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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지는 않았어도 발걸음마다 기나긴 땀내는 담았나 보다. 어느덧 6개월을 10여일 앞두고 베이징에 다시 왔다. 머물렀던 시간을 다 합하면 거의 2년 반 정도 되니 '나의 중국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베이징은 정서적으로 나랑 잘 맞는다.

 

7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베이징원인(北京猿人)의 터전이었고 춘추전국 시대 이전 서주(西周)의 봉국이던 계(蓟)나라가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전국칠웅으로 성장하는 연(燕)나라의 영토였으며 전국을 통일한 진(秦)나라의 변경이 된다. 계성(蓟城)이라 불리던 이곳은 서기 938년 거란(契丹)의 요(辽)나라의 도읍 연경(燕京)으로 자리잡으면서 이후 금(金), 원(元), 청(请) 등 북방민족의 중원 도모의 수도였다. 한족의 명(明)나라도 초기 도읍인 난징(南京)을 떠나 천도하기도 했다. 그러니, 정치의 중심이고 중국 문화의 한 복판이다.

 

10월 10일, 약간 흐린 날씨이다. 천안문광장은 늘 혼잡하고 산만하다. 날씨와도 무관하게 1년 내내 복잡한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정치 행사가 있으면 긴장감이 감돌고 사람들도 평소와 많지 않다. 이날도 곧 개최될 전국대표대회로 광장 곳곳에 검문과 검색이 있다. 중국에는 1년에 두 번 큰 행사가 있다. 10월 중순의 이 전국대표대회는 중국공산당 대표자 회의이고 3월 초순에 열리는 전국인민대표자회의는 공산당을 포함한 각 민족, 종교, 정파가 다 참여하는 의결기구이다.

 

 

전국 최대의 목조건축물이라는 태화전

 

이 둘은 약간 개념이 다른데,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권력은 중국공산당, 당 중앙, 전국대표회의, 국가주석, 전국인민대표회의, 국무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중앙군사위원회 등의 순서로 이어진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는 전국대표회의에서 선출하고 국가주석은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한다. 총서기이며 주석인 후진타오(胡锦涛)는 양회(두 대회)를 모두 거쳐 선출됐다.

 

광장을 지나 자금성, 즉 고궁(故宫)으로 향했다. 마오쩌둥 사진이 있는 천안문을 지나 정문인 우문(午门) 앞에 섰다. 자금성이 건립된 명(明)나라 시대인 1420년에 우문도 처음 세워졌으니 높이 12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자태가 수백 년을 이어왔으니 중국 대궐의 상징과도 같다고 하겠다.

 

문에 들어서면 자금성에서 가장 큰 문인 태화문(太和门)이 보이고 그 앞에 돌다리인 금수교(金水桥)가 보인다. 다섯 개로 갈라진 이 돌다리 아래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도록 조성된 궁(弓)형 인공 하천이 있다. 자금성 밖 천안문 앞에 있는 돌다리에 비해 내(内)금수교라 부른다.

 

좌우에는 정도문(贞度门)과 소덕문(昭德门)이 있다. 문을 지나니 고궁에서 가장 큰 태화전(太和殿)은 공사 중이었다. 전국 최대의 목조건축물이라는 태화전은 황제가 등극 즉위식이나 결혼, 황후의 책봉, 전쟁 출정과 같은 공식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설날이나 동지, 황제 생일 등에 백관을 모아 잔치를 벌이는 곳이기도 하다.

 

 

고궁에는 태화전 외에도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과 함께 3곳의 대전이 있다. 중화전 앞에는 앞다투어 내부를 보려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겨우 순서를 기다려 앞자리로 이동할 수 있었다. 중화전은 황제가 태화전 행사 전후에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내각을 접견하며 신하들의 알현을 받던 곳이다.

 

옥좌 앞에는 하루 1만8천리를 다닌다는 전설 속의 동물이 금빛 네 다리로 서서 위용을 더욱 발휘하고 있다. 가장 뒷전에 있는 보화전에서는 황후나 황태자를 책립하거나 몽골이나 신장 등 번왕을 접견했고 공주를 출가시키는 향연을 베풀기도 했다.

