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휘치(Huizi), 나야 코리아 문."

"오, 문! 드디어 왔구나! 거기 어디야?"

"여기 경찰서. 도무지 집주소만 가지곤 이런 대도시에서 너희 집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잘했어. 경찰서라면 우리 집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으니 곧 가도록 할게. 조금만 기다려."

 

휘치는 내 전화를 받고 들떠 있었다. 나 역시 조금 후면 반가운 얼굴을 다시 보게 된다는 생각에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먼 곳에서 반가운 친구가 오면 버선발로 뛰어나오듯이 전화 한 통에 부리나케 달려오는 친구.

 

 

한 달 전. 버거킹에서 하룻밤을 지새울 때 진한 아쉬움을 남긴 '김치 꿈' 사건이 있었던 마사뜰란을 벗어날 때였다. 도로에 차 한 대가 정차해 있더니 나를 보자 한 가족이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 때문에 일부러 앞에서 정차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포츠로 단합된 휘치네 가족이었다.

 

휘치 어머니 생일 기념으로 가족이 마사뜰란으로 휴양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를 본 것이다. 그 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들은 멕시코시티 가는 관문인 위성도시 톨루카에 도착할 때 꼭 자기 집에 방문하라며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 주었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톨루카에 도착한 것이다.

 

 

"문, 여기야!", 반갑게 손을 흔드는 휘치 얼굴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반가워 휘치, 꼭 한 달 만이군. 잘 지냈어?"

"물론이지. 너야말로 자전거 타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어서 우리 집에 가자. 가족들이 널 기다리고 있어."

 

휘치가 모는 차를 따라 자전거로 10여분 정도 가자 울타리로 둘러쳐진 휘치네 집이 보였다. 자전거를 밖에 세워두고 안에 들어가니 가장 먼저 휘치의 아버지가 반갑게 포옹으로 환대해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 누나, 동생 순으로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눴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남에 대해 회포를 풀며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나누었다. 길에서 미처 하지 못한 다양한 여행 얘기에 휘치네 가족은 박장대소하다가, 놀라다가, 또 때론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두 시간 동안 가족 모두가 모여 즐겁게 수다를 떨다 이제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휘치 아버지는 손님 접대에 대한 예의로 휘치를 통해 이것저것 설명해 주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를 일러줬다.

 

"문, 그런데 우리 집엔 따뜻한 물이 나오질 않아."

"왜? 고장났어?"

"아니."

"그럼?"

"우리 가족은 원래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지 않고 항상 찬물로만 해서 아예 난방 장치를 가동 안 시켜. 밤에도 보일러 없이 자야할 거야."

  

휘치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 대관절 지금이 1월 한겨울인데 찬물로 샤워하고 게다가 아예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니 이 무슨 무사 만루에서 4번 타자에게 한 가운데 평범한 직구를 꽂아 넣겠다고 우기는 시답잖은 소리인가.

 

"보일러 없이 씻고 잔단 말이야? 춥지 않아?"

"하하, 우리 가족은 원래 이런 걸 즐겨. 그래서 난방도 온수도 필요 없거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 모두가 이런 휘치의 얘기에 깊은 뜻이라도 담긴 양 뭔가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하튼 이유를 더 물어보지 못하고 알았다고만 대답한 뒤 한 번 웃어주었다. 곤란하거나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면 오히려 그들이 미안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저녁에는 휘치 형제들과 톨루카 센트로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 시장통은 역시나 매력이 넘친다. 어딜 가나 가장 활력 있고 꾸미지 않은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 시장. 우리는 야외 레스토랑에서 다양한 음식들을 먹어가며 이 밤을 즐겼다. 오랜만에 건강한 젊은 친구 4명이서 모이니 우린 그냥 소소한 얘기에도 제법 크게 웃어젖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웃으면서도 사실 집에 들어가서 어떻게 찬물로 샤워하고 또 어떻게 얼음장 같이 차가운 방에서 잠을 자야할지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굳이 못할 거야 없지만 오늘은 모처럼 따뜻한 물에 샤워한 후 뜨뜻한 방에서 숙면을 취하고 피로를 풀 거라 종일 기대하며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만에 부담 없이 놀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갔다. 샤워는 언감생심이라 대충 씻을 부위만 씻고는 침대로 뛰어 들어갔다. 침대에는 나를 생각해서였는지 두꺼운 이불이 두 겹이나 포개져 있었다. 이불에 파고들어서는 새우처럼 웅크린 채 온기로 차기만을 기다리며 이 무슨 팔자인가 생각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다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가족들은 모두 분주해 보였다.

 

"토요일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회사도 쉰다며."

"응, 아빠와 난 자전거 동호회 소속이라 자전거를 타러 가고, 엄마와 남동생은 수영하러 수영장에 가는 거야. 누난 친구들과 테니스를 치러 가지."

"그럼 다들 이 아침부터 운동하러 가는 거야?"

"우리 가족은 스포츠로 똘똘 뭉쳐 있거든. 지금이야 주말이니 각자 하고 싶은 운동을 하는 거야. 하지만 여름엔 수상스키 타러, 겨울엔 스키랑 스노보드 타러 항상 가족여행을 하거든. 그리고 달리기는 매일 하는 거고.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트라이애슬론?"

"맞아. 우리 가족 모두 매년 그 경기에 참여하지. 엄마만 건강이 조금 안 좋으셔서 최근에는 하지 않으실 뿐이야."

 

 

그 힘들다는 경기를 가족 모두가 도전하다니 참 대단한 집안이다. 그러고 보면 단지 생활비를 아낀다거나 이유 없이 찬물에 샤워하고 보일러를 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휘치네 가족은 생활 속에서 이미 몸을 단련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게 자의인지 아니면 하다 보니 그렇게 되어 적응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가족 모두가 별 일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니 그 기백에 박수 쳐 줄만하다.

 

아쉽긴 했지만 나 역시 그들의 손님인 입장에서 그 문화를 존중해 준 것이 옳았다고 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수 샤워와 이불을 걷어찰 정도로 따뜻한 잠자리는 다음 기회로 미뤘지만 더운 나라에 도착할 때는 아마 오늘이 그리울 지도 모르겠다.

 

휘치네 가족이 신발 끈을 고쳐 맬 무렵 나도 다시 자전거 안장 위에 올라 허벅지 근육을 조이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자전거 여행, #멕시코, #톨루카, #세계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기사는 연재 자전거는 자전車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