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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드라마 <대왕세종>.
 황희. 드라마 <대왕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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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명재상 황희(1363~1452년).

세종 13년부터 세종 31년(1449)까지 무려 18년간이나 영의정부사(영의정)를 지낸 황희를 생각하면,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러 정권에 걸쳐 장관이나 총리를 역임한 현대 한국 정치인들이 떠오를지 모른다.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1998년 여·야 정권교체 등으로부터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행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정치적 의리 여하를 떠나서, 그런 사람들은 일단 ‘시대 흐름을 잘 타는 사람들’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럼, 20년 가까이 영의정부사를 지낸 황희도 과연 시대 흐름을 잘 타는 사람이었을까?

86년간의 생애 동안 황희는 주로 관복을 입고 살았다. 음보(蔭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고려 우왕 2년(1376)부터 계산하면 73년간 관료생활을 한 셈이고, 문과 급제 이후 관직을 새로 받은 공양왕 2년(1390)부터 계산하면 59년간 관료생활을 한 셈이다. 어느 쪽을 취하든 간에 그는 매우 오랜 기간 동안 관직에 머문 사람이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한반도에서는 여러 차례의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황희의 경우에는, 그중 두 차례의 결정적 기로에서 ‘결과적으로’ 줄을 잘못 서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고려-조선 왕조 교체기와 양녕-충녕 세자 교체기가 바로 그때였다. 1392년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선택함으로써 두문동에 들어갔고, 1416년과 1418년에는 세자 이제(양녕대군)를 옹호함으로써 각각 파직과 유배를 당했다.

물론 픽션이기는 하지만, <대왕세종> 제35부(5월 3일)에서는 황희가 태종 몰래 여진족 정벌에 나선 세자 이제를 처음에는 만류하다가 결국에는 도와주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저하는 틀렸습니다”라면서도 “그럼에도 저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라는 황희의 대사는, 양녕-충녕 교체기에 고집스럽게 양녕대군을 옹호한 황희의 태도를 비교적 잘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황희는 매번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선택한 것들은 얼마 안 가서 곧 무너지고 말았다. 반면에, 그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은 500년간(조선왕조) 혹은 32년간(세종 재위기간)이나 오래오래 이어졌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 중에 “황희와 정반대로 선택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결과적으로’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다. 고려왕조의 신하가 정치적 과도기 때에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고수하는 것은 결코 줄을 잘못 서는 것이 아니다. 또 세자 이제의 지지자가 정치적 과도기 때에 이제에 대한 충성을 고수하는 것은 결코 줄을 잘못 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줄을 잘못 서는 게 아니라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황희는 매번 얼마 안 가서 자신의 행로를 수정하곤 했다. 고려에 대한 충성을 선택했다가 2년 만에 조선왕조로 전향을 했고, 양녕대군을 옹호했다가 4년 만에 세종대왕 밑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그가 결국에는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뒤집은 점을 놓고 볼 때에, 그가 애당초 고려왕조나 양녕대군에 대한 의리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저 계산을 그르쳤을 뿐이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의 전향이 고려-조선 교체기 때에 한번만 있었다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비슷한 유형의 일이 두 번이나 발생했고 또 두 번의 일이 그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 두 번의 일이 그저 어쩌다 생긴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특정 행동패턴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을 것이라고 판단해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위와 같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던 때에 ▲조선왕조가 국초의 혼란을 수습하고 문치로 접어들던 때(양녕-충녕 교체기)에 황희가 매번 ‘잘못된 선택’을 내렸다가 얼마 안 가서 수정을 되풀이한 것을 놓고 볼 때에, 황희를 두고 ‘시대 흐름을 잘 타는 사람’이란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결코 ‘거시적 판세’를 잘 파악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거시적 판세’라는 표현과 관련되어 뒤에서 다시 논의가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황희는 매번 전향 이후에 관운이 좋았다는 점이다.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조선왕조를 선택한 후에는 지신사(대통령비서실장)를 거쳐 판서 자리에까지 올랐고, 양녕대군을 포기하고 세종을 선택한 후에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8년간이나 영의정부사를 지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결정적 오판을 범한 사람치고는 행운이 꽤 좋은 편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한 번의 판단착오로 정치인생을 끝내고 마는데, 황희는 두 번씩이나 판단착오를 범하고도 매번 화려하게 부활하곤 했다.

