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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야간중학교 운동을 펼쳤던 다카노 마사오 할아버지는, 당신한테 마음 조국이 되는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땅에 무슨 앞날이 있는가 느끼도록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 겉그림 일본에서 야간중학교 운동을 펼쳤던 다카노 마사오 할아버지는, 당신한테 마음 조국이 되는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땅에 무슨 앞날이 있는가 느끼도록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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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마음의 조국, 한국
- 글 : 다카노 마사오
- 옮긴이 : 편집부
- 펴낸곳 : 범우사(2002.7.15.)
- 책값 : 9000원

(1) 골목을 걸으면서

아침에 보건소로 찾아갑니다. 보건소에서 ‘아기 밴 어머니’한테 철분제를 준다고 해서 옆지기가 보건소로 전화해서 여쭈어 본 뒤 찾아갑니다. 전화를 마친 옆지기는 ‘지난겨울에 보건소에 찾아갔을 때에는 병원에서 임신증명서를 떼어 오라’고 하더니 이번에 전화하니 보건소 직원이 예전에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시치미를 뗀다며 성을 냅니다.

성을 낼 만합니다. 그때 우리는 동네에 있는 보건소 두 군데에 찾아갔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중구 보건소에 먼저 찾아갔더니 주소지가 동구로 되어 있으니 동구 보건소로 가라고 해서, 동구 왼쪽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보건소까지 퍽 먼거리를 걸어서 갔습니다(집부터 동구 보건소까지는 중구 보건소까지 가는 거리 세 곱).

그러니 동구 보건소 직원은 ‘보건소에서 해 주는 기초검사는 병원에서 먼저 진단을 받고 임신증명서를 떼 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중구 보건소 직원은, 우리가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낳으려 한다고 하니, 그러십니까 하고는 검사를 해 주려다가 주소지 때문에 그리로 가라고 했습니다. 크지도 않은 동네에서 멀찍이 떨어진 보건소까지 가라는 대목에서는 씁쓸했지만, 공무원들 일이 이렇구나 하고 느낄밖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 가다가 쓰러져 죽은 시체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 구두 등속을 털어가는 사람들. 나도, 그 무리 속에서 또 남은 찌꺼기를 털며 살아왔다. 불타버린 벌판의 패전국이 되어버린 일본. 규슈 하카다의 암시장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꽁초를 피우고 필로폰을 맞고 나이프칼을 휘두르며 들개처럼 굶주림을 면해 온 슬프고 쓰라린, 그러나 죽고 싶다거나,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이름은?” “다카노 마사오.” “써 봐.” “쓸 줄 몰라.” “장난치지 마!” 느닷없이 걷어차며 마구 때린다 ..  (19쪽)

철분제를 받은 옆지기가 보건소를 나오면서, 보건소 직원이 준 책을 넘깁니다. 무언가를 골똘히 찾습니다. 펼친 자리를 가만히 읽습니다. 뭘 그리 읽나, 집에 가서 읽지 했는데, 안에서 그 직원한테 ‘아이 밴 달수에 견주어 배가 더 나온 듯한데 왜 그러한가?’ 하고 물었을 때 아무 대답을 못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준 책(보건소에서 만들어서 나누어 주는 책)에는 이 물음에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 비자연장과 외국인등록증 수속, 재학증명서, 은행잔고 증명서, 신원보증서, 사진 2장, 수수료 합계 6만 원. 축산대학의 교환유학생인 요시노 씨의 수속은 3분 정도로 끝났는데 나에게는 “부모는? 직업은? 목적은?” 하며 집요하게 묻는다. 그것도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구 만주에서 돌아온 전쟁고아로서 재일조선인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할아버지의 모국어를 배우고 싶은 염원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그런 나이로 이제 와 공부해서 뭘 하려고? 그런데 부모는 무엇을 하고 있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끝이 없으니 나는 화가 칠밀어 …… 공무원의 거만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 들어갈 때, 수강증을 보여주어도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데 말을 못하기 때문에 “나는 일본인이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일본어로 말하니까 겨우 통과시켜 주었다. 학교 정문에서도 경비원의 제지를 받는다. 차림새로 판단하지 말라! 교수님들에게는 꼬박꼬박 인사하면서! ..  (38∼39,41쪽)

