 해체됐으니, 이제는 공성전과 성 방어전이 아니라 평지에서 이루어지는 '회전'이 남은 것 같다.

 

'명박산성'에 놓였던 '조화' 한 다발

 

 

'명박산성'을 지켜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한 다발의 조화 한 다발이었다. 무엇을 의미하는 조화였을까? '국민과의 소통'에 나서겠다면서 거대한 소통의 장벽을 쌓은 대통령을 향한 조화였을까? 아니면 민주주의를 애도하는 조화였을까? 아니면 "'명박산성'을 보고 당신은 더이상 우리의 대통령이 아님을 알았다"라는 경고의 메시지였을까?

 

'명박산성'을 '국민과의 대화'를 무기한 연기한 이명박 대통령측의 대처와 연계해 생각해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과의 소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나마도 각계 원로들을 불러모은 대담 자리에서도 "자기 이야기하기에 바빴다"라는 혹평을 듣지 않았나?

 

한가지 더 역설적인 것은, 시위 가자를 자극하는 존재는 오히려 이명박 대통령 측과 경찰이라는 것이다.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10일 저녁에 뜬금없이 나타나 자유발언을 신청했다가 쫓겨난 사례, 그리고 끊임없는 '염장'으로 일관하는 이명박 대통령 , 돌 하나 들지 않은 시민들을 과격하게 진압해놓고도 '폭력시위'나 '배후'를 논하는 경찰조직의 수장 등, 시위참가자들을 자극하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 측과 경찰이다.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침해가 떴으니 잠자코 둔다면 태반이 '피로' 때문에라도 돌아갈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경찰의 경고방송이 일례행사처럼 벌어지면서 그에 자극을 받은 시위 참가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현장에 다시 주저앉은 경우도 많다. 11일 오전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시위 참가자들이나 이명박 대통령이나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래서 시위 참가자들도 이명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여론에 대처하는지도 궁금하다.

 

'명박산성', 국사 교과서 등재감

 

주변 시위 참가자들에게 '명박산성'에 대해 물어보니 일부 참가자들은 "미래의 국사교과서에 나올 만하다"라고 말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뉴라이트 대안 국사교과서에 어떻게 기록될지 궁금하다"라며 반응하기도 했다.

 

확실히 역사상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일까? '명박산성'을 지켜본 시위 참가자들의 반응은 그렇듯 하나같이 씁쓸해했다.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을 비롯한 이명박 정권의 정책, 그리고 경찰의 과잉폭력진압에 이어 또다른 소재가 등장하니 이젠 '씁쓸함'까지 느낀 것 같았다.

 

이명박 대통령, 2008년 6월 10일과 11일로써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된 것 같다. '명박산성',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촛불문화제, #명박산성,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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