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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큰 상처이긴 하지만, 세월로 덮어질 줄 알았다. 몇 년을 잊고 살았다. 애써 잊으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날이 되면 '5·18이로군…'하면서 날짜로만 기억하며 매년을 넘겼다. 작년 대선 때 꼴같잖은 대선이 너무나 보기 싫어 인터넷도 TV도 신문도 끊고 한참을 살았다.

그리고 임철우의 <봄날>을 읽었다. 열흘 정도로 작정하고 읽기 시작한 책. 그러나 몇 번이고 책을 덮었는지 모른다. 때로는 구역질이 나고 또 때로는 아득한 현기증. 쳐 받쳐 오르는 분노 아직까지 이런 감정이 남아있음을 스스로 놀랐다. 돌아오는 5·18에는 꼭 광주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5월의 산천은 어디나 아름답다. 아카시아와 찔레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 광주 가는 길 5월의 산천은 어디나 아름답다. 아카시아와 찔레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 안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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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로 내려가는 길. 88년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며 명동성당에서 활복 투신한 조성만 열사 20주기 기념행사로 망월묘역을 가는 분들의 차를 일행들과 얻어 탔다.

서울을 벗어나 시원하게 내달리는 버스 차창 밖으로는 온통 초록색이다. 높은 곳은 아카시아 꽃이, 낮은 곳은 찔레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창문을 열면 매혹적인 냄새가 가슴을 찌를 것 같다. 하얀 찔레꽃을 붉게 핀다고 노래한 가수는 혹 누구의 말대로 빨갱이가 아닐까? 나는 흰 찔레꽃밖에 안 보이는데….

아름다운 오월. 그러나 젊은 시절은 이렇게 좋은 계절이 있는지도 몰랐다. 5월은 학살의 피 냄새. 동지의 주검. 최루탄. 작열하는 페포퍼그 이런 것들만 있는 줄 알았다.

버스가 백양사 휴게소에 잠깐 멈춰선다. '로얄디' 한 병씩 건너진다. 열사의 부모님이 새벽을 달려온 사람들을 위해 마중나와 건너는 음료수란다.

버스가 오전 11시를 넘겨 망월묘역에 들어선다. 전경차가 빽빽이 들어차 있고 철수를 하는 것인지 분주하다. 서울 전경차도 있다. 나중에 들으니 대통령이 왔다 갔다고 한다. 참 요란스럽게도 왔다 간다.

학살자의 민정당이 민자당이 되고, 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28년 동안 대문만 바꿔단 정당의 이름으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오늘 5·18 국립묘지에서 무슨 생각을 하시고 갔을까?

행방불명자 묘역

돌 사진이 비석 앞(왼쪽 사진)에 박혀 있다. 'ooo의 묘' 가 'ooo의 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비석의 뒷면(오른쪽 사진). 아직도 아이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아갈 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 행방불명자 묘역 돌 사진이 비석 앞(왼쪽 사진)에 박혀 있다. 'ooo의 묘' 가 'ooo의 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비석의 뒷면(오른쪽 사진). 아직도 아이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아갈 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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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 이라는 기념 표지석을 뜯어와 여기 묻었다고 한다.
▲ 구묘역 입구의 박힌 표지석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 이라는 기념 표지석을 뜯어와 여기 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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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랫동안 오지 않았나 보다. 신 묘역은 처음이다. 행사를 앞두고 준비를 해서 그런지 잘 정돈된 느낌이다. 일행과 한 분 한 분 묘지를 둘러본다.

오른쪽 끝. 따로 조성된 묘역이 있다. '행방불명자 묘역'. 시신을 찾지 못해 비석만 세워 놓은 묘지. 곤봉에 짓이겨지고 총탄에 뚫려 버려지듯 암매장되었을 저 많은 사람들. 아직도 누구도 모르는 그 어디선가 웅크린 채 잠들어 있을 저 많은 사람들. 부디 시신이라도 님들이 계실 이 주인 없는 무덤으로 돌아오소서….

아기 돌 사진인가?  비석 한 켠에 박혀 있다. 일곱 살 나이에 피어 보지도 못하고 죽어 시신도 엄마 아빠에게 돌아오지 못한 아이. "창현이를 아버지 가슴에 묻는다"라고 적혀 있다. 어떤 할아버지가 "손자 생각나서 못 보겠어, 어떻게 이런 놈들이 있어"라며 발길을 돌린다. 묘비 앞에는 '이창현의 묘(墓)가 아닌 이창현의 령(靈)'으로 새겨 놓고 있다.

신 묘역을 돌아 구 묘역으로 올라오다, 일행 중 한 분이 김남주 선생 묘소에 드릴 국화 몇 송이를 샀다. 신 묘역과 달리 구 묘역에는 사람들이 많다. 단체 깃발도 보이고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올라온 아이들도 보인다.

입구에 깨어진 대리석 조각이 바닥이 깔렸다. '전두한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 82년인가? 담양의 어느 민가에 민박을 한 걸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를 뽑아서 여기에 묻어 놓았단다.

담양이면 광주와 지척의 거리. 차마 광주에 들어오지 못하고 담양에서 하룻밤을 보냈던 학살자 멍에를 쓴 전두환. "요즘 젊은이들이 날 싫어하는가 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말이야." 이런 억장 무너지는 농담을 하는 그의 모습이 최근에 TV에 비쳤다.

그는 아직 건장하고 눈물 뚝뚝 흐르는 참회를 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인간의 생명이 영원하지 않다면 그도 죽을 것이다. 국립묘지에서 어떤 호사를 받으며 누워있든 간에 여기 '전두환'이라는 이름은 대리석에 닳아 없어질 때 욕된 세월을 겪어야 할 것이다.

