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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
- 이야기 나눈 이 : 이응노, 박인경, 도미야마 다에코
- 엮은이 : 도미야마 다에코
- 옮긴이 : 이원혜
- 펴낸곳 : 삼성미술문화재단(1994.4.30.)

 (1) 사라진 책 만나기란

이응노 님 그림전시회를 하면서 만든 책자입니다. 이러한 책자가 전시회에서만 잠깐 선보이는 일로 그치지 않고, 두루두루 읽히도록 더 널리 소개되고 알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이 책은, 이응노 님이 세상을 떠난 뒤에 나왔기 때문에, 정작 이응노 님 당신은 이 책을 보지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 겉그림 이응노 님 그림전시회를 하면서 만든 책자입니다. 이러한 책자가 전시회에서만 잠깐 선보이는 일로 그치지 않고, 두루두루 읽히도록 더 널리 소개되고 알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이 책은, 이응노 님이 세상을 떠난 뒤에 나왔기 때문에, 정작 이응노 님 당신은 이 책을 보지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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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이 끊어진 책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는지 생각해 봅니다. 헌책방에서? 헌책방에 간다고 해도, 판이 끊어진 책이 '팔렸던 부수' 만큼만 있을 테고, 또 '그 책을 사 갔던 사람이 집에 모셔 놓지 않고 내놓아 주어야' 만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서 바라던 책 하나가 헌책방에 들어왔다손 치더라도, 그 책이 들어온 그날 내가 그 헌책방에 찾아가서 만나지 않는다면 헛일입니다. 다른 책손이 먼저 알아보고 가져가면 물거품입니다.

이응노(1904∼1989), 박인경(1926∼ ), 도미야마(1921∼ ), 이렇게 세 사람이 프랑스에서 두 달에 걸쳐서 만나서 나눈 이야기, 그러니까 당신들 살아온 이야기와 그림 이야기를 풀어낸 책 <이응노―서울·파리·도쿄>를 헌책방에서 뜻하지 않게 만났습니다.

천천히, 아주 더디게 곱새기면서 읽습니다. 보기 드문 책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으로, 그러나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책이구나 싶은 아쉬운 마음으로.

반 해에 걸쳐서 야금야금 읽어냅니다. 책을 다 읽은 뒤, '이 책을 다시 만날 수 있나, 아니, 도서관에는 이 책을 갖추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전국 도서관 찾아보기'를 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딱 한 권 뜹니다. 이곳에 가면 이 책을 빌려서 읽을 수 있군요. 아예 없지는 않네요. 그러면, 대전에 있는 이응노미술관에 가면 구경해 볼 수 있을까요? 아니, 구경을 넘어서 두고두고 읽을 수 있도록 한 권 살 수 있을까요?

새책방에서 만날 수 있는 이응노 선생 책은 몇 가지 없습니다. 목록에는 여러 권 나오지만, 품절과 절판이라는 딱지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어린이책 한 가지만 있는 셈입니다. 그나마 어린이책으로 한 권이라도 있으니, 아이들이 '이응노라고 하는 그림쟁이 삶'을 살짝이나마 맛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권으로 이응노 님 삶을, 그림세계를, 발자취를 찬찬히 헤아리거나 돌아볼 수 있을는지요.

작은 발자국을 남겼든 굵직한 발자국을 남겼든, 가까이하기에는 그지없이 어렵겠구나 싶은 한편으로, 그림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은 이응노라고 하는 그림쟁이 발자취를 어떻게 짚어 나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대학생들이 논문을 쓴다고 할 때에는 얼마나 많은 자료를 갈무리해서 쓸 수 있을는지요. 그나마 그림은 제대로 살펴보고 쓸 수 있을는지요.

 (2) 우리 곁에 있는 그림이란, 또 그림책이란

'이응노' 이름을 내건 미술관에서 내부직원이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는 '이응노 선생 그림 도둑질'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홀어미 박인경 님은 지아비 이응노 님 그림 삼백 점을 믿고 맡기려고 하다가 주춤했다는 소식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응노 님 그림세계를 좀 더 두루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맛보기는 한결 어려워지기만 하는 셈인지.

이렇든 저렇든, 이응노 님 당신을 기리는 미술관이 만들어졌습니다. 복받은 몸입니다. 이 나라에는 제대로 기림을 못 받은 채 숨죽이는 그림쟁이가 많잖아요. 기림을 받더라도, 여느 사람들이 넉넉히 당신들 그림세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즐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어 있지 않잖아요.

서울 아닌 곳에서 느긋하게 그림을 즐길 만한 곳은 어디에 얼마쯤 있을까요. 도시에서는 중심지 말고 변두리에서도 그림을 즐길 수 있을까요. 시골마을에서는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살풋이 그림을 맛볼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그러니까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얼마나 그림을 자기 삶 가까이에 놓고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학교마다 '미술 수업'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 미술 수업 때에는 어떤 그림을 살펴보면서 배우고 자기 스스로 그림그리기를 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는가요.