 

황제가 대외적인 업무와 행사를 집행하던 3곳 대전을 지나면 황제와 황후의 거처인 3곳 궁의 입구인 건청문(乾清门)이 나타난다. 문 앞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어로석(御路石)이 놓여있고 그 앞 양 옆에는 동과 금으로 제작된 사자 한 쌍이 지키고 있다. 왼손으로 새끼사자를 누르고 있는 쪽이 암컷 사자이고 둥근 공을 오른손으로 누르고 있는 쪽은 수컷 사자일 것이다. 사자 옆에는 고궁 곳곳에 있는 화재 방지용 물 항아리가 2개 있다.

 

 

건청궁(乾清宫)은 황제의 침궁(寝宫)으로도 사용했으며 외국사신을 접견하기도 했다. 건청궁은 가로 9칸, 세로 5칸 크기로 1400평방미터의 너비인데 처마 아래 화려한 지붕받침에는 황제의 상징인 용 무늬 채색이 세월이 흘렀음에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안에는 정면으로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과 다섯 마리 금빛 용이 휘돌아나는 듯한 현판 속에 청색 바탕으로 '성(聖)'자가 조그맣게 빛나고 있기도 하다.

 

용 무늬와 글자가 쓰인 5칸 병풍 앞에는 옥좌가 한가운데 놓여있으며 양 옆에는 선학으로 만들어진 촛대가 지키고 서 있다. 또한, 4개의 향로를 두고 사이로 3곳에 3칸의 계단이 배치돼 있다. 지붕에도 파란색 바탕에 금빛 용들이 새겨진 무늬들로 온통 채워져 있어 그야말로 황제의 주요 생활공간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멋지고 화려하면서도 결코 지루하지 않은 볼거리

 

건청궁 뒤로는 황후의 집무실이라 할 수 있는 교태전(交泰殿)이 이어진다. 자신 뿐 아니라 황귀비, 귀비, 비 등 황제의 여자들의 생일이나 길일에 행사를 벌이던 곳이다. 역시 건물 꼭대기에는 동으로 도금된 동그란 보정(宝顶)이 봉긋 솟아있고 칠보 장식의 기와가 처마 4곳을 바치고 있으며 오채(五踩)의 처마받침이 있으며 들보에는 용과 봉황과 함께 옥새 무늬가 아롱아롱 새겨져 있다.

 

안에는 강희제가 썼다는 '무위(無爲)' 두 글자 편액이 있고 옥좌 뒤 병품에는 건륭제가 썼다는 '교태전명(交泰殿铭)'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보기는 어려웠지만 문 옆으로 가경제(1798년) 때 만들어진 서양식 시계인 대자명종(大自鸣钟)이 전시돼 있는데 그 모양이 고상하고 품위가 있기도 했지만 서양식 시침과 분침이 있는 것이 독특해 보였다.

 

교태전 뒤에는 지영궁(坤宁宫)은 원래는 북방민족의 독특한 샤머니즘 종교행사인 라만(萨满)의식이 치러지던 곳이다. 라만은 남자 무당을 뜻하는 말인데, 만주족이 중원을 장악한 이후 궁 내에서 황권의 확립과 발전을 기원하는 제례를 행하던 곳이었던 것이다. 이후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황제들의 결혼 장소이기도 했는데 마지막황제 부의(溥仪)도 이곳에서 혼례를 올렸다고 한다.

 

후3궁을 지나면 황궁 후원인 어화원(御花园)에 이른다. 1만2천평방미터 규모의 땅에는 많은 정자와 나무와 풀, 그리고 가산(假山)으로 이뤄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입구인 천일문(天一门)은 세상의 만물은 물로 이뤄져 있다는 역경(易经)의 '天一生水'(천일생수)에서 따온 것으로 닝보의 옛 도서관 톈이거(天一阁)를 연상하게 한다.

 

어화원 중심에는 흠안전(钦安殿)이 있는데 매년 정초에 황제가 들러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미로처럼 꾸며진 가산 위에는 어경정(御景亭)이 있지만 출입이 통제돼 아쉽기도 하다. 사신사(四神祠)라는 작고 좁은 정자가 있는데 어디를 봐도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은 보이질 않는다. 이 사신을 비, 바람, 구름, 천둥을 뜻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정자 안으로 들어가서 불현듯 천정을 바라보면 둥근 원형을 20등분해 장식된 모습이 의외로 아름답다. 이렇듯 어화원은 물론이고 고궁 곳곳에는 구석마다 멋지고 화려하면서도 결코 지루하지 않은 좋은 볼거리가 많다.

