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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집' 내부. 이 지역 와인인 '코트 드 프로방스' 와인이 진열되어 있다.
 '와인의 집' 내부. 이 지역 와인인 '코트 드 프로방스' 와인이 진열되어 있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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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부터 파리는 2주에 걸친 부활절 방학에 들어갔다. 방학 때마다 파리를 떠나는 나는 '이번엔 또 어디를 가야 하나' 고심하던 중에 코랑스(Correns)를 떠올렸다.

예전에 유기농 급식에 대한 기사를 준비하던 중에 우연히 알게 된 코랑스는 '프랑스 제1의 유기농 마을'로 소문난 곳이다. 유기농 소비자로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 마을은 마침 지중해와 맞닿은 프로방스 지방의 바(Var)도에 자리잡고 있어 봄철에 가보기에 적절한 곳이기도 했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821㎞나 떨어져 있기에, 아침부터 줄기차게 고속도로를 타고 달린다고 해도 그날 도착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나는 하루 하고도 반 나절에 걸친 여정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코랑스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중앙광장에는 성당과 읍사무소, 관광안내소, 작은 슈퍼마켓, 호텔 하나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작은 슈퍼마켓은 점심시간이라 문을 닫은 상태였다(프랑스에서는 점심시간인 낮 12시 30분에서 오후 3시까지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는다).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읍사무소 뒤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관광안내소에 들어갔다. 관광안내소장이자 읍사무소 부소장인 장-끌로드 사디옹씨로부터 이 마을의 이모저모를 들을 수 있었다.

코랑스 마을 내부 전경.
 코랑스 마을 내부 전경.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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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 코랑스의 승부수, 유기농 와인

인구 820명의 작은 마을 코랑스가 '프랑스 제1의 유기농 마을'로 도약하기 시작한 때는 11년 전인 1997년. 코랑스에서 내세우는 유기농 품목은 와인이다. 전통적으로 포도를 주로 생산해온 지역적 특성을 살린 것. (이 마을의 유효 경작지 400㏊ 중 300㏊ 이상이 포도밭이다).

1990년대 후반 세계 와인시장의 경쟁이 극심해지면서 프랑스산 와인도 어려움을 겪게 됐다. 코랑스에서도 와인조합들이 해마다 문을 닫았고, 겨우 살아남은 조합들도 생존을 위해 다른 마을의 조합들과 통합하는 경우가 늘었다. 이에 마을 읍장 마이클 라츠와 몇몇 와인 생산자들이 유기농 재배에서 돌파구를 찾기로 하고, 코랑스를 '프랑스 제1의 유기농 마을'로 만들기로 한 것. 지금은 프랑스 시장에서 유기농 와인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유기농 와인은 매우 적었다.

때마침 프랑스 정부에서 유기농 장려책의 일환으로,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라츠 읍장은 포도 재배 농민들에게 유기농 전환을 권했고, 이 마을 포도 재배 농민의 95%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본격적인 유기농 마을 만들기가 시작됐다. 유기농 전환을 선택한 농가는 ㏊당 5500프랑(약 136만원)의 국가 보조금을 3년 동안 받을 수 있었다.

'유기농 와인'이란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농약 성분이 축적된 땅에서 그 성분들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3년이라는 계산이었다. 유기농으로 전환한 농민들은 이 시간을 잘 견뎠다.

아울러 유기농으로 전환하지 않은 5%의 농가는 포도밭에 병충해가 대거 창궐할 경우 화학제품을 써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지만, 다행히도 코랑스의 유기농 전환 농민들은 그런 상황을 비껴갈 수 있었다. 또 다른 포도 주산지인 보르도와 달리 코랑스는 그다지 습하지 않은 등 유리한 기후 조건의 혜택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광우병 파동, 코랑스를 돕다

코랑스 유기농 와인을 판매하는 Hotel des Vins('와인의 집') 바깥 풍경. 문 왼쪽에 보이는 녹색의 'AB'는 프랑스에서 유기농 제품을 공식 인정하는 라벨이다.
 코랑스 유기농 와인을 판매하는 Hotel des Vins('와인의 집') 바깥 풍경. 문 왼쪽에 보이는 녹색의 'AB'는 프랑스에서 유기농 제품을 공식 인정하는 라벨이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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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와인 생산에 성공하면서 코랑스 마을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났다. 양보다 질로 승부를 걸기로 하고, 당시 다른 곳에서는 본격적으로 시도하지 않은 일에 도전한 끝에 이룬 성공이었다.

국가 보조금 외에도 1990년대 중반에 광우병이 프랑스를 강타한 것도 유기농 와인이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 사건을 계기로 소비자들이 건강에 좋은 새로운 먹을거리에 시선을 돌리면서 유기농 식품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유기농 식품을 섭취하기 시작한 소비자들은 자연스럽게 유기농 와인으로도 눈을 돌렸다.

그러자 역설적인 일이 발생했다. 양보다 질에 초점을 맞춰 유기농 와인을 생산했는데, 유기농 와인으로 전환한 후 이 마을에서 병 단위로 판매하는 와인 생산량이 오히려 늘어난 것. 유기농 와인으로 전환하기 직전인 1996년에 4만병이던 코랑스의 와인 생산량은 2004년엔 80만병, 2006년엔 90만병으로 늘어났다.

물론 1996년 당시엔 병에 담아 팔던 질좋은 와인 4만병 이외에도 탱크 단위로 저가에 팔던 와인들이 있기 때문에 2000년대 이후 생산량과 단순 비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렇지만 질 좋은 와인의 생산량이 크게 늘고, 그 결과 마을 전체의 소득 수준이 상당히 높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결과 코랑스의 인구가 늘었고(2004년엔 600여명, 2008년 5월 현재는 820명), 비어가던 마을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다. 