생각해 보면, 만화 <달려라 하니>가 살던 옥탑방은, 이와 비슷한 건물 옥상에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 화수아파트 생각해 보면, 만화 <달려라 하니>가 살던 옥탑방은, 이와 비슷한 건물 옥상에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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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날 찌뿌둥하고 바람 또한 세게 불며 쌀쌀해졌던 날씨와는 달리 오늘 하루는 따뜻합니다. 따사로운 햇볕을 느끼며 천천히 걷습니다. 만석동을 지나 화수동을 걷습니다. 다섯 층이 안 되는 네 층짜리 화수아파트가 보입니다.

아까 보건소로 오던 길에 옆지기는 “꼭 하니가 살던 아파트 같다.”고 했습니다. 으잉? 뭔 소리여? 했더니, 만화 <달려라 하니>에 나오는 ‘하니’가 살던 옥탑방 같은 느낌이랍니다. 그런가? 하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봅니다. 음, 어쩌면. 어쩌면 그럴는지도.

그러고 보면, 이제 만화영화 ‘하니’가 살던 옥탑방 같은 집은 거의 다 사라지지 않았는가? 전국에 그와 비슷한 집이 얼마나 남았을까? 돈도 절도 집도 피붙이도 없이 외로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겨우 깃들일 만한 값싸고 조그마한 집은, 그러면서도 마당이 조촐하니 있는 집은 어디에 있을까? 나중에 <달려라 하니>를 영화로 만든다고 할 때에는 옥탑방 있는 집이 죄 없어진 다음이 될 텐데, 그때 옥탑방 집을 억지로 새로 만든다고 큰돈 들이고 법석이지 않을까? 그런데 옥탑방을 새로 지을 만한 자료는 어디에서 얻을까?

.. 대학제 준비가 여기저기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지난 세월 반권력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던 서울대학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때 당시의 학생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확인하고 싶다 ..  (76쪽)

부동산 앞을 지나갑니다. 세거리 골목길을 나누는 모서리에 자리한 부동산. 이름은 부동산인데, 가게 앞과 안쪽까지 꽃그릇이 가득합니다. 간판이 없다면 이곳은 꽃집으로 알지 부동산집으로는 안 알겠구나 싶습니다. 화평동 냉면거리 들머리에 섭니다. 이 길을 지나갈 때마다 ‘손님 끌어들이기’에 바쁜 목소리에 시달리기 싫어서 고단합니다. 그렇다고 이 길을 안 지나가며 빙 돌아가기도 싫고.

맛있으면 스스로 찾아가서 먹지 않겠나, 먹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찾아가면 그만 아닌가 싶지만, 우리나라 어느 관광지를 가도 손님 잡아당기는 목소리 그득합니다. 지난겨울에 자전거 타고 소래와 오이도에 갔다가 아주 질려서 다시는 가기 싫어졌습니다.

.. 최근, 야간중학생이라는 것, 졸업생이라는 것을 감추는 학생이 점점 늘어나고 있따고 들었다. 배운다는 것을 왜 수치스럽게 생각하는가. 글자와 말을 빼앗긴 우리들의 서러움과 고통과 분노와 분함. 그리고 배운다는 것. 산다는 것의 진실한 의미와 감동을 필사적으로 되찾은 우리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  (82∼83쪽)

