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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령선인 십수 명으로 구성된 신규식 일행이 10월 11일 광동 도착’
‘중국 외교차장 등이 마중 영접’
‘한국당의 영수 신규식이 법무, 국무총리의 자격으로 신정부 당국과 접견’

일본과 중국 북경 정권의 일간 신문이 보도한 내용이었다.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사 신규식은 부사 박찬익과 수행 비서관 민필호, 백주원을 대동하고 다른 수행원 10여 명과 함께 중국 호법광동정부 총통 손중산과의 회담 여정에 올랐다. 그들은 상해 애산(涯山) 부두에서 1만 톤급 프랑스 우편선에 올랐다. 바람이 차가웠지만 아무도 선실에 들어가지 않은 채 하염없이 바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 동쪽 너머의 땅에는 그들의 유년 시절이 있었다. 부모와 처자가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처럼 떳떳하게 고국 쪽을 보고 있었다.

동중국해의 바다는 넘실대고 있었다. 늦가을 햇빛은 셀로판지처럼 투명하고 얇았다. 강물은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마당 쓰는 싸리비처럼 옮겨 다니고 있었다. 신규식은 선글라스에 검은색 명아주 단장을 들고 있었다. 베이지색 투피스 정장의 백주원이 그를 밀착 수행하고 있었다. 모두들 바다를 보고 있었지만 민필호만 서류 같은 것을 읽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가장 나이 어린 그였지만 프랑스 선원들이 보기에 그는 일행에서 중간 나이 정도는 족히 되어 보였다.

박찬익이 손가락으로 조국의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그는 신규식에게 아주 짤막한 단어 하나를 말했다.

"형님!"

신규식은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박찬익의 젖은 눈을 이윽히 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었다.

백주원은 갈매기를 따라 눈길을 옮겼다. 그녀는 조금 수척해 보였다. 김태수가 떠난 날 밤부터 그녀는 회한과 수치감에 잠을 못 이루었다. 왜 처음부터 자신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생각하면 회한의 정이 일었고, 왜 자신은 그 앞에서 정직하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면 수치심으로 몸을 뒤척였다. 그녀는 김태수가 떠난 즉시 깨달았다. 자기는 누구보다도 김태수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았던 것이었다.

그리움이 그렇게도 무서운 것인지를 그녀는 새로 알게 되었다. 그가 간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그를 가게 만든 것이었다. 벌써 두 달이 지나고 있었다. 김태수는 100일 안에 돌아올 거라고 민필호가 말했지만 왠지 그녀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혹시 그를 다시 못 보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그 이후의 일을 도저히 가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를 다시 못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절망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머플러로 목을 감싸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그녀의 검은 머릿결을 건드리며 지나갔다. 그녀는 날카로운 기합을 넣으며 황강을 때려 보내던 김태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호텔 커피숍에서 단정히 목례하던 그의 모습을 생각했다. 조랑말을 타고 자신을 바라보던 김태수의 슬픈 눈빛이 허공에 있었다. 그녀는 그 눈빛과 마주쳐 보려고 했다. 좀처럼 그 눈빛은 그녀의 눈길과 마주보지 않았다. 김태수의 슬픈 눈은 나타났다 없어지고 사라졌다 다시 생겨났다. 그러고는 아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얇은 구름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있었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돌아와 주십시오."

김태수는 얼어붙은 앙가라 강에서 낚시에 여념이 없었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아직 서쪽 하늘에는 황혼이 붉지 않았다. 백야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옆에 놓인 수통을 집어 통째로 마셨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원액으로 마시는 보드카가 생각보다 독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옆에 쌓여 있는 눈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는 그것을 안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늘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쪽 하늘은 차츰 석양으로 붉어지고 있는데, 반대 편 하늘에서는 먹구름이 자리를 넓히고 있었다. 먹구름이 그렇게 얇을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석면을 찢어 발겨 놓은 것 같은 듬성듬성한 구름이 반대 편 하늘의 엷은 황혼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황강을 타고 팔당에 가서 낚시하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매운탕이 지금 있다면 보드카 두 병쯤은 너끈히 해치울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가 4,000킬로의 시베리아 철도 여행 끝에 기차에서 내린 곳은 이르쿠츠크였다. 그는 거의 한 달째 이르쿠츠크의 호텔에서 유숙하고 있었다. 상해를 떠나온 지 40일쯤 되었는가 보았다. 그는 강변을 산책하기도 하고 지금처럼 낚시도 하면서 하는 일 없이 북극의 도시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이따금씩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 부대가 도시 교외에서 출몰한다는 얘기 말고는 한가하고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였다.

그는 아름답고 전원적인 도시 이르쿠츠크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았다. 작은 도시에서 한 달의 기간은 도시를 보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인 마을도 있었다. 그들은 교외의 마을에서 가난하지만 정겹게 모여 살고 있었다. 그는 박물관도 구경했고 미술관에는 세 번씩이나 가 보았다. 밤이면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도 있었다. 그러나 백주원의 얼굴만 머리에서 맴돌 뿐 그는 이국 풍물에 신명이 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도시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에 있는 바이칼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그를 감동시킨 것이 하나 있었다. 즈나멘스카야라는 이름의 사원이었다. 그곳에는 묘지가 있었다. 묘지에는 러시아 여인들이 묻혀 있었다. 유형지였던 이곳을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만든 것은 그들이라고 했다. 프·러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러시아의 엘리트 청년 장교들은 러시아 황실의 부패에 절망한 나머지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했다. 그들이 거사한 것은 12월이었다. 12월을 러시아 말로 데가브리스트라고 하는가 보았다. 그래서 그들을 데가브리스트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황실은 100명의 데가브리스트 가운데 5명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청년 장교들의 부인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젊고 교양 있고 아름다웠다. 황실의 높은 관리들은 그녀들을 차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엉큼한 꾀를 냈다. 부인들이 모스크바에 남아 재가하면 귀족의 신분과 특권을 모두 유지시켜 준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모두 시베리아 유형을 선택했다. 그래서 온 곳이 이르쿠츠크였는데 그 당시만 해도 이 도시는 동양계 소수 민족의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먼저 유형 온 남편을 만난 여자도 있었고 그냥 과부로 죽은 여자도 있었으며 마음 착한 동양인과 결혼하여 산 여자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의 예술과 문화 수준이 높아 연극이나 미술, 그리고 오페라와 같은 귀족 문화를 이곳에 꽃피웠다는 것이었다. 사원의 묘지는 지조 있고 교양 있었던 러시아 부인들의 것이었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거칠어졌다. 어느새 하늘은 황혼으로 덮여갔다. 황혼은 먹구름까지 붉은 물을 들여 놓고 있었다. 기온이 갑자기 내려갔지만 김태수는 조금 더 앉아 있기로 했다. 적잖이 들어간 보드카가 그의 몸을 덥히고 있었다. 날이 더 어두워지자 시리도록 푸른 달이 올라왔다. 김태수는 달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술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달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또 한 모금의 보드카를 마셨다.

먼 데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발소리는 김태수가 앉아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김태수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강둑의 지평선 위로 사람인 듯한 검은 물체가 걸어오고 있었다. 달빛과 함께 오고 있는 사람은 여자인 것 같았다. 그녀는 사람이 있는 것을 몰랐는지 흐느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강변에 우두커니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얼굴의 눈물을 닦아냈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러시아 여성이었다. 달빛과 잘 어우러지는 준수한 외모였다.

김태수는 안심해도 된다는 뜻으로 두 손을 펴 보였다.

“제가 말을 걸어도 되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바이칼, #광동정부, #심규식, #민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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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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