 

원래 명나라 시대에는 궁후원(宫后苑)이라 불리다가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 어화원이라 불렀다 한다. 소나무, 측백나무, 대나무 등이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 원림(园林)이라 할 만하다.

 

건물 벽마다 붉은 단청빛깔이 연하게 물들어 있고 맑은 가을 하늘의 찬연한 햇살이 비치면 더욱 화사해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입구부터 이 후원에 이르기까지는 외부 자객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심어져 있지 않는데 이곳에 이르면 셀 수 없이 많은 갖가지 나무들이 옹기종기 땅을 비집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재빨리 달려와도 두어 시간은 걸리는 고궁 여행에서 이곳이야말로 휴식처이기도 한 셈이다.

 

일일이 다 보려면 하루 종일 봐도 모자란 곳

 

사실 고궁을 직선으로 가로질러 왔지만 좌우편으로도 공개된 박물관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다양한 문물과 풍습을 이해할 수 있는 전시품들이 많다. 일일이 다 보려면 하루 종일 봐도 모자랄 것이다.

 

고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门)을 나서면 양 옆으로 붉은 단청의 성벽이 길게 뻗어있고 끝에는 성 망루가 우뚝 솟아있다. 그 아래로 인공하천이 흐르니 난공불락의 성벽이라 하겠다. 명나라 이래 이 황궁은 전쟁으로 함락된 적이 없는 것도 흥미롭다. 만주족은 무혈 입성해 청나라를 세웠고 신중국의 마오쩌둥 홍군도 전투 없이 장악하지 않았던가.

 

고궁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베이징으로 왔다고 친구들이 만찬을 마련했다. 중국 술과 음식으로 즐기는 지인들과의 자리는 늘 기분 좋다. 중국 여행을 소재로 밤을 지새우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리고 다음날 베이징 외곽 동네 '이름 없는 장성'을 찾아가기로 했다.

 

10월 11일, 아침 일찍 차를 타고 베이징 시내를 벗어났다. 징청고속도로(京承高速公路)를 타고 1시간 가량 달리다가 쏭차오루(松曹路)를 따라 30분 더 가면 씬청즈(新城子)가 나온다. 그곳 서북쪽 산은 해발이 거의 2천 미터에 육박하니 꽤 높다.

 

이곳에는 장성으로는 드문 삼거리 장성이 있는데 보통 씬청즈베이꺼우창청(新城子北沟长城)이라 부르는 곳이다. 수풀을 헤치고 정상에 올랐더니 길게 뻗은 장성이 늦은 오후의 햇살에 잘 어울렸다. 다 쓰러져 가지만 여전히 가파른 장성 돌들을 겨우 딛고 올랐는데 다시 내려갈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산자락마다 무거운 돌들을 쌓고 또 쌓았으니 그 쌓는 고통이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듯하다.

 

 

사과보다는 더 시원하고 배보다는 더 달콤한 그런 맛

 

북방민족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실제로 이 장성을 타고 넘어온 민족이 있었겠는가. 방어전략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니 가볍게 넘보지 말라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겠고 중원의 한족 정권의 자구책이었으니 춘추전국 시대 이래 장성을 쌓았던 통치자들의 평화에 대한 염원이었겠거니 하면 될 것이다.

 

사실,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라 해 봤자 그 통치기간이 길지 않았으니 진시황을 장성의 대표주자로 보는 것은 그야말로 상징성 이상은 아니다. 진시황 이전부터 연나라 등이 건설한 산성을 진시황 역시 전 인구의 1/10을 동원해 돌을 쌓았고 이후 웬만한 왕조는 다 장성 쌓는데 돌 하나씩은 올렸다 하겠다. 특히, 지금까지 잘 보존된 장성은 대체로 명나라 시대에 쌓은 것이 많다.

 

길가에는 진나라 장성인지 명나라 장성인지 모를 돌들로 겨울 창고를 만든 곳을 발견했다. 옆으로 다 쓰러져 넘어가는 나무와 멀리 장성의 모습을 뒤로 하고 마치 보물창고인 양 버티고 섰다.

