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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계속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처음 대부분의 상해인들은 그가 주변 정리를 끝내는 대로 상해에 와 대통령에 취임하고 업무를 시작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조차 없이 오지 않자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추정하기 시작했다. 그가 상해에 오지 않는 이유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다.   

먼저 미국 독립운동가 내부에서 문제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에 의하면 이미 미국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노선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안창호의 실력양성론, 박용만의 무장투쟁론에 비해 이승만의 노선은 대미외교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미 외교를 위해서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이승만보다 먼저 상해에 온 박용만 때문에 안 오는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사실 이 견해는 아주 프라이비트한 것이어서 우스갯소리처럼 나돌았다. 박용만과 이승만은 같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있다면 이름 끝 자가 만 자라는 것 밖에는 없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아무튼 이승만과 박용만은 사사건건 갈등을 빚고 대립해 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경우에도 같은 공간에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용만이 먼저 상해에 와서 자리 잡고 있으니 이승만으로서 올 마음이 들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사적인 소문들은 이승만의 부임이 늦어지면서 더 무성하게 번졌다. 그는 상해에 이미 밀정, 좋게 말해서 통신원을 침투시켜 놓고 거의 일일 보고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가 부임하면 소신껏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겠는지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부임 후에도 전권을 장악하기 위해 조사를 시키고 있는 의미도 있다고 했다.

이승만에 더 비판적인 사람은 그의 영어 실력까지를 폄하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알기로 이승만은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는 문장은 잘 만드는 데 실제 발음은 너무 어눌해서 미국인들이 못 알아듣는다고도 했다.

게다가 이승만은 평소 남 앞에서 궁상스러울 만큼 내핍 생활을 하는 것으로 비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철저히 이중적이어서 한국인들 앞에서만 검소한 척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끔 구멍 난 양말을 꿰매 신는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은 말뿐이지 진짜로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으로는 임시정부의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안 오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이승만은 국무총리인 이동휘가 공산주의자라는 보고를 통신원을 통해 받고는 공산주의자와 함께 일할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상해 세력이 주도하는 곳에 대통령으로 온다 한들 개밥에 도토리 짝 날 수밖에 없어서 안 오는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를 선출한 다수의 국내파와 미국파가 있는데 그렇게 볼 수 없는 거라는 반론도 있었다.

아무튼 부임하지 않는 대통령을 두고 아주 다양한 추측들이 설왕설래되고 있었다.

민제호는 아주 간명하게 말했다.

"상해에까지 와 고생하기 싫은 겁니다."

급기야 국무원 비서장 김립(金立)을 비롯한 차장단에서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이 제출되었다. 사실 김립은 이동휘를 추종하는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결국 이승만은 통신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워싱턴을 출발해 하와이를 거쳐 상해에 도착했다. 불신임안이 제출되고 6개월이 더 지난 1920년 12월 5일이었다.

이승만이 오고 나서 신규식의 신경쇄약은 더 악화되어 갔다. 그는 대통령을 맞아 정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야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주었다. 그는 이승만에 대한 기대와 비난의 틈새에서 곤혹스럽고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한쪽에서 이승만을 환영하는 모임을 갖는데 반해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비난하거나 거부하는 모임이 생겨나고 있었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이승만이 오자 즉시 사임하고 상해를 떠난다. 이승만의 반대 세력은 북경에 결집하여 군사통일촉성회와 군사통일주비회를 결성하고 외교 중심론의 임시정부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박은식이나 신채호까지도 이승만에게는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국민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그것은 곧 임시정부의 분열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특히 박은식을 비롯한 원로들이 '아 동포에게 고함' 이란 제목의 선언을 하게 됨으로써 이승만의 직무 수행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신규식은 이동휘 대신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한 이동녕과 함께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동녕마저도 이승만을 더 이상 변호할 명분이 없다며 사퇴해 버렸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유지는 신규식의 절대 염원이었다.

그는 사태 수습을 위해 3대 강령을 발표했다.

1. 정부는 절대 유지한다.
2. 실책을 극복하고 혁신한다.
3. 군사 지식을 함양하여 독립 사업을 실행한다.

그런데 그 시간에 이승만은 미국행 비행기 표를 알아보고 있었다. 이제 신규식은 임시정부를 혼자서 힘겹게 짊어져야 하는 형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급기야 이승만이 5월 16일 신규식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다음 날 하와이 행 비행기에 올라 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성명서 하나를 달랑 남기고 떠나 버렸다.

지난 12월 간신히 상해에 도착하여 국무원의 내부 결속을 기도하였으나 의외로 각원의 사퇴 문제로 인해 시일을 다비한지라, 지금에 다행히 각원 제공의 질서가 정돈되었으매 적체된 서무가 집행되기를 바라는 바, 본 대통령은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압박으로 인하여 다시 도미하기를 각원 제공과 협의 내정하여...(중략) 신규식은 오랫동안 타향살이를 하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그 어려움을 낙으로 삼아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사람이니 극동의 일은 충분히 그에게 맡길 만하다. 그러니 나는 안심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승만이 돌아가자 부임지를 떠난 그에 대해 잠시 비난 여론이 일더니, 임시정부에 등을 돌렸던 사람들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임시 정부를 이탈했던 안창호도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법무부장과 국무총리를 겸임하게 된 신규식은 국무원 비서장 신익희 등과 상의하며 정부를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치열한 삶과 매혹적인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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