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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지? 조금 쉬어도 돼친구야!!" 지금 힘든 아이들에게는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요?
▲ 순천청소년축제 "힘들지? 조금 쉬어도 돼친구야!!" 지금 힘든 아이들에게는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요?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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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등 뒤가 소란해서  돌아보니 한 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아이는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풋사과가 언제 나오는지 아세요?"
"지금 풋사과라고 했니?"
"예. 갑자기 풋사과가 먹고 싶어서 그래요."
"뭐? 너 퍽 문학적인 데가 있구나."
"뭐가 문학적인 건데요?"
"문학하는 사람은 가끔 엉뚱한 말을 하고 그러거든."

누군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지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시 아이와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선생님, 오늘 청축에 오세요?"
"그럼, 청축에 가고말고. 너도 가니?"
"그럼요. 우리 반은 전체가 다 가요.”
"그럼 이따 청축에서 만나자."

'청축'이란 청소년축제의 줄임말입니다. 이곳 순천에서는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하는 순천청소년축제를 줄여서 '청축'이라고 부릅니다. 청소년이란 말에서는 싱그러운 풋사과 냄새가 나지요. 하필이면 순천청소년축제가 열리는 날 갑자기 풋사과가 먹고 싶다고 교무실까지 찾아와 요란을 떤 것이 어쩐지 우연 같지만은 않았습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운동화 끈을 조여 맨 것은 오후 3시 20분경이었습니다. 행사장까지는 걸어서 약 40분 정도 걸립니다. 개막식이 오후 4시에 있으니 그쯤해서 집을 나선 것이지요.

차가 없는 거리에서 길거리 농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
▲ 순천청소년축제 차가 없는 거리에서 길거리 농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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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에 도착하자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길거리 농구단 아이들이었습니다. 공격과 수비를 교대로 반복하면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젊고 씩씩한 청소년들에게서 풋사과 냄새가 확 풍긴 것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현상이었을 테지요. 어쨌거나 저도 그 아이처럼 갑자기 풋사과가 먹고 싶어졌습니다. 헌데 풋사과가 언제 나오지?     

멀리 보이는 무대를 향해 걸어가다가 만화책에나 나올 법한 요란한 복장을 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만화 동아리반 아이들이었습니다. 부스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늦게 신청하여 부스를 배정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집 없는 달팽이 신세가 된 것이지요. 그래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하긴 정해진 집이 따로 없으니 더 넓은 공간을 쓸 수 있게 된 셈이지요. 집이 없어서 더 넉넉해 보이는 그 아이들에게서도 신선한 풋사과 냄새가 났습니다. 
      
집이 없어 더 넓은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만화동아리반 청소년들.
▲ 순천청소년축제 집이 없어 더 넓은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만화동아리반 청소년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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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개막식이 끝나고 본행사인 '동천 함께 걷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행렬 맨 앞에 '친구야!! 느리게, 그리고 더불어 다 함께!!'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글귀를 보자 요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임 100일이 채 못 되어 이른바 ‘촛불정국’의 위기에 직면한 현 정부의 실정(失政)이 결국은 ‘느리게 그리고 더불어 다 함께’란 구호에 깃들어 있는 대동정신을 저버리고  잘 나가는 상위 1%만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인류의 안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지구의 온난화 현상도 따지고 보면 '느리게 그리고 더불어 다함께'라는 철학이 부재한 결과입니다. 자연이나 환경은 후손들로부터 빌려다 쓰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만하고 무지한 인간중심의, 그것도 상위 1%에 해당하는 일등국가, 일등국민이 되기 위한 지나친 욕심으로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심각하게 훼손하고 만 것이지요. 그런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한반도 대운하라니요?
싱싱한 풋사과 냄새가 나는 아이들이 동천을 함께 걷고 있다.
▲ 순천청소년축제 싱싱한 풋사과 냄새가 나는 아이들이 동천을 함께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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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제자에게 물을 먹여주고 있는 순천 금당고 강경순 선생님!
▲ 순천청소년축제 목마른 제자에게 물을 먹여주고 있는 순천 금당고 강경순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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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한 풋사과 같은 아이들을 답답한 학교 교실이 아닌 확 트인 자연이나 광장에서 만나는 것은 참 유쾌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한참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시험이 끝나고 나면 쓸모가 없어지는 죽은 지식이나 가르치는 저를 포함한 조무래기 선생보다는 생각의 품을 넓혀줄 큰 스승으로서의 자연이 더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이름만 그럴듯한 '4.15 학교 자율화조치'를 발표하여 망국의 입시교육체제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잠시 후, 행렬을 따라 시내 중심지를 빠져나오다가 이태 전에 학교를 졸업한 제자 아이를 만났습니다. 상가 옷가게에서 일하다가 저를 보고 뛰어나온 모양입니다. 어찌나 반가운지 눈물이 찔끔 날 뻔했습니다. 가만 보니 제자 아이의 눈도 젖어 있는 듯했습니다. 사춘기를 겪느라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그 시절이 갑자기 떠올랐을까요?
동천 징검다리를 건너는 아이들
▲ 순천청소년축제 동천 징검다리를 건너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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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학생들이 한데 어울려 함께 걷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 순천청소년축제 교사와 학생들이 한데 어울려 함께 걷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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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울이 붉어진 제자 아이의 모습을 보자 저렇듯 졸업하고 나면 금방 철이 들 아이들을 너무 성급하게 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이 들기도 하면서 다시금 마음속에 ‘느리게, 그리고 더불어 다함께’란 구호를 새겨보았습니다.   