가게 앞에도 꽃그릇을 잔뜩 내어놓은 이 부동산에 길을 물으러 들어갔다가, 가게 안쪽 촘촘히 꽃그릇을 놓은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부동산이기도 하지만,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 아닐까 싶어요.
▲ 꽃집 같은 부동산 가게 앞에도 꽃그릇을 잔뜩 내어놓은 이 부동산에 길을 물으러 들어갔다가, 가게 안쪽 촘촘히 꽃그릇을 놓은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부동산이기도 하지만,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 아닐까 싶어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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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로 가자고 생각하다가 마침 화수시장이 보여서, 시장에 가서 찬거리를 장만하기로 합니다. 들머리가 조그마한 화수시장으로 들어섭니다. 안쪽이 많이 어둡습니다. 장사하지 않는 자리가 제법 많습니다. 오늘은 쉬는 날인지 모릅니다. 한 바퀴 빙 둘러보다가 ‘고무신 집’이 한 곳 보입니다. 오, 고무신 집? 참말 고무신 파는 집인가? 가게 앞에서 두리번두리번하니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

“뭐 찾아요?”
“네, 고무신 까만 녀석 있어요?”
“네, 몇 문이에요?”
“이백칠십이요.”

흰고무신과 보라고무신은 어느 저잣거리에서도 팔지만 검정고무신은 파는 곳이 몹시 드뭅니다. 도시에서 고무신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을 터이니, 고무신 장사를 안 할 테지요. 신는 사람만 있다면 무슨 신이든 안 팔겠습니까. 시골 신집이나 오일장을 찾아가야 할 텐데 하며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습니다. 지금 신고 있는 고무신이 거의 닳아 바닥에 구멍이 날 판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곳 화수시장에 고무신 가게가 예전 간판 그대로 걸어놓고 있다 함은, 요 둘레 동네에서는 검정고무신을 찾는 사람이 쏠쏠히 있다는 소리일까요.

문제는 값. 설마 도시라고 한 켤레에 만 원을 부르지는 않겠지? 뒷주머니에 넣고 있던 오천 원짜리를 꺼내어 내밉니다. 거스름돈을 안 주십니다. 헛. 오천 원이라고?

“아저씨, 검정고무신은 삼천 원이잖아요, 털신하고 보라고무신이 오천 원이고요” 하고 대꾸를 할까 하다가 그만둡니다. 시골까지 검정고무신 사러 가자면 찻삯에다가 시간에다가 품에다가 만만치 않게 드니까, 그 값을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동네 저잣거리 한켠에 고무신 집 간판을 그대로 살려놓고 있는 보람을 이천 원으로 값해 드려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 예배가 끝난 후에 두 사람과 헤어져 여성들의 희망에 따라 젊음의 거리인 이화대학 거리에서 쇼핑하는 데 동행했다. 하라주쿠를 연상시키는 골목길에 넘쳐나는 젊은이들과 거리 양쪽으로 빽빽이 들어선 패션가게들. 이상하게도 구두점이 많은 것은 왜일까? 음악이 아니라 소음으로 위협해 와 다시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저 젊은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한국의 재생은 가능할 것인가? ..  (107쪽)

빈터에 마련한 텃밭. 저잣거리에 내다 팔 만큼 넉넉하게 심은 푸성귀입니다. 골목길에서는 이러한 텃밭 일구기를 할 수 있습니다.
▲ 빈터 텃밭 빈터에 마련한 텃밭. 저잣거리에 내다 팔 만큼 넉넉하게 심은 푸성귀입니다. 골목길에서는 이러한 텃밭 일구기를 할 수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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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시장을 나옵니다. 튀김닭집이 세 군데 잇닿아 있는 골목으로 접어듭니다. 차가 들어오지 않는 호젓한 골목길입니다.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집을 허물고 난 빈자리에 남은 흙을 일구어서 마련한 텃밭이 있습니다. 빼곡하게 심어 놓은 푸성귀 텃밭이 있는 골목에서 잠깐 발걸음을 멈춥니다. 배추흰나비가 팔랑거리며 날아다닙니다. 골목집 아저씨 한 분이 당신 집 앞 길가에 한 줄로 이어놓은 푸성귀 그릇을 손질합니다. 이 건너편으로도 옛 집터에 가꾼 텃밭이 있습니다. 텃밭은 아주 야무지게 손질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곳 화평동 골목집 할매와 할배 손길을 탔으리라 봅니다.