오늘날 우리 세상은 엄청나게 많은 사진과 그림에 들러싸여 있습니다. 글만 담는 책은 아주 드뭅니다. 사진이 없으면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아이들 이야기책에도 그림을 잔뜩 곁들이지 않으면 팔기 어렵습니다.

어린이 그림책은 수도 없이 쏟아집니다. 어린이 그림책에 그림을 담는 새로운 그림쟁이는 날마다 태어납니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가 있고, 셈틀 화면을 보며 그리는 이가 있습니다.

그림쟁이를 이야기하는 책도 무척 많습니다. 비록, 거의 모든 '그림을 이야기하는 책'은 서양 그림쟁이 몇몇 사람을 다루는 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한국 그림을 이야기하는 책'조차 역사책에 오르내리는 몇몇 사람을 다루는 쪽으로 몰려 있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진과 그림에 둘러싸인 우리들은, 또 온갖 이야기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우리들은, 사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림을 어떻게 헤아리고 있습니까. 자기 마음에 와닿는 사진이란 무엇이며, 자기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이란 무엇이라고 받아들입니까.

넘치는 사진과 그림이지만, 가슴을 울리는 사진과 그림은 안 넘치다 못해 모자라지는 않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자기 스스로 가슴을 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유행에 따라서 몸이 굳어지거나 흔들린 탓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삶을 담는 예술에서 멀어지고, 예술에 담는 삶이 사라지는 오늘날, 우리가 마음 느긋하게 즐기는 그림이나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고 자꾸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거나 우리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그림쟁이는 누구이고, 이분들 그림을 얼마나 손쉽게 마주할 수 있을까, 하고 거듭거듭 생각하게 됩니다.

 (3) '이응노를 알 수 없게 하는' 한국땅에 남아 있는 말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를 읽는 동안 제 가슴에 와닿았던 대목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이 가운데 몇 대목을 옮겨 봅니다. 생각있는 어느 분이 있다면 앞으로 언제가 되더라도 이 책을 되살려 주시겠지, 하고 믿으면서. 이 책 하나 헌책방에서 캐내는 분은 캐내는 분대로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고, 끝내 못 찾아내는 분은 못 찾아내는 아쉬움을 씁쓸히 곱씹더라도 이 몇 마디 말이라도 만나보시길 바라면서.

[도미야마] 정말 놀라셨겠군요. 감쪽같이 속인 납치극이에요.
[이응노] 내 나라니까 철석같이 믿은 거지요. 난 뭣 땜에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조사하던 사람 중 하나가, "들어야 할 얘기가 있으니까 여기 오게 한 거다. 그러니 솔직히 다 털어놓으라."고 하더군요. "도대체 뭘 듣고 싶은 겁니까?" 그랬더니 커다란 나무몽둥이를 보여주었는데, 고문할 때 쓰는 거였지요. "이것 봐요, 이 몽둥이로 한 번 맞았다가는 목숨 건지기도 힘들어요. 여긴 프랑스가 아닙니다. 노인네라고 봐주는 줄 알아요?"라고 소리치며 겁을 주더군요. 하지만 나는 정말 뭣 땜에 그러는지 몰랐었지요. 그러자 KCIA가 "당신, 평양 갔었지?" 그러는 겁니다. "간 적 없다"고 하자, "안 되겠군. 맞아야 털어놓을 거요?"라며 협박을 하더군요. 가지도 않았는데 뭘 털어놓느냐, 그렇다면 증인을 불러내라고 하니까, 동베를린엔 왜 갔느냐, 정치자금은 얼마나 받았느냐, 무엇에다 썼느냐, 누구누구에게 얼마나 건네줬느냐, 5만 달러냐, 10만 달러냐 등등, 이런 식의 취조가 저녁 7시부터 한 새벽 2시쯤까지 계속되었어요 ..  (19∼20쪽)

[이응노] 옥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림쟁이인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간장을 잉크 대신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하기 시작했지요. 또 밥알을 매일 조금씩 아꼈다가 헌 신문지에 개어서 조각품도 만들기 시작했어요 ..  (22쪽)

[도미야마] 선생님의 인생에서 옥중 생활은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요?
[이응노] 나는 형무소에 수감될 때까지는 정치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었어요. 일제 때는 한국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생각도 했지만, 해방 후엔 오로지 그림만이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형무소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비리를 저지르고 들어오는 부자의 수감 생활이란, 그야말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외떨어진 독방에서 마치 호텔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매일같이 불고기가 나오고 외제 고급 위스키를 마시고, 간수들도 그 덕을 보니까 그들은 간수들을 마치 종 다루듯 했지요 ..  (25쪽)

[이응노] 형무소야말로 사회를 배우게 해 준 학교였답니다. 한국사회는 사람들을 나쁜 길로 가게끔 만들어요. 아니, 한국이라기보다는 미국을 등에 진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금권정치의 부패겠지요. 일본인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일본엔 민주주의가 있잖습니까? ..  (28쪽)