어찌 보면, 애초부터 줄을 잘 선 사람보다도 황희 같은 사람이 더 대단한지도 모른다. ‘줄을 잘못 선 사람’이 ‘줄을 잘 선 사람’보다도 더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럼, 황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여기서는 네 가지의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황희는 ‘잘못된 선택’을 신속히 수정했다. 고려왕조와 양녕대군을 선택하느라 스스로 고난의 길을 떠나는 것 같이 보였지만, 몇 년 안 가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수정하고 노선을 선회했다.

둘째, 황희는 성격이 원만한 사람이었다. 문종 2년(1452) 2월 8일자 <문종실록>에 수록된 ‘황희 졸기’에 따르면, 그는 ‘간사한 사람’이라느니 ‘뇌물을 받는 사람’이라느니 하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원만해서 세종대에는 ‘어진 재상’이라는 존경을 받았다.

‘간사하다느니 뇌물을 받는다느니 하는 평판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어질다는 평판까지 함께 받을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간사함’과 ‘뇌물을 받음’은 얼마든지 ‘어짊’과 병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간사하다는 것은 뒤집어놓고 보면 성격이 부드럽다는 것이다. 또 인간관계가 딱딱한 사람들은 뇌물을 잘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들로부터 어질다는 평판도 얻기가 어렵지 않을까? 아무튼 실록에서는 황희의 이러저러한 다양한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셋째, 황희는 비밀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업무를 잘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상관이 중시하는 부하의 덕목인 ‘입이 무거움’이나 ‘유능함’ 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황희가 ‘잘못된 선택’ 후에 곧바로 정치적 재기를 이룩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황희 졸기’에 따르면, 황희는 비밀유지에 관한 한 태종으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았다. 기밀사무를 담당하면서 거의 매일 같이 태종을 만났다고 한다.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그는 국왕과 단둘이서만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아는 일이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가 한 일이 되는 것이다.”(此事予與卿獨知之若泄非卿卽予)

또 황희는 일상 업무를 잘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주군의 정치적 의지도 잘 실현시키는 편이었다. 황희가 태종의 밀지를 받아 민무구·민무질 제거를 잘 처리한 데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넷째, 황희는 ‘미시적 판세’를 잘 분석하는 사람이었다. 앞에서, 황희는 ‘거시적 판세’를 잘 읽지 못하는 인물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황희는 미시적 판세만큼은 잘 파악했던 모양이다. 단기간에 진행되는 사태의 흐름과 배후를 잘 가늠했던 것 같다.

황희가 미시적 판세를 잘 읽는 사람이라는 점은 태종 이방원의 입을 통해서도 훌륭하게 증명될 수 있다. 태종 8년(1408)에 모반이 발생하자 태종이 대책 논의를 위해 황희를 급히 불러들었다.

‘황희 졸기’에 따르면, “변고가 났으니 급히 대응하라”는 태종의 지시를 받은 황희가 “누가 주모자입니까?”라고 묻자, 태종은 “조용(趙庸)이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황희는 “조용의 사람됨을 놓고 볼 때에, 아버지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은 필시 하지 못할 사람입니다.”(庸之爲人弑父與君必不爲也)라고 말한 뒤에 조용 대신 목인해(睦仁海)를 주모자로 지목했다고 한다.

나중에 진상을 파악해보니, 정말로 목인해가 주범이었고 조용은 죄가 없었다고 했다. 그때 태종도 감탄하고 조용 본인도 감탄했다고 ‘황희 졸기’는 전하고 있다. 이러한 미시적 판세분석 능력은 황희가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든 주요 요인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세종대에 무려 18년간이나 영의정부사를 지냈을 정도로 관운이 매우 좋은 황희 정승은 고려-조선 교체기 및 양녕-충녕 교체기 같은 결정적 순간에 정치적 판단착오를 범함으로써 일시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애당초 선택하지 않은 대상’인 조선과 충녕으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그가 ▲자신의 판단착오를 신속히 수정했고 ▲성격이 원만했고 ▲비밀유지와 업무처리에 능숙했으며 ▲미시적 판세를 잘 읽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줄을 잘 선 사람’보다도 오히려 더 출세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골프로 비유하면, 티샷(제1구)으로 날린 공이 물웅덩이나 벙커에 빠져 ‘이제 졌구나!’ 할 때에 양말을 벗고 웅덩이에 들어가서 역전의 버디 샷을 날려 우승컵을 거머쥐는 선수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황희는 바로 그런 ‘역전의 명수’였다. 


태그:#대왕세종, #대왕 세종, #세종,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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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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