..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  (216쪽)

“우리, 박정희 할머님 댁에 들렀다 가요.” 옆지기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마, 하고 대꾸하며 골목길 바깥으로 나옵니다. 저쪽 골목길로 극작가 함세덕 선생 옛집이 바라다보입니다. ‘함세덕’이라는 분이 어떤 극을 썼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뚜렷이 모릅니다. 다만, 한국전쟁 때 인민군 편에 있다가 죽었다는 마지막 이야기만 얼핏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때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안 살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남녘에서도 모르고, 북녘에서는 알까 모를 일입니다. 그저, 함세덕 선생이 살았던 옛집이 바로 이곳, 인천 동구 화평동, 이른바 ‘냉면골목’이라는 새이름이 붙은 자리 안쪽에 조용히 깃들어 있음은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분 옛집은 ‘생가 복원’ 계획도 없이 묻혀져 있는 한편,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운명입니다.

전국을 휩쓰는 재개발(뉴타운) 바람과 맞물려, 이 동네도 재개발로 싹 쓸어버리면, 그나마 터라도 남아 있고 옛 기와집 자취가 고스란히 있는 함세덕 선생 옛집을 비롯한 모든 근현대 유적지와 서민 살림집 원형은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될 뿐입니다.

(2) 그림할머니와 만나고

‘그림할머니’ 박정희 님 일터인 '평안수채화의 집' 앞에 섭니다. 수채화집 유리문에 종이 한 장 붙어 있습니다. 종이에는 박정희 할머님 연락처가 손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안 계신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문에 적힌 또다른 손글씨인 ‘미세요’대로 문을 밉니다. 열립니다. 안쪽에 있는 덧문에는 ‘돌려서 미세요’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말을 따르며 돌려서 밉니다. 열립니다. 문에 걸린 딸랑이가 딸랑딸랑 울립니다. 조금 뒤 안쪽에서 “누구 오셨어요?”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네!” 하고 길게 대꾸하면서 안쪽 방으로 들어갑니다.

할머님이 쓴 "미세요"를 붙인 문.
▲ 손글씨 할머님이 쓴 "미세요"를 붙인 문.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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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 방에는 그림을 배우는 할머니와 아주머니 들 해서 모두 다섯 분이 앉아 있습니다. 네 분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박정희 할머님은 그림 그리는 분들 사이에 앉아 계십니다. 얕은 찻상을 팔걸이로 삼고 앉아 계십니다.

..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은 도태된다. 참으로 필연과의 투쟁이다. 왜 나는 서울에 와 있는가? 왜 한국어를 배우는가? 글을 안다는 것(배운다는 것),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것 등의 차원이 아니다. 유학생활에 익숙해진 젊은 여성들은 유창한 영어로 서슴없이 질문하므로 필요 이상으로 분통이 터지고 주눅이 든다. 영어를 배울 거면 뉴욕에 가야지, 영어 같은 건 쓰지 말라. 다 한국어로 하라고 외치고 싶지만 말이 안 나오는 이중의 안타까움! ..  (31쪽)

옆지기는 ‘여기서 그림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하고 여쭙니다. 할머님은, “내가, 그림 그린다면서 여기 와서 궁둥이 붙이고 앉아 있는 사람한테 달마다 5만원씩 받고 살아.” 하고 말씀합니다. “월요일에 아침 열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그리는데, 도시락까지 싸 와서 맛있게 먹어” 하고 덧붙입니다.

올해로 여든여섯이 된 박정희 할머님은, 우리가 묻지 않은 이야기를 줄줄줄 늘어놓으십니다. ‘서방님(옆에 앉아서 그림 그리는 분들이 ‘서방’이 아닌 ‘영감’이라며 말을 고쳐 줍니다)’하고 예순두 해를 같이 살았는데 먼저 떠나버리니 가슴이 허전한데도 당신은 아이들을 이끌고 수채화 그린다면서 돌아다니고 있더라고.