코랑스가 속한 바(Var)는 유기농 경작이 발달된 도로 꼽힌다. 2006년도 통계에 의하면 이 지역에서는 유효경작지의 6.7%가 유기농으로 경작되고 있는데(경작자 162명, 면적 5709헥타르), 이는 유럽(4%)이나 프랑스 전체(2%)의 유기농 비중보다 높은 수치다. 참고로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독일에 비해 유기농 발전 면에서 뒤처져 있다(유럽 25개국 중 19위, 2006년 기준).

와인에서 시작한 유기농, 학교 급식까지 확산

와인으로 시작된 코랑스의 유기농은 서서히 다른 분야로도 확대되고 있다. 건물 자재의 일부를 순수 자연제품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것 중 하나. 관광안내소 내부 벽에는 화학 제품이 섞이지 않은 자연 석회 페인트가 사용됐고, 마을도서관 내부의 마무리 치장에도 자연 재료만이 이용됐다. 마을 사람들은 난방법도 자연 방식으로 서서히 전환하고 있다. 읍사무소에서는 전문가를 초청, 이런 자연 방식을 이용하려는 주민들이 무료로 조언을 들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또한 포도를 수확한 땅은 6년 동안 휴한을 시키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기간에 그 곳에 라벤더나 고추나물·백리향·샐비어 같은 약초를 심는다. 이는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해서인데, 조만간 증류소를 설치해 약초를 즉석에서 에센스 오일로 만들 계획이다. 놀리는 땅을 비옥하게 하면서 에센스 오일도 수확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마을 사람들은 매년 8월 3번째 주말에 '유기농 대축제'를 열고 있다. 축제에서는 유기농 식품·화장품·건축자재 등 갖가지 유기농 제품이 판매되는데, 프랑스 각지에서 상인들과 소비자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룬다.

코랑스의 유기농 실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겸한 학교 식당에서도 유기농 급식을 실시하고 있다.

4년 전쯤 처음으로 유기농 급식을 시작했을 때에는 매주 목요일('유기농의 날')에만 유기농 급식을 했지만, 지금은 학기 내내 하루에 한 가지 음식을 반드시 유기농 재료로 만든다.

메뉴 전체를 유기농으로 하지 않는 이유는 학부형 중 일부에서 유기농 급식에 찬성하지 않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강제로 유기농을 먹게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총 84명 중 학교 식당을 이용하는 학생은 60여명. 내가 방문한 날의 유기농 음식은 구운 닭고기였다. 오븐에서 노르스름하게 바싹 구워져 나온 닭다리가 무척 먹음직스러웠다.

오븐에서 갓 구워낸 유기농 닭구이를 꺼내고 있는 요리사.
 오븐에서 갓 구워낸 유기농 닭구이를 꺼내고 있는 요리사.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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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점은 유기농 급식이라고 해도 다른 학교의 급식비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유기농 재료비가 더 비싸지만, 다른 학교 급식비를 넘어서는 부분의 금액은 마을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마을과 달리 일하지 않는 엄마를 둔 학생들도 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되도록 많은 학생들에게 균형 잡힌 유기농 식사의 혜택을 주기 위해서다.

일부 반대하는 이도 있지만, 학부형들은 전반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이라고 하며 메뉴 전체를 유기농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 제1의 유기농 마을'로 바꾸고 언론에도 광고를 했던 이 마을은 이제 프랑스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유명해졌다. 프랑스 TV 방송인 TF1에서 1년 반 전에 이 마을을 소개했고, 벨기에 신문, 영국 신문, 캐나다 퀘백 라디오, GEO 독일판에서도 이 마을 얘기를 다뤘다.

기자가 찾은 날 저녁에도 프랑스 M6 TV에서 이 마을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영했고, 일본 취재진 방문도 예정돼 있었다. 7월에는 프랑스와 독일의 합작 문화 TV인 '아르테'에서 한 달 동안 체류하면서 코랑스를 비롯한 주변의 '녹색 프로방스'를 촬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한 유기농 전환에 관심이 있는 다른 지역의 마을에서도 코랑스 주민들의 자문을 구하고 있다. '제2, 제3의 코랑스'가 곳곳에 생기는 광경이 멀지 않아 보인다.

새벽의 정기 머금은 '코트 드 프로방스'

코랑스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이름은 '코트 드 프로방스'('프로방스의 언덕'이라는 뜻). 코랑스는 이 이름이 붙는 와인 생산 지역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다.

본래 이 지역의 와인 중 가장 비중이 높은 품목은 화이트 와인. 12세기부터 화이트 와인은 코랑스 와인 총 생산량의 70%를 차지했다. 그러나 외국 관광객들이 프로방스 지방에서 로제 와인을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화이트 와인 대신 로제 와인으로 중심이 바뀌었다. '프로방스=로제 와인'이란 수식어가 적용될 만큼 유명해지자, 코랑스의 포도 재배 농민들도 로제 와인 생산으로 전환했다. 지금은 코랑스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의 50%가 로제 와인이다(화이트 와인 30%, 레드 와인 20%). 

로제 와인의 질을 개량하기 위해 코랑스에서는 2년 전부터 포도를 밤에 수확한다. 그 이유를 이 지역 농민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를 끓여 발효시켜야 한다. 그러나 로제 와인은 발효되기 전에 만들어진다(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와인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도가 가열되면 안 된다. 새벽 3~4시에 신선한 포도를 수확하는 이유도 이처럼 포도가 뜨거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며, 나중에 제조된 와인을 커다란 스테인리스 통에 담아두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 마을에서 생산된 로제 와인의 맛이 좋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태그:#유기농, #코랑스, #와인, #광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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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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