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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의왕후를 죽이려다가 결국 자기 무덤을 파고만 홍국영. 드라마 <이산>.
 효의왕후를 죽이려다가 결국 자기 무덤을 파고만 홍국영.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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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이 끝내 사고를 치고 말았다.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세도가 홍국영. 그는 중전 효의왕후(고종 때 황후로 추존)마저 떨어뜨리려다 자신이 쏜 새총에 자신이 맞고 말았다. 홍국영의 세도가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최측근 일등공신이 자신의 부인을 독살하려 했다는 이 기막힌 사실을, 정조 임금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아닐 거라고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누군가 홍국영을 음해하려고 지어낸 말일 거라고 했다.

그러나 처소에서 홍국영과 단둘이 만나 그의 실토를 듣게 된 정조 임금. 소신이 한 짓이라는 홍국영의 말을 들은 정조 임금. "그럴 리 없어!"라며 정조는 방바닥에 주저앉았고, 홍국영 역시 흐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두 군신은 그렇게 울었고 밤은 깊어만 갔다. <이산> 제66회(5월 5일)에서 묘사된 장면들이다.

가장 신임했던 홍국영이 결국 자신을 배반했다는 엄청난 사실에 직면한 실제의 정조 임금 역시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느꼈던 모양이다.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2월 26일자 기사에 수록된 교서에 따르면, 정조는 "홍국영을 고향으로 쫓아 보내라"(命洪國榮放還田里)고 명령하면서 자신의 복합적인 심경을 함께 표출했다.

"이 사람에게도 이런 말이 있고, 이 사람에게도 이런 일이 있는가? 말이 가공으로 꾸며진 게 아니라면, 일(사실, 인용자 주)이 정말로 그러하였다고 참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일이 정말로 그러하다고 믿을 수 없다면, 말이 정말로 가공으로 꾸며진 것인가?"(斯人而有斯言也斯人而有斯事乎言非架空搆虛則事果信有眞然乎事非信有眞然則言果架空搆虛乎)

홍국영이 저지른 죄악 앞에서 정조 임금은 '이 모든 말이 실제 사실과 일치하는 것인가?'라며 괴로운 심경을 드러냈다. 그만큼 홍국영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조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흐느끼는 홍국영. 드라마 <이산>.
 정조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흐느끼는 홍국영. 드라마 <이산>.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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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면, 이러한 언급은 문제의 본질을 여전히 아리송한 상태로 남겨둠으로써 정조 자신이 문제의 처결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해두려는 의도를 표출한 대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조가 문제를 아리송한 채로 남겨둠으로써 문제해결의 주도권을 쥐려 했다는 점은, 이후 정조가 "홍국영을 처벌하라!"는 조정의 여론을 일축하고 그를 지방으로 내쫓는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등 끝까지 자기 방식으로 홍국영 문제를 처리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조정 내 여론을 일축하고 최측근 신하를 끝까지 예우한 것은 홍국영과의 특수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측근 신하를 잔혹하게 다루므로 인해 발생할지 모를 정치적 부담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 최측근 신하를 매정하게 다룰 경우에 다른 측근들의 충성심에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우려 역시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위와 같이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며 문제를 모호하게 '포장'한 정조 임금은 교서 중간 부분에서 홍국영이 아닌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내 탓이요, 내 탓이요!'라며 자책한 셈이다.

"대개 옳고 그름은 버려두고라도, 내가 참으로 옳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말까지 생기고 이런 일까지 생긴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부끄럽고 괴로워서 차라리 죽고 싶다."(大槪是非姑舍是予誠不穀之故致有此言致有此事撫躬慙痛寧欲無吪)

위와 같이, 홍국영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을 돌린 정조는 군신(群臣)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홍국영을 지방으로 추방하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다만 시종(始終)을 지키려면 이 사람이 자취를 감추고 근신함으로써 종래의 화기(和氣)를 잃지 않도록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봉조하(奉朝賀) 홍국영을 고향(田里)으로 돌려보내어 내 군신(君臣)의 시종을 지키도록 하라."

여기서 봉조하란 종2품 이상의 퇴임 관료에게 부여되던 것으로서, 종신토록 신분 상당의 '연금'을 받는 자리였다. 홍국영의 경우에는 고향으로 쫓겨나기 얼마 전인 정조 3년(1779) 9월 28일에 봉조하의 신분을 부여받았다.

홍국영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정조 임금. 드라마 <이산>.
 홍국영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정조 임금. 드라마 <이산>.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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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홍국영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린 정조 임금은 홍국영의 신분을 봉조하로 유지시켜주면서 그를 고향으로 내쫓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해야만 군신관계의 시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정조는 강조했다.

홍국영의 죽음을 다룬 정조 5년(1781) 4월 5일자 <정조실록>에 따르면, "경자년(1780년, 인용자 주) 봄부터 신하들이 일제히 홍국영의 죄가 하늘에 가득하다고 성토했지만, 주상께서 끝내 주벌을 가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정조 5년 4월 5일자 <정조실록>의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돌이켜 생각하면 이는 나의 잘못이고, 지금 스스로 반성할 겨를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내가)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는가?"(反以思之此予之過到今自反之不暇尙何說哉)라고 정조가 말한 대목이 나온다.

이와 같이, 정조는 여러 차례에 걸쳐 홍국영의 잘못을 끝까지 자기의 잘못으로 돌리는 태도를 보였다. 홍국영을 처벌하라는 조정의 빗발치는 여론을 묵살하고 결국 정조는 홍국영을 횡성현으로 쫓아냈다가 다시 강릉현으로 내쫓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했다. 홍국영이 삼사의 탄핵으로 인해 형벌을 받았다고 하는 일설도 있지만, 실록에서는 정조가 끝까지 홍국영을 보호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록 기록과 달리 홍국영이 형벌을 받았건 안 받았건 간에, 적어도 정조 임금이 홍국영 문제로 인해 일정 정도 심적 고통을 느낀 점만큼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실록 기록에 어느 정도의 과장이 있을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임금이 공식 문서상에서 신하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괴로움을 표시한 점을 볼 때에 정조 임금이 홍국영을 내쫓을 때에 상당한 심적 고통을 느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산> 제66회에서, 야밤에 은밀히 의금부 옥사로 찾아가 홍국영을 면회한 정조 임금은 "난 자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다 믿을 테니, 이제라도 자네가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해보게"라며 끝까지 홍국영에 대한 신뢰를 표시했다. 물론 과장된 장면이기는 하지만, 이는 두 군신의 관계가 그만큼 각별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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