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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 제29부에서 소멸된 ‘고려황실 잔존세력’의 수장 옥환과 책사 전판석.
 <대왕세종> 제29부에서 소멸된 ‘고려황실 잔존세력’의 수장 옥환과 책사 전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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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습격작전' 실패를 계기로 <대왕세종>의 한 축인 '고려황실 잔존세력'(반군)이 소멸되었다(4월 12일 제29부).

대궐에서 벌어진 최후 전투에서 반군측 내관인 전일지가 충녕대군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주인공의 목숨을 손아귀에 쥔 조연들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그 순간 전일지도 갑자기 감상적이 되면서 말이 많아지다가 엉뚱하게도 같은 편인 무비의 칼에 맞아 그 자신이 죽고 말았다.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 반군 수장인 옥환은 직접 궁을 찾아가 이방원 앞에서 패배를 인정한 뒤에 "허나 그대는 아직 군주가 아니외다!"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제 무장반군 세력이 소멸됨으로써, 태종 이방원에 이은 제4대 군주가 문치를 펼 수 있는 안정적인 바탕이 조성될 수 있게 되었다.

이상은 드라마 속의 내용이다.  ▲신(新)정치질서 수립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제1요소) ▲이전 ‘황실’ 잔존세력의 존재(제2요소) ▲건국과정과 무관한 ‘문약한’ 제2세대 후계자의 대두, 다시 말해 강력하고 경험 많은 후계자의 부재(제3요소).

이러한 요소들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왕세종>의 설정은 태종 이방원 시기와 상당 부분 부합하긴 하지만, 조선 초기보다는 아무래도 중국 주(周)나라 초기의 상황과 더 부합할 듯하다.

조선 초기에 무장한 ‘고려황실 잔존세력’이 실존했다는 사료상의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은 데 반해, 주나라 초기에는 무장한 ‘은(殷)나라 황실 잔존세력’이 실제로 정권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은나라는 상(商)나라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은나라 당시에는 ‘황제’니 ‘황실’이니 하는 개념들이 없었지만, 여기서는 당시의 상황을 <대왕세종>과 쉽게 비교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위에 언급한 제2요소의 경우에, 조선왕조가 직면한 도전은 재야 유림세력의 비토라고 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비록 칼을 들지는 않았지만 붓을 든 그들의 비토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일정 정도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제2요소를 이룬 것이 무인세력(주나라)이냐 문인세력(조선)이냐 하는 차이만 제외하면, 주나라 초기와 조선 초기에는 똑같이 위의 세 가지 요소가 모두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태종-세종 시기의 정치상황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주나라 초기의 정치현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이 글에서는 주나라 역사와 관련하여 중국측이 지난 2000년에 공포한 하·상·주 단대공정연표 상의 연대를 ‘잠정적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하·상·주 단대공정(세 시기의 역사에 대해 연도를 부여하기 위해 1996년에 시작한 작업)의 ‘정치성’에 대한 비판이 있긴 하지만, 구체적인 연도를 사용하지 않으면 역사학적 논의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반대 증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잠정적으로’ 이 연표를 사용하는 게 부득이하다고 생각한다.

북경 소재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 있는 주나라 코너.
 북경 소재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 있는 주나라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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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46년. 그때 무왕은 목야전투(牧野之戰)에서 은나라의 주왕을 무너뜨리고 ‘주나라 천하’를 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써 주나라의 기반이 확고해진 것은 아니었다. 은나라 출신 귀족들이 여전히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나라는 그들로부터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제1요소의 충족).

은나라 지지세력의 실력은 조선 초기 유림세력의 영향력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것이었다. 한나라 때 정현이 지은 <모시보>에 따르면, 이때에 무왕은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은나라의 옛 수도인 조가(朝歌)에 봉함으로써 은나라 유민들을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한편, <주서>나 <한서>에서는 무왕이 무경에게 준 땅이 은나라 수도가 아니라 왕기(王畿, 일종의 경기도 개념) 지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조가 지역 혹은 왕기지방 같은 핵심지역에서 공권력을 확보한 ‘은나라 황실 잔존세력’은 이로써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주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제2요소의 충족).

제1요소·제2요소의 충족에 이어, 얼마 안 있어 나머지 한 가지마저 충족되었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때로부터 불과 4년 만인 기원전 1042년에 무왕이 사망하고 나이 어린 성왕이 보위를 잇게 되었다. ‘은나라 황실 잔존세력’은 물론 주나라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도전세력이 나올 수 있는 상황 하에서, 어리고 경험 없는 군주가 등장함에 따라 주나라 왕실은 위기에 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제3요소의 충족).