[도미야마] 근대로 향한 첫걸음은 그런 가부장적인 가정과의 대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일본은 그런 면에서는 훨씬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이응노] 유교적인 가족제도는 아직도 남아 있지요.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결혼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었고, 그보다 내 자신의 인생에 관한 것을 차츰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일본말을 하고 서양식 양복도 입고 있어서 내가 보기에 시대를 앞서가는 신사처럼 보였어요. 그런 모습이 부러워서가 아니라, 나는 이대로 있어도 좋은 것인가라는 자문을 수없이 하게 되었지요 ..  (55쪽)

[이응노] 그때서야 내가 왜 그동안 낙선만 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 작품이 입선을 하기는 했지만, 그 7년 동안 내 그림은 완전히 죽어 있었던 겁니다. 나는 선생님의 그림을 모방만 하고 있었던 거지요. 대나무 가지 치는 것도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애쓰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좋아, 입선감이다." 하셨더라도 심사위원은 여러 사람이었으니까요 ..  (69쪽)

[도미야마] 저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결국 그림을 택했기에 자식 둘과 함께 전쟁 뒤의 참담하고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자로서도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는 길은 있어서, 그럭저럭 살아오게 된 것이지요.
[박인경] 나는 지금 여류작가 박경리 씨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고 있습니다. 김지하 씨의 장모 되는 사람의 글인데, 정말 훌륭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서 우리 나라 여류화가들은, 나를 포함해서입니다만, 사상성이나 문제의식이 없는 것 같아요. 애를 쓰지 않아요 …… 동양화 수업이란 것이 그야말로 전통적인 모방기술에 불과했으니까요. 예술이란, 진정한 전통이란 이런 것이 아닌데, 감동도 창작도 타오르는 열정도 없는, 마치 타고 남은 재 같은 분위기였답니다 ..  (94쪽)

[도미야마] 저도 그렇답니다. 그 시대에 저는 아직 병아리 화가였고 미술학도였으니까 전쟁화를 그리지 않아도 되었지요. 그러나 만약 생활고에 시달리는 화가였다면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자문자답을 해 보게 됩니다. 부양가족을 둔 가난한 화가는 소년잡지에 〈황취(荒鷲) 전투도〉 같은 것을 마지못해 그리곤 했지요. 반면에 부유한 화가는 값비싼 프랑스제 물감을 쌓아 놓고 아틀리에에서 우아하게 정물화 같은 것을 그리고 있었어요. 전쟁화를 그렸느냐의 여부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서 그 후의 출발점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쟁을 고무시키는 것에 협력한 화가들이 스스로 그것을 감추고 오히려 화폭에 민족적인 소재를 담는 것으로 대가의 자리에 앉아 있거든요 ..  (102쪽)

[이응노] 국전이란 대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을 위한 전람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 나는, 혼자 버티면서 국전을 비판했지요. 정치 세계든 미술 세계든 간에 모두 사기꾼 같은 자들이 멋대로 설치고 있었어요.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  (120∼121쪽)

[이응노] 1955년에 그린 〈취야〉는 자화상 같은 그림이었지요. 그 무렵 자포자기한 생활을 하는 동안 보았던 밤시장의 풍경과 생존경쟁을 해야만 하는 서민 생활의 체취가 정말로 따뜻하게 느껴졌답니다. 1954년에 그린 〈영차, 영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내는 소리가 있는데, 서까래 하나를 4명이서 들처메고 ‘영차, 영차’ 입을 맞추면서 옮겨가고 있었지요. 역시 나는 권력자보다는 약한 사람들,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쪽에 관심이 갔고, 그들 속에 나도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  (144쪽)

[이응노] 옛날 사람의 문자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따라서 흉내내기만 한다면 그건 단지 모방에 지나지 않아요. 만약 혁명가라면 새로운 해석을 통해 창조적인 자기 것을 만들어 표현하겠지요 …… 그렇지요, 고전의 기술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전으로부터 무엇을 끌어낼 것인가 하는 정신과 사상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동양화는 아직도 옛날사람들이 했던 것 그대로 틀만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  (145, 146쪽)

[이응노] 그림이란, 벽에 거는 장식품으로만 그쳐서는 안 돼요. 사회의 모습, 순수한 인간에 대한 애정……, 이런 피끓는 발언이 없어서는 안 되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에 생명이 깃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167쪽)

[이응노] 그게 바로 파리의 한국인과 베를린의 한국인의 차이점이지요. 파리에도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와 있지만, 그들은 모두 돈 많은 집 자식들이고, 또 귀국 후의 일을 생각해서인지 민주화운동 같은 것에는 일절 관여하지를 않아요 ..  (170쪽)

[이응노] 내 인생은 36년 간을 일제 지배하에서 보냈고,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분단국가와 독재정권 속에서 내 나라에도 돌아갈 수 없는 상태로 30년을 지내 왔어요. 우리들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 발표하면 박해를 받게 되니, 표현의 자유도 없는 겁니다 ..  (175쪽)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태그:#절판, #이응노, #사라진책, #헌책방,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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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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