 

베이징 외곽에는 빠다링(八达岭)이나 스마타이(司马台)와 같은 유명한 장성이 많지만 이렇듯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한적하고 소박한 장성의 흔적이 많으니 베이징에 사는 분들은 한번쯤 장성 여행을 기획해볼만 하지 않을까. 이 씬청즈베이꺼우창청은 스마타이창청에서 동남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산골자락은 장성이 있지만 그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다른 장성들은 관광하기 좋은 위치이기에 번화하기조차 한데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은 산촌이기 때문이다. 화전으로 밭을 일구고 과일과 약초를 재배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가난하기 그지 없는 촌 동네인 것이다. 그들 역시 베이징 시민이건만 시내에 사는 사람들이 베이징 호적을 만들기 위해 돈을 주고 사거나 베이징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혈안이 된 것과 달리 무심한 듯 보이는 곳이다.

 

산길을 내려오는데 색다른 빛깔의 과일이 있어서 하나 땄다. 사과인가 배인가 보니 핑궈리(苹果梨)라 부르는 과일이다. 해발 2천 미터 가량 되는 산골 마을에 이 '사과배'가 있다니 신기했다. 살짝 옷에 문지르고 그 맛을 본 순간 너무도 신기했다. 사과 맛보다는 더 시원하고 배 맛보다는 더 달콤한 그런 맛이다.

 

 

거리 골목마다 라오베이징 정서를 그대로 담은 곳 

 

이 핑궈리는 중국 북방지방인 동북, 화북, 서북지방 산천에서 재배되는데 그 모양이 아주 추하다 하여 중화처우러우(中华丑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알아보니 그 원산지가 지린(吉林) 옌볜(延边) 조선족자치주라 한다.

 

1920년대에 북한의 함경남도에서 그 종자를 가져와 재배에 성공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북한에도 이 과일이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튼 가끔 중국의 대형 마트에서 가끔 보긴 했지만 직접 따서 맛 보긴 처음이다. 상큼하고 독특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게다가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는 색감도 지녔다.

 

산을 내려와 다시 베이징 시내로 돌아왔다. 이제 발품취재도 거의 마무리이다. 베이징에서 그 끝을 내려고 한 것은 마치 이곳이 '중국의 고향' 같아서일까. 주재원 생활, 출장, 어학연수로 이미 눈감고도 다닐 만큼 정겨운 곳 베이징. 쇼핑도 하고 짐 정리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하니 이제 딱 하루 남았다. 지긋지긋할 법도 하지만 돌이켜보니 180일 두루 산천을 헤매며 돌아다녔으니 묻어나는 땀내도 헤진 신발과 배낭도 못내 이별가 앞에 눈물 떨어질 듯 애처롭다. 16일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나니 더욱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처 없이 하루를 보내자. 13일 오전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어디를 갈까. 베이징에서 가장 정감 어린 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택시를 타고 베이하이(北海) 공원 북문 건너편 허우하이(后海)로 갔다. 호수를 둘러 햇살조차 따스하다. 거리 찻집에 앉아 수련이 방울처럼 뽀글거리는 낭만을 담았다. 저녁이 되면 외국인들로 넘쳐나고 품위 있는 식당과 술집, 거리 골목마다 라오베이징(老北京)의 정서를 그대로 담은 인기 있는 장소로 변하건만 한낮에는 참 나른하다.

 

 

귀신 나오는 거리

 