젊어서는 살림하느라고 집 바깥에를 못 나가고, 이제는 늙어서 몸이 성하지 않으니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그제는 어느 분이 강화에 같이 가자고 하면서 차로 데려다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하도 기쁘고 좋아서 밤새 잠이 안 오셨다고, 그래서 새벽 세 시부터 잠을 못 자고 기다렸다고, 그렇게 하고 차를 얻어타고 강화에 가서 하루 내 그림을 그리다가 저녁에 돌아왔는데, 집 앞에서 내리고 보니 몸이 아주 녹초가 되어서 걷지도 못하고 네 발로 기어서 엉금엉금 집에 겨우 들어와서 누웠다고. 이제는 누가 집 앞으로 자동차를 끌고 와서 태워서 나들이를 시켜 주지 않으면 다니지 못한다고.

옆지기한테 아이가 있느냐고 묻다가, 배속에 아기가 있다고 하니, “철이 다 난 다음에 애를 낳는 것도 기뻐요” 하면서 손뼉까지 치며 기뻐해 줍니다. 할머님이 딸만 줄줄 낳은 이야기를 하니, 옆에 있던 할머니가, 딸은 가게 갈 때 같이 가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는데, 아들이나 며느리하고는 아무것도 안 된다면서, 딸이 참 좋다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 내가 배우고 있는 한국어 교과서도 한국어와 영어의 설명만 있는 것이다. 하물며 시험에도 영어의 설명이 있다 ..  (73쪽)

얘기를 들으면서 벽에 차곡차곡 붙여놓거나 그림틀에 담아 놓은 그림 들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할머님이 낸 책 두 권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볼 때와, 이렇게 두 눈으로 볼 때하고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할머님은 벽에다가 흰테이프로 그림을 착착 붙여놓기도 합니다. 누가 보면, ‘작품에다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아요?’ 할 성 싶기도 하지만, 더없이 할머님다운 그림걸이가 아니랴 싶습니다.

예전에는 병원이었던 곳. 할아버지가 의사 일을 그만둔 뒤로는 수채화 집으로 고쳐서 쓰는 곳. 할머님 보금자리이며 일터이고, 동네 사람들 그림 배우는 집입니다.
▲ 평안수채화의 집 예전에는 병원이었던 곳. 할아버지가 의사 일을 그만둔 뒤로는 수채화 집으로 고쳐서 쓰는 곳. 할머님 보금자리이며 일터이고, 동네 사람들 그림 배우는 집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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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가 찍은 사진을 빨래집게로 집어서 빨랫줄에 착착 걸어놓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누런테이프로 해서 벽이나 문에 붙여놓곤 했습니다. 떠올려보니, 예전 우리 집에 놀러오시는 분들이 ‘작품에다가 테이프를 그렇게 붙여놓으면 어떡해요?’ 하고 물었구나 싶습니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작품으로 여기면 작품이지만, 작품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나 스스로 즐기고 싶고, 내 이웃하고 더욱 가까이 즐기고 싶어서 이렇게 붙여놓습니다. 언제라도 스스럼없이 즐기고, 언제라도 떼어낼 수 있습니다. 다음 그림이나 사진이 나오면 다음 그림이나 사진을 붙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이나 사진은 누구한테라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습니다. 어디 돈을 바라는 사회단체가 있다면 잘 여미어서 그림틀이나 사진틀에 담아서 알맞는 값을 받고 팔아서, 그림이나 사진 판 값을 모두 바치기도 합니다.

