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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우리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큰 일이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편찬위원회에서 올 8월에 발간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친일인사 4776명의 명단을 발표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과거 식민지 시절 일제에 빌붙어 동족을 괴롭히며 자신의 안일과 영달을 꾀했던 반민족행위자들을 단죄하기는커녕 그들을 새 나라의 지배세력으로 앉힌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새 푸대를 썩은 술로 채운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오늘의 우리사회에 만연된 가치전도와 후안무치, 정신적 빈곤과 기회주의, 불법 수준의 도덕적 해이와 부패 등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친일파 명단발표의 역사적 의미는 그러기에 비록 당시에는 단죄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반민족행위를 역사의 기록으로나마 남겨 다시는 그런 자들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경종을 울리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나치에 부역한 반역자들에 대한 대숙청을 끝내고 “이제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프랑스를 배신하는 프랑스인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드골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친일파 명단은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역사의 기록'

 

그런데 우리나라의 최고지도자인 이명박 대통령이 어제 "우리가 일본도 용서하는데, 친일문제는 공과를 균형있게 봐야한다" "친일문제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봐야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 그것도 그 식민지배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아직 증언하며 투쟁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생존해있는 나라의 최고지도자의 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누가 일본을 용서한다고 하는가. 대통령이 일본 가서 혼자 그런 말을 한다고 일본의 죄과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며, 그런 말은 대통령이라고 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친일파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단죄하지 못한 친일파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 그 사실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의 선정에 있어서도 그들이 식민지 시절 어떤 행적을 보였으며 그것이 나라와 민족에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사료를 토대로  객관적이고 엄정한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지 그저 풍문으로 듣고 정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친일파가 공이 있다 하더라도, 그 공을 생각해서 민족문제연구소가 과를 감해주고, 그리하여 인명부에서 제외하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몫이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단지 나라의 참담했던 식민지 시절에 그가 반민족행위를 했는지 안 했는지, 했다면 그 구체적 사실이 무엇인지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다. 공이 있다고 그의 친일행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조사내용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부끄럽고 가벼운 역사인식

 

그리고 친일문제를 국민화합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친일청산 때문에 국민화합이 안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친일파의 후예들과 화합하라는 것인가. 

 

친일파를 우리나라가 단 한 번도 단 한 사람도 제대로 단죄한 적이 없고, 그들이 누렸던 권세와 영화 모두를 그 후손이 누림에 있어서 걸림돌이 있어본 적이 단 한번도 없고 여태 국민이 눈감아주고 살아온 이 사회에서 무슨 이유로 국민화합을 들먹이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재산을 빼앗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선대의 반민족행위 덕에 누리는 명예와 권력을 빼앗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 정도의 단죄도 단죄라고, 그 엄청난 죄를 저질러놓고도 당사자는 물론 누대로 떵떵거리며 살 것이 분명한데, 사전에 이름 올라가는 것이 못마땅해서 국민화합 운운하는 것인가.  이 대통령은 무엇이 못마땅하여, 누구를 위해 ‘국민화합’ 운운하는 것인가.

 

역사가 올바로 진행되었다면 친일파들은 해방후 바로 그들의 죄과에 따라 벌이 내려졌을 것이고, 그들의 재산과 공직·명예 등 모든 것이 몰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아마 지금 독립운동가들의 후손과 같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이런 저런 이유를 들이대며 반대하는 자들 중에는 친일파의 후손이 반드시 있다. 게다가 힘있는 자리에 있다. 그러니 그들이 떠드는 소리는 크고 시끄럽게 들린다. 마치 국민화합이 안 되는 것처럼. 

 

누구를 위해 '국민화합' 운운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 그런 얘기를 퍼뜨리는지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언론을 주목해야 한다. 친일파 중 언론을 소유한 자들이 있었고, 그 후손이 아직도 주류언론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가장 크다. 영향력도 크다. 그들은 진실도 가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선대에서 조국을 배신한 죄과로 얻은 장물로 부끄러움도 모르고 세상의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국민이 속아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아, 그러기에 반민특위를 해체한 죄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큰 죄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모든 악의 온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 정도의 역사적 단죄라도 해야 그나마 우리나라의 기틀이 이제라도 잡히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이제라도 전 국민에게, 그리고 전 세계에 선언하는 것이다.

 

일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는 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무덤속에 들어가도,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치른다는 추상같은 원칙을 이제야 비로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세우고 있음을. 그리하여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쩌다 다시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을 배신하는 한국인'이 다시는 나타나지 못 하게끔. 우리나라도 부끄럽지만 늦게, 이렇게나마 식민지배 청산을 시도했노라고. 

 

이제야 비로소 시작한 친일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단죄

 

지난 1943년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되기도 전부터 구상한 민족반역자 대숙청을 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몇 년에 걸쳐 가혹하게 추진했던 드골 대통령을 보면 당시 그런 최고지도자를 둔 프랑스가 참으로 부럽다. 오늘날 프랑스 국민이 저렇듯 자부심을 갖고 세계에서 당당히 활약할 수 있는 것도 나치에 부역한 반민족행위자들을 체로 쳐서 걸러내듯 가차없이 응징한 결과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제 이명박 대통령은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의 지도자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냈다. 옳지도 않고, 경박한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 이 나라의 최고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 나는 믿어지지 않는다. 

 

이 정권이 들어선 후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장·차관, 청와대 수석 등 그와 삶의 궤적을 공유하는 고위 공직자들의 이력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위장전입, 땅투기, 농지불법 소유, 탈세, 거짓말 등 대통령 뺨치는 악취나는 이력이. 그들 중에도 친일파의 후손이 있을 수도 있다. 선대의 반민족행위와 맞바꾼 장물로 좋은 교육받고, 높은 학력과 지식을 자랑하며 사회의 최상층부에 오른 친일파의 후손들. 우리는 반민족행위자 청산에 실패함으로써 뒤집혀진 세상의 그 증거를 지금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친일 반민족행위자 청산 실패의 증거와 MB 스트레스

 

그동안 이 정권이 출범할 때부터 인수위 시절의 그 난장판,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의 파렴치한 이력, 남북관계의 경색을 가져온 경박한 언행, 대미 대일 굴욕적 구걸외교, 광우병 위험 미국쇠고기의 졸속수입 결정 등등의 수많은 잘못을 지켜보는 것도 참기 어려운 스트레스였지만 이번 경우도 만만치 않다. 끝이 보이지 않는 MB 스트레스에 결정판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이제 본격적인 시작인가. 이제 단 두 달 지났을 뿐인데, 앞으로 남은 세월 어떻게 견뎌야 하나.

 

덧붙이는 글 | 여인철 기자는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을 지냈습니다.


태그:#친일인명사전, #이명박, #여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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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철 기자는 카이스트의 감사와 연구교수를 지냈습니다. 친일청산에 관심이 많아 오래 민족문제연구소 지부장을 지내고,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지금은 장준하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장준하부활시민연대'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출강하면서 '코칭으로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와 '에듀코칭'을 통한 학교교육 혁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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