여기서, 주나라 성왕과 조선 세종이 직면한 공통적인 문제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 모두 건국과정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제2세대 군주인데다가 즉위 당시에 부왕만큼의 카리스마가 없었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왕권을 안정시키기가 힘들었다는 점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조선왕조가 매우 안정적이고 세종 임금도 꽤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세종이 즉위할 때만 해도 조선이 건국된 지 26년밖에 되지 않았고 세종 자신도 별다른 카리스마가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세종이 얼마나 불안한 기반 위에서 보위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는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주나라 성왕은 세종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처럼 주나라 성왕과 조선 세종은 모두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별다른 경험도 없이 보위에 올랐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두 사람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 왕조 잔존세력이 칼을 들었느냐 붓을 들었느냐 하는 점이 있을 뿐이었다. 그럼,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주나라는 어떤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했을까?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아니나 다를까 주나라는 곧바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무왕의 동생들은 같은 형제인 주공(周公)이 섭정을 맡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이를 틈타 ‘은나라 황실 잔존세력’의 수장인 무경은 무왕의 동생들과 손을 잡고 동방의 부족들까지 끌어들여 주나라 타도를 위한 일대 전쟁에 나섰다. <상서>에 따르면, 이로 인해 주나라에서는 큰 소동과 불안감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주나라 시대의 전쟁에 사용된 창. 모양이 각각 다르다. 왼쪽부터 동모(銅矛)·동과(銅戈)·동극(銅戟). ‘모+과=극’이라는 공식을 외우면 세 가지가 쉽게 구분될 것이다.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 소재.
 주나라 시대의 전쟁에 사용된 창. 모양이 각각 다르다. 왼쪽부터 동모(銅矛)·동과(銅戈)·동극(銅戟). ‘모+과=극’이라는 공식을 외우면 세 가지가 쉽게 구분될 것이다.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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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주공은 조카와 왕조를 지키기 위해 1차적으로 주나라 귀족들의 단속에 나섰다. 뒤이어 동방을 향한 공격에 나선 그는 3년간의 전쟁 끝에 동방 부족들을 제압하고 반군 수장인 무경을 살해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주공은 반란에 가담한 자신의 아우인 관숙(管叔)을 죽이고 역시 아우들인 채숙(蔡叔)·곽숙(霍叔)을 유배 보내는 등의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뒤이어 주공은 정치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봉건제를 펴는 한편, 예악과 법도를 정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주나라의 지배력은 황화와 회하 유역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세종 시기에 국가제도가 정비되고 영토가 확장된 것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라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은나라 황실 잔존세력’의 위협에 직면한 주나라는 주공의 섭정이 성과를 거둠에 따라 내외의 도전을 물리치고 성왕의 왕권을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었다. 사심을 버리고 조카를 위해 헌신한 주공이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왕의 입장에서는 그런 든든한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이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태종 이방원은 자신에게는 그런 행운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1418년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국사에 개입하고 대마도 공격을 주도하는 등 나라 안팎에서 세종의 왕권을 위협할 만한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이 안정적으로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태종이 막판까지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희생’을 감수한 데에 기인한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건국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제2세대 군주인 세종의 왕권확립을 위해 주나라 주공의 역할을 수행한 태종 이방원.
 건국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제2세대 군주인 세종의 왕권확립을 위해 주나라 주공의 역할을 수행한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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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옛날 주공이 조카인 성왕에게 했던 일을 태종은 자기 아들 세종을 위해 직접 실천했다. 숙질관계냐 부자관계냐 하는 점만 빼면, 주공이 했던 일이나 태종이 했던 일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반대세력이 존재하는 신정치질서 수립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경험 없는 제2세대 군주의 왕권확립을 돕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공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왕의 경우에는 주공 같은 믿음직한 동생이 있었지만, 이방원에게는 그런 동생이나 친척이 없었다. 자기 손에 두 번씩이나 형제들의 피를 묻힌 이방원은 다른 누군가를 믿고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가 죽기까지 상왕으로서 세종의 왕권확립을 위해 애쓴 것은 ‘내가 직접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느 누가 충녕의 보좌를 지켜주겠는가?’라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직접 주공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중국왕조인 주나라와 한국왕조인 조선은 강력한 비토세력(무인세력 혹은 문인세력)이 존재하는 신정치질서 수립 초기에 경험 없는 제2세대 후계자의 대두로 인해 유사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유사한 상황 하에서 주나라에서는 믿음직한 삼촌인 주공이 어린 성왕을 도와 위기를 극복한 반면,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인해 믿음직한 삼촌이 존재할 수 없었던 조선에서는 왕위에서 물러난 이방원 자신이 직접 주공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태그:#대왕세종, #대왕 세종, #세종, #태종 , #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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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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