.. 암기할 수밖에 없다, 라고 선생님과 동급생들이 입을 모아 말하지만, 나는 그런 방법을 써 오지 않았었다. 암기는 하지 말라, 아무리 하더라도 사전에는 이기지 못한다. 만물박사는 되지 말라, 너희들이 만물박사가 된다 하더라도 백과사전에는 이기지 못한다. 너희는 왜 야간중학에 왔는가? 왜라는 의문에 매달릴 때 그것이 너희들에게는 진짜 공부이다 ..  (81쪽)

박정희 할머님이 그리는 수채그림을 ‘미술사’라는 테두리로 보면 어떤 대접을 받을까 하는 데로 생각이 이어집니다. 글쎄요, 우리 나라 미술 역사에서 수채그림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는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어떤 사람들 어떤 그림이 들어가 있을는지.

역사에 담는 그림은 무엇이며 역사로 다루는 그림은 무엇일는지. 미술평론가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보면서 글을 쓰고 논문을 쓰고 책을 쓰는지. 신문이나 방송에서 알리는 그림잔치 소식은, 어떤 그림을 그린 사람들 소식을 알리는지.

.. 선생님께서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은 텔레비전, 돈, 연인, 꽃이라는 등의 대답이었지만, 나는 “꿈을 주세요”라고 큰소리로 대답하자, 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놀라 숨을 들이켰다 ..  (91쪽)

할머님은 옆지기보고 “그러면, 지금 한 장 그리고 가지?” 하고 묻습니다.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다른 아주머니들도, “그래요, 지금 그리고 가요?” 하고 묻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아침밥도 안 먹은 몸. 그리고 제 몸은 몹시 안 좋습니다. 지난주부터 앓는 몸살이 아직 다 안 떨어졌습니다. 입술과 코가 부르트고 입안이 다 헐고 부어서 말하기도 힘들고 숨쉬기도 벅찹니다.

다음주부터 와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몇 번 거듭 말씀을 드리며 자리를 물러나옵니다. 옆지기는 나보고도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하는데, 어찌해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그림을 그리고픈 마음도 있으나, 그러자면 십만원인데. 요즘 우리 형편에 오만원까지는 더 치를 수 있다지만 십만원이라면.

그러나 여든여섯 그림할머님한테 그림을 배울 수 있는 나날도 앞으로 얼마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때는 기다리지 않는 법이라고, 언제 찾아오는지 알 수 없는 법이라고, 왔는지 모르고 지나치다가는 그예 돌이킬 수 없게 되는 법이라고, 나중에 돈이 조금 넉넉해져서 그림을 그릴 틈이 주어진다고 할 때에는 그림할머니가 이 세상 분이 아닐 수 있어요. 그때 가서 아이고, 저번에 그림 배우자고 할 때 배울걸, 하고 땅을 친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 1일 1과, 소화해 가는 수업은 선생님도 허탈하겠지만 우리 쪽은 더욱 허탈하고 비참하다. 배운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의 원점을 확신하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왔는데, 이 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  (93쪽)

우리들 나들이는, 동네를 느끼는 마실이기도 합니다. 동네 골목길 한켠에 널려 있는 빨래도 구경하고, 꽃도 구경하고, 사람들하고 만나 인사도 나눕니다.
▲ 골목길 빨래 우리들 나들이는, 동네를 느끼는 마실이기도 합니다. 동네 골목길 한켠에 널려 있는 빨래도 구경하고, 꽃도 구경하고, 사람들하고 만나 인사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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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송림초등학교 앞에서 이삼학년 쯤으로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계집아이 것으로 보이는 신발 한 짝을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다가 하늘 높이 집어던졌다가 발로 찼다가 하면서 천천히 걷습니다. 아이 옆으로는 윤선생영어교실 사람들이 어깨띠를 두른 채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구스르는 일’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찰 한 사람이 지나갑니다. 파란 조끼를 입은 공공근로 아저씨 두 분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 사람도 아이가 신발 한 켤레를 패대기치고 던지고 밟고 차고 하는 짓을 말리지 않습니다. 슬쩍 한 번 보았다가 지나갑니다. 우리 둘이 아이 바로 뒤까지 걸어갑니다. “어이?” 하고 아이를 부릅니다. “네?” 하고 뒤돌아보는 아이한테, “네 신발은 아닌 듯한데 이렇게 던지고 차고 하니?”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너희 반 여자아이 것은 아니고?” “아니오, 떨어져 있던 거 주웠어요.”