"5월 17일 卒(?)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제"

언제 어디서 돌아가신 지도 알 수 없어 5월 17일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 5월 17일 제사를 모시는 분들 언제 어디서 돌아가신 지도 알 수 없어 5월 17일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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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한 기(基) 한 기마다 흰 천을 덮어 놓았다. 무슨 의미일까?

김남주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앞에 온 사람들이 선생님에게 담배 한 개비씩 물려 드리고 갔나 보다. 불 꺼진 꽁초가 수북하다. 집에 선생님의 육성 CD가 있다. 쇳소리 같이 울리는 '전사'라는 시는 들을 때마다 회초리로 내리치시는 것 같다.

꽃도 놓여 있지 않은 상석 앞에 30대를 갓 넘긴 사내가 절을 하고 있다. 그 옆에는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는, 힘든 세파의 때가 묻은 반백의 할머니가 술을 치고 있다. 소주 한 병. 오징어포 하나. 종이컵이 전부다. 소주를 놓고 두 번 절하는 젊은이.

"음복해라." 어머니가 아들에게 술잔을 채워준다. 사진찍기가 미안해서 옆에서 멀뚱이 보고 있자니 "이것 좀 드셔 보실라우?"라며 오징어를 내민다. 엉겁결에 받아 든다. 비석 옆에는 '80년 5월 17일 졸(卒)'이라고 적혀 있고, 망자는 안동 김씨인가 보다.

"5월 17일날 돌아가셨어요?"라고 물었다. 처음 희생자가 18일 이후라고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의아해서 물어보았다.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제. 그냥 도청에서 시체 찾아가라고 해서 찾은 거여."

18일 하루 전날 돌아가신 걸로 가정해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말씀. 그때 저 아들 나이가 두세 살 정도였겠지. 아버지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아들 부축을 받으며 내려가는 어머니의 어깨가 유난히 흔들린다.

여기에서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

'봄날'에서 최미화로 나온 분의 실재 사진. 면사포가 유난히 희다.
▲ 임신주부 최미애님의 무덤 앞 사진 '봄날'에서 최미화로 나온 분의 실재 사진. 면사포가 유난히 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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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앙!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거리를 흔들었다. 맨홀 뚜껑 위에 서있던 그녀의 몸뚱이가 허수아비처럼 퍽 주저앉았다.

"의사 좀 얼른 보내 주시오! 애기가 금방 나올라고 한단 말이라우. 사, 산모가 지금 총을 맞고 죽었는디, 여덟 달 된 애기가, 막 뛰어라우! 엄마 뱃속에서, 천길 만길, 펄쩍펄쩍 뛰고 있단 말이라우……."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미화의 배가 조용해졌다. "누나! 누나아아!" "으아아아아! 미화야아아! 내 딸아. 내 새끼야아!" 춤을 추듯, 널뛰기를 하듯, 펄쩍펄쩍 뛰어오르던 미화 어머니. 마당 한복판에서, 허수아비처럼, 풀썩, 고꾸라졌다.
- <봄날>(임철우 작. 문학과 지성사) 4편 88~95쪽 부분 발췌

"묘지번호 135 최미애 가정주부.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며 교사인 남편이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아 집 앞에서 기다리던 중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 (임신 8개월 중 이었음)" 구 묘역 최미애 비문 중에서

<봄날>을 읽으면서 여기 몇 장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상상은 사진보다도 더 선명하고 스크린보다 더 강열했다. 소설 속에 최미화, 그 실재 인물(최미애)의 묘지 앞에 섰다. 면사포가 흰 신부는 참 곱다. 그러나 나는 똑바로 쳐다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군사 독재와의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이 아니었을까? 강경대 열사가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고 박승희 열사가 분신했다. 뒤이어 후배가 눈 앞에서 분신했다. 그리고도 이어지는 분신.

분신… 타살… 옆에 또 누가 죽어나가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며칠동안 신발조차 벗지 못해 신발과 양말과 발바닥 피딱지로 붙어서 애를 먹었던 기억. 퇴락해 가는 군사 독재와 마지막 싸움, 목숨을 던져 항거한 주검들 무덤 앞에 섰다.

아직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91년 투쟁. 죽음의 굿판이 광란하고 분신의 배후들이 죽음을 만들었다던 언론들. 진실은 아이 손바닥만치도 밝혀지지 않은 채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잊혀 가고 있다. 많은 죽음들. 처절한 투쟁들.

91년 투쟁은 80년 오월 광주에서, 87년 6월 항쟁을 지나 군사 독재의 마침표를 찍는 투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강경대, 박승희 열사가 망월 묘역에 묻힌 이유. 그것은 이 죽음이 광주 항쟁의 연장선이였기 때문이리라.

용서의 기회마져 빼앗긴 사람들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되풀이도 막을 수 있고 용서도 할 수 있을게다.
▲ 제단이 꽃을 바치는 아이들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되풀이도 막을 수 있고 용서도 할 수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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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서 전두환은 사형이 언도되고 많은 학살 가담자들이 무기 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당시 권력자들은 '화해'라는 미명 아래 사면을 단행한다. 그들은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정작 학살에 대한 진정한 참회조차 없는데 정권은 용서의 기회마저 빼앗아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화해가 아니라 역사의 왜곡이다. 그래서 아직 5·18 민주화 항쟁은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묘역을 오르는 아이들을 본다. 국화꽃 한 송이를 재단에 올려 놓는 아이들을 본다. 묘비 한 켠에서 아빠의 이야기를 연필로 받아적는 아이를 본다. 그래, 역사는 바로 알아야 용서도 할 수 있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거다. 내년에는 나도 아이의 손을 잡고 와야겠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


태그:#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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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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