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해외에 한국드라마 열풍을 일으킨 <겨울연가>. 한국에는 유난히 눈물 쏙 빼는 멜로 드라마가 많다.
 해외에 한국드라마 열풍을 일으킨 <겨울연가>. 한국에는 유난히 눈물 쏙 빼는 멜로 드라마가 많다.
ⓒ KBS

관련사진보기



한국 드라마는 온통 사랑 이야기다. 어떤 장르를 표방하고 시작하든 결국은 모두 연애담이 되어버린다. 그것도 대개는 상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적인 사랑 이야기. 왜 그럴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다.

그중 하나는 정치적인 소재를 금기시했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보수적 정치 환경 속에서 멜로물이라는 '안전한' 선택을 한 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졌다는 주장이다. 합리적이고 타당한 설명인 것 같다. 하지만 눈물을 빼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인이 '동양의 이탈리아인'이어서 특별히 낭만적인 사랑을 즐긴다는 주장을 내놓는 이도 있다. 정말 그럴까? 텔레비전과 극장 화면을 채우는 무수한 사랑 이야기들은 한국인의 마음을 지배하는 낭만적 애정관의 반영일까?

오히려 정반대인 것 같다. 우리들의 현실에 낭만적인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상의 공간 속에서나마 그것을 누려보려는 것이 아닐까? 드라마의 남녀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지만, 한국적 현실에서 '애정'은 남녀가 결합하는 데 있어 가장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던가.

집안, 학벌, 지위, 재산, 출신지, 거주지역 등이 별 탈 없어야 비로소 애정은 빈약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물론 양가의 가족들이 '관상'이나 '궁합'(또는 키나 혈액형)으로 시비를 걸지 않을 경우 말이다. 사실상 모든 결혼이 정략결혼인 한국 사회에서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사랑은 드라마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탈일 뿐이다.

그리하여 애정만 빼고 모든 조건을 갖춘 완벽한 결합을 한(또는 할) 커플들은 텔레비전 속에서 그 달콤한 일탈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린다. 사람은 언제나 잃어버린 사랑만 그리워하는 법이므로.

<겨울연가>와 <섹스 앤 더 시티>

미국인들은 애정 문제에 있어서 부모와 가족의 간섭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미국인들은 애정 문제에 있어서 부모와 가족의 간섭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 강인규

관련사진보기



한 미국인 친구는 <겨울연가>를 보고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주로 보던 드라마는 <과학수사대 CSI>나 <섹스 앤 더 시티>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드라마에서 전혀 다른 남녀관계를 발견해 내고는 '한국인은 <겨울연가>처럼 사랑에 진지하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미국인들의 사랑은 <섹스 앤 더 시티>처럼 코믹하냐'고 되물었다.

미국의 드라마에서 진지한 로맨스를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한국에 비해 애정의 장애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이 '가족간의 결합'이라는 점은 어느 사회나 비슷하지만, 가족 구성원간의 유대가 한국보다 느슨한 미국에서는 부모, 형제, 또는 자식이 자신 이외의 애정관계에 발언권을 갖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한국에서는 자식들이 애인을 집에 데리고 와 정성스레 인사를 시키고 나면 부모들의 '선고'를 기다려야 한다. 이에 반해 미국 부모들은 '통고'라도 받으면 다행이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마지막으로 본 자식이 낯선 남자나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서 "우리 약혼했어요(We're engaged)"라고 말하는 것은 미국 부모들이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미국인들도 집에 애인을 데리고 와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경우가 많지만,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음식을 씹어 (때로는 힘겹게) 목 뒤로 넘기는 것뿐이다. 부모의 간섭이 적다는 것이 부러운 일일 수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가의 지불을 필요로 한다. 미국의 자식들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대신, 부모로부터 훨씬 적은 혜택을 누린다.

인간은 영장류 가운데 부모로부터 가장 늦게 독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인은 평균적인 미국인보다 훨씬 늦게 독립한다. 대학원 학비까지 부모가 대주고, 서른이 넘은 자식을 결혼 전까지 부모가 데리고 사는 영장류는 오직 한반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쫓아내거나 집세를 받는 대신 자식들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다.

동거, 결혼을 대체하기 시작하다

미국 결혼식의 모습. 결혼하는 미국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동거를 거친다. 과거에 동거는 결혼을 대비한 예비과정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나, 이제 결혼을 대체하는 형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 결혼식의 모습. 결혼하는 미국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동거를 거친다. 과거에 동거는 결혼을 대비한 예비과정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나, 이제 결혼을 대체하는 형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 강인규

관련사진보기



미국의 자식이 부모에게 예비 배우자를 '통보'했다면,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은 이미 2년 이상 동거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 '동거'라는 말은 기묘한 위기감을 불러오는 윤리적 담론으로서 존재한다. 수십 년 전에는 미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거(cohabitation)'는 '방탕한 삶(living in sin)'으로 불리며 도덕주의자들의 위기의식을 한껏 고조시키곤 했다.