아이를 타일러서 보냅니다. 옆지기와 함께 초등학교 앞으로 돌아와서 문간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습니다. 아까는 아이 하는 짓을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그제야 다가와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웃는 낯으로 이러쿵저러쿵 대꾸해 주었지만.

고1 때까지 쓰던 파레트, 물감, 탁구채, 미술학원(1981) 다닐 때 받은 상패 들...
▲ 옛 물건 고1 때까지 쓰던 파레트, 물감, 탁구채, 미술학원(1981) 다닐 때 받은 상패 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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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미자 씨의 안내로 국립도서관에 갔다. 이 건물은 전두환 대통령 시대에 일본에 조사원을 보내어 그것을 참고로 건축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넓은 부지에 8층 건물의 초근대적인 도서관으로, 인터넷실, 컴퓨터실, VTR, CD, 신문열람실, 별관의 식당 등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러나 이곳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의 사람일 듯 싶다. 09:00시부터 17:00까지가 개관시간이고, 오늘도 학생 중심의 젊은이들밖에 없었다. 특히 지방 사람들에게는 전혀 인연이 없는 시설이다 ..  (147쪽)

집으로 돌아옵니다. 한쪽에 쌓아 놓은 상자더미를 뒤적거립니다. 영화잡지를 오려서 겉에 붙여놓은 상자 하나를 꺼냅니다. 끈이 옥매듭으로 되어 있어 가위로 끊습니다. 안을 열어 유치원 때 받은 상패와 사진을 꺼내고, 거의 서른 해가 묵은 주판을 꺼냅니다. 어릴 적 형하고 놀던 탁구채와 탁구그물을 꺼냅니다. 탬버린을 꺼냅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쓰던 스케치북을 꺼냅니다. 형이 고등학생 때 쓰던 학교 허리띠를 꺼냅니다. 42인치짜리라 그런지 참 깁니다. 고등학교 교련옷 바지가 한 벌 나옵니다. 우표 담은 상자가 하나 있고, 수류탄 모형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1991) 동인천 대동화방에서 퍽 비싼 값을 치르고 샀던 그림물감이 하나 나오고, 국민학생 때 형한테 물려받아서 쓰던 벼루도 하나 나옵니다. 붓도 한 묶음 있으나 털이 다 빠져서 못 씁니다. 파레트도 있습니다만, 파레트를 마지막으로 쓰고 난 뒤 씻어 놓지 않아서 녹이 다 슬고 못 쓰겠군요. 그렇지만 그림물감 하나는 아직도 쓸 만합니다. 열일곱 해를 묵은 그림물감이란 말이지? 후후.

(3) 한국말 배우는 일본 할아버지와 <마음의 조국, 한국>

<마음의 조국, 한국>을 세 번째 읽고 덮습니다. 이제는 책꽂이에 고이 모셔 놓으려 합니다. 다카노 마사오 할아버지. 1939년에 만주에서 태어난 할아버지는 만주땅에서 아버지를 잃고(전쟁으로 죽음), 어머니하고는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헤어져서 끝내 못 만납니다. 어린 나이부터 홀몸이 되어 길거리에서 양아치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길에서 굶은 데다가 꽁꽁 얼어붙어 죽을 뻔했는데, 넝마주이로 있던 재일조선인 한 분이 마사오 씨를 거두어들여서 살려냅니다. 이때 스무 살짜리 철부지 양아치 마사오는 처음으로 ‘세상에도 빛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고, 자기 이름은 있어도 자기 이름을 한 글자도 쓸 줄 모르던 어두움에서 깨어납니다. 스무 살에 야간중학교에 들어가 스물네 살에 마치면서, 일본땅에서도 ‘글 한 줄 모르며 살아가는 아주머니와 아저씨와 할머니’가 몹시 많음을 처음 알게 됩니다.