점심을 먹으러 그립고도 정겨운 베이징의 꾸이지에(鬼街)에 갔다. 2000년에 처음 베이징 온 날 밤, 맵고 짜릿한 롱샤(龙虾) 새우요리의 맛을 잊을 수 없어, 자주 찾는 곳이다. 똥즈먼(东直门) 부근의 이 꾸이제는 이름처럼 '귀신 나오는 거리'라고 하기도 하는데 밤이면 길 양쪽을 따라 홍등이 거리를 밝게 비추는 곳으로 최근에 이르러 더욱 각광 받는 음식거리이다. '귀신 나오는 거리'라 해서 베이징 사람들은 좀 꺼려한다고도 하는데 원래 이름은 꾸이제(簋街)인데, ‘簋’ 글자가 쓰기도 복잡하고 그 뜻도 '제사 지낼 때 물건 담는 그릇'이어서 자연스레 발음과 성조가 같은 '귀신' 鬼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꾸이제 한 모퉁이에 개구리 요리를 파는 곳이 있어서 들어갔다. 큰 식용 개구리 다섯 마리를 스촨(四川)식으로 뜨거운 기름에 넣고 맵고 쏘는 듯한 향료와 재료를 넣어 만드는 쉐이주위(水煮鱼)처럼 요리한 것에 입맛이 돌았다. 요리 이름은 무지하게 어려웠다. 찬주이와즈(谗嘴蛙仔)라고 했다. 76위엔이니 꽤 비싼데 헐뜯을 '참(谗)', 부리 '취(嘴)' 그리고 와자(蛙仔)는 개구리 새끼이니 이름도 참 요상하게 지었다.

 

 

별미 하나 새로 개발하고 골동품과 공예품 거리 류리창(琉璃厂)으로 갔다. 늘 베이징다운 곳이다. 햇살을 따라 옹기종기 앉아 있는 노인들의 환한 미소가 정겹다. 다시 오후 내내 외국 여행객들의 게스트하우스들이 많은 곳을 걷다가 단골인 세계청년의 집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나서 따스랄(大栅拦) 거리를 따라 전문(前门)에 이르렀다.

 

그리고, 베이징에서의 마지막 날 밤을 라오서 차관에서 보내기로 했다. 경극을 비롯해 잡기, 서커스, 상성, 변검 등 온갖 버라이어티 공연의 백미인 곳이다. 청나라 말기와 민국 초기에 베이징에서는 독서토론이나 강연을 들으며 차를 마시는 문화가 유행했다.

 

그 당시 분위기 그대로 20세기 초 중국 문학의 라오서(老舍)는 중국 현대문학계에 유명한 소설가이면서 극작가로 알려져 있다. 본명은 서경춘(舒慶春)이며 만주족인데 베이징 태생으로 1888년에 태어나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6년까지 살았다고 전한다. 지금의 차관은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 1988년에 문을 연 것인데 부시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방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이 라오서 차관을 좋아해서 10번도 훨씬 넘게 이곳에서 공연을 지켜봤다. 손님이나 가족이 오거나, 때로는 혼자서도 찾았다. 늘 그렇지만 아주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다양하게 구성된 전통 공연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날도 공연은 1시간 30분 가량 쉼 없이 진행됐다. 차를 마시면서 공연을 보고 있으니 참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이곳에서 공연을 봤을 때는 어색해 보이던 것들도 이제는 베이징 사투리 심한 말도 정겨우면서 알아듣게 되고 중국사람들처럼 함께 기뻐하고 박수도 치면서 즐기게 됐으니 말이다.

 

180일 중국발품취재를 마치며

 

이제 중국발품 취재도 어느덧 마지막 날이니 감회가 또 남달랐다. 변검을 마지막으로 공연이 끝나니 막이 내려오고 있다. 혼잡한 사람들 소리가 잠시 멈춘 듯 다 끝나버린 공연처럼 허탈한 느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6개월을 다 마치다니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이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으랴.

 

180일을 마치고 돌아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 4가지 기본 장비인 캠코더, 카메라, 노트북, PDA를 들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불더라도, 사막과 초원, 산과 바다, 강을 벗 삼으며 사람도 만났고, 역사와 문화도 체험했다. 조금 중국을 더 알게 된 셈이니 스스로 생각해도 거듭 나기 좋은 '중국주유천하'였다. 사람들마다 한동안 질문을 하겠지?

 

"다시 또 갈래?"

"글쎄…또 가고 또 가고 싶어."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최종명의 <중국발품취재> 연재를 즐겨 봐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2007년 4월 20일부터 10월 26일까지 6개월(180일) 동안 중국 전 성 및 자치주를 취재 여행하면서 현장 생활 속에 있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체험한 경험을 여러분들과 나누게 된 것이 기쁩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기사로 만날 것을 약속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이 글은 www.youyue.co.kr에도 올립니다


태그:#베이징, #중국발품, #고궁, #장성, #라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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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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