그러나 이제 미국에서 동거는 결혼을 앞둔 남녀가 거치는 일상적인 통과의례가 되었다. 미국의 이혼률이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20년 통계를 보면 이혼률이 낮아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혼 자체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2005년 결혼실태>라는 연례보고서는 지난 30년간 미국인들이 결혼하는 비율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세기 미국 주정부가 발행하던 결혼인증서. 미국에서 결혼은 계속해서 줄고 있다. 지난 30년간 결혼하는 커플의 비율은 절반이나 줄어든 상태다.
 19세기 미국 주정부가 발행하던 결혼인증서. 미국에서 결혼은 계속해서 줄고 있다. 지난 30년간 결혼하는 커플의 비율은 절반이나 줄어든 상태다.
ⓒ Wikimedia Commons

관련사진보기


2005년 7월 18일자 <유에스에이 투데이>는 "과거에는 결혼했다가 이혼할 커플들이 아예 결혼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동거가 결혼과 연애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의 인구통계는 1000만명 이상의 남녀가 동거하는 것으로 집계하고 있는데, 이것은 남녀가 짝을 이룬 전체 가구의 8%에 달하는 수다. 수도인 워싱턴 디시에서 동거커플이 차지하는 비율은 13.5%로 미국에서 가장 높다.

동거커플은 보통 평균 2년을 함께 산 후 결혼할 것인지 헤어질 것인지, 아니면 계속 동거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동거관계의 남녀 가운데 절반 정도가 결혼하고, 30퍼센트가 결별하며, 나머지 20퍼센트 정도가 동거를 계속한다고 한다.

미국 내에서 동거엔 결혼이라는 공식적 관계에 들어서기 전 상대방을 관찰하는 '시험기간'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동거커플의 절반 가까이가 헤어지고, 주거비 절약 등 경제적 이점 때문에 동거를 택하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동거는 이제 독립적인 관계의 한 형태가 되고 있다.

젊은 세대가 동거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동거 관계 증가세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젊은이들을 위한 관계지침서 <동거를 택할 것인가?(Should We Live Together?)>에 따르면, 미국 고등학교 3학년 가운데 66퍼센트의 남학생과 61퍼센트의 여학생이 "결혼 전 동거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대답했다.

여전히 남은 문제점들

결혼식장에서 포즈를 취하는 신부의 모습. 미국에서도 남녀의 평균 초혼연령은 계속 늘고 있다.
 결혼식장에서 포즈를 취하는 신부의 모습. 미국에서도 남녀의 평균 초혼연령은 계속 늘고 있다.
ⓒ 강인규

관련사진보기


미국의 평균 결혼 연령은 계속 높아지는 추세인데, 이것은 교육 수준의 향상 때문이기도 하지만(사람들은 학업을 마칠 때까지 결혼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결혼 전 동거를 택하는 커플이 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미국인들의 평균 초혼연령은 여성이 26세, 남성이 27세이다. 한국의 27.5세와 30.6세에 비해 낮은 편이지만, 30년 전 미국에 비하면 여성은 5년 이상, 남성은 4년 가까이 늦어진 것이다.

미국에서 동거는 이제 윤리나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학적인 이슈가 되었다. 결혼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인 셈이지만, 동거는 결혼 생활을 개선하거나 이혼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로빈스와 라이거의 <미국 정신질환 Psychiatric Disorders in America>에 따르면, 동거커플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결혼한 부부의 세 배가 넘는다. 동거 후 결혼한 커플이 오히려 이혼률이 더 높다는 연구도 있다. 동거가 상호 이해와 헌신도를 높인다는 생각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새커포드의 2001년 연구 "동거, 결혼, 살인"에 따르면, 동거 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체적, 성적 폭력 비율이 부부관계에 비해 훨씬 높았다. 심지어 동거인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율은 결혼의 아홉 배에 달한다. 비록 미국에서는 동거관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사라졌고 여성에 대한 가혹한 이중 기준도 없지만, 동거가 남자의 태만을 부른다는 사실은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몇 년 간 여자친구와 동거하다가 헤어진 한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결혼 신청을 기다리며 유무언의 압력을 넣었지만, 남자는 별로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결혼을 미루는 이유를 묻자, 그는 장난스럽게 답했다.

"우유를 공짜로 얻을 수 있는데 소를 왜 사?"

남자들이 철 안 드는 것은 만국 공통인 것 같다. 어쨌든 얼마 전 여자는 그 친구를 차 버리고 더 멋진 남자친구와 사귀고 있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결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결혼하는 미국인들이 줄어드는 것이 와일드의 조롱 때문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와일드 자신은 결혼을 택했다. 사랑에 별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결혼식장에 하객들이 가져 온 선물들이 놓여있다. 미국인들은 결혼 전 평균 2년 정도의 동거를 거치지만, 그 중 절반 정도만 결혼을 결정한다. 미국에서 동거는 더 이상 도덕적인 문제로 거론되지 않지만, 동거가 결혼생활을 개선하기보다는 도리어 악화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결혼식장에 하객들이 가져 온 선물들이 놓여있다. 미국인들은 결혼 전 평균 2년 정도의 동거를 거치지만, 그 중 절반 정도만 결혼을 결정한다. 미국에서 동거는 더 이상 도덕적인 문제로 거론되지 않지만, 동거가 결혼생활을 개선하기보다는 도리어 악화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 강인규

관련사진보기



태그:#결혼, #섹스앤더시티, #동거, #겨울연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