동천 함께 걷기 대회는 약 1시간 만에 끝이 났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다시 무대로 돌아와   사회 봉사단체에서 준비한 주먹밥과 떡으로 배를 채우고 차도 한 잔 마시며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오전에 교무실을 찾아왔던 아이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동천을 걸으면서도 두 어 번 눈을 마주친 뒤였습니다. 

"선생님 여기 계셨네요?"
"그래. 재미있었어?"
"예. 기분이 아주 좋아요."
"무대공연 구경하고 갈 거지?"
"예. 선생님은요?"
"난 촛불집회 가봐야 해. 오늘 시낭송을 하기도 했거든."
"멋지다. 그럼 시낭송 잘하세요."
"그래, 너도 잘 놀고."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순천효산고 관광경영과 2학년 1반 아이들과 이석호 담임 선생님
▲ 순천청소년축제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순천효산고 관광경영과 2학년 1반 아이들과 이석호 담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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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청소년축제가 열린 구도심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신도심까지는 걸어서 약 1시간 남짓한 거리입니다. 행사장에 도착해보니 그곳에도 풋사과 냄새가 아는 어린 청소년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들을 이곳 촛불집회까지 오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누구 말대로 촛불의 배후가 있는 것일까요? 그날 촛불문화제에서 낭송한 시입니다.

촛불의 배후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것들이  
스스로 촛불을 밝힐 리 없다고 
공부밖에 모르는 순진무구한 것들이
미친 소, 미친 교육 외쳐댈 리 없다고 
촛불의 배후를 밝혀내라 했다지요.    
그랬더니 내가 바로 촛불의 배후라고
내가 알아서 한 거라고
그러니 나를 오랏줄로 묶어 잡아가라고
다들 순순히 자수하는 바람에 
한때 경찰청 홈페이지가 다운되었다지요.  

촛불의 배후는 국정교과서입니다. 
국정교과서에 실린 대한민국 헌법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엄청난 진실을 가르친
대한민국의 모든 선생님들입니다. 
공부밖에 모르니 열심히 외웠겠지요.
순진무구하니 그것이 진실인줄 알겠지요.  

촛불의 배후는 어린왕자입니다.
하루는 어린왕자가 상인을 만났습니다. 
상인은 일주일에 한 알씩만 먹으면
목이 마르지 않는 약을 팔고 있었지요.  
"왜 이런 것을 팔죠?" 어린 왕자가 물었습니다.
"이 약은 시간을 많이 절약하게 해주거든
일주일에 53분씩이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단다."
그 말을 듣고 어린 왕자는 이렇게 생각했지요.  
'만약 나에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53분이 있다면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 텐데…'라고.

닭의 자연수명은 십 년이 훨씬 넘는다지요.
하지만 닭장 속의 닭들은 두 달이면 생을 마감한다지요.  
첫 2주 동안은 24시간 내내 인공조명으로 밝은 빛을 쬐어준다지요.
그런 다음 2시간마다 조명을 껐다 켰다를 반복한다지요.
그렇게 6주쯤 지나면 닭들은 거의 미쳐버린다지요.
그러다가 서로를 쪼아대며 고통스럽게 죽어간다지요.
닭도 살아 있는 생명인데 자연의 햇볕도 쪼이고 싶고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싶었을 텐데요.

어린왕자는 슬픈 닭과는 달랐지요. 
그 성적에 지금 잠이 오냐?
뭘 봐! 책 봐!
지금 성적은 미래의 월급.
30분 더 공부하면 내 남편의 직업이 바뀐다.
엄마가 보고 있다!
지금도 교실에 버젓이 걸려 있는    
엽기적인 급훈들 앞에서도
닭장 속의 닭이 아닌
헌법에도 보장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인간으로서 살고 싶다고
순진무구한 생각을 굽히지 않았지요.  

그러니 촛불의 배후는   
당신들도 수호하는 대한민국 헌법이요 
상인의 술수에 놀아나지 않은
장하고 아름다운 어린왕자들이지   
못난 선생인 내가 아니지요.  
난 아직 촛불의 배후가 못된답니다.    
그것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이제라도 촛불의 배후가 되려고요.
아니, 아이들이 배후가 되어준  
한 송이 촛불로 활활 타오르려고요.   


태그:#순천청소년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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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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