.. 스무 살에 도쿄의 아라카와 구중 야간학급에 가입학. 일본인이 되기 위해 호적을 만들고 야간중학생이 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학교 책상에 앉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차별없는 사회를 알았다. 일본에 헌법이 있다는 것을, 아동헌장이, 교육기본법이, 학교교육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살 권리’와 ‘배울 권리’를 빼앗아 가는 놈들은 누구 하나 지탄받지 않고, 빼앗긴 우리가 왜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는가. 한 장의 종이쪼가리로 ..  (20∼21쪽)

철부지 양아치한테 빛을 베풀어 준 넝마주이 할아버지는 어느 날 아침 싸늘한 주검이 됩니다. 공무원들은 넝마주이 할아버지 주검을 쓰레기 치우듯 갖다 버립니다. 젊은 마사오가 할 수 있던 일은 오로지 주먹을 부르르 떨고 이를 덜덜 갈기. 그렇지만 이때 일을 잊지 않습니다. 마음에 새깁니다.

어느새 자신을 거두어 준 넝마주이 할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된 마사오 씨. 자기 앞으로 남은 삶을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며 어떤 사람으로 보내야 하는가를 놓고 몹시 머리앓이를 합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가기로 합니다. 한국으로 가서 한국말을 배우기로 합니다.

다카노 마사오 할아버지가 쓴 또다른 책, <무기가 되는 글자와 말>입니다. 지난날에는 '사람생각'에서 나왔고, 지금은 '범우사'로 옮겨서 새로 나옵니다.
▲ 겉그림 다카노 마사오 할아버지가 쓴 또다른 책, <무기가 되는 글자와 말>입니다. 지난날에는 '사람생각'에서 나왔고, 지금은 '범우사'로 옮겨서 새로 나옵니다.
ⓒ 사람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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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은 어디입니까?”라고 흔히 질문을 받는다. 다른 나라 학생은 바로 자기 나라의 명소를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는 야간중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로 나타낼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도쿄의 ‘긴자’라고 말하는 자기 자신이 서글펐다 ..  (86쪽)

1998년에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와 봉천동 어머니학교에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해마다 틈을 내어 한국에 찾아옵니다. 지난 2007년 5월에도 한국을 찾아왔습니다. 마사오 할아버지는 한국에 와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찾아가서 할머님들을 뵙습니다.

인사동 한쪽 귀퉁이에 자리를 마련해서 ‘인간선언’ 네 글자를 새긴 옷을 입고 글을 대자보 비슷하게 써붙이면서 당신이 쓴 책을 손수 팝니다. 책을 팔면서 한국사람들하고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젊은 사람한테는 젊은 넋이 무엇인가를 귀기울여 들으려고 하고, 나이든 사람한테는 나이든 사람 얼이 무엇인가를 귀담아서 들으려고 합니다.

.. 거리에서 익히는 말은 살아 있어 빛이 난다 ..  (209쪽)

어쩌면 올해 5월에도 다시 한국을 찾아올는지 모릅니다. 벌써 4월에 한국을 찾아와서 길거리에서 한국을 느끼고 한국사람을 만나셨는지 모릅니다. 마사오 할아버지는 “거리에서 익히는 말은 살아 있어 빛이 난다”고 했는데, 올 2008년 한국사람들 말도 살아 있다고 느끼실까요. 당신한테 ‘마음 조국’인 한국은, 당신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베풀어 주고 있는가요.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책+헌책방+우리 말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조국, 한국

다카노 마사오 지음, 범우사 편집부 옮김, 범우사(2002)


태그:#책읽기가 즐겁다, #책읽기, #다카노 마사오, #야간중학,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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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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