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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의 종래 이미지는 술과 여자와 풍류를 좋아하는 ‘탕자’였다. 드라마 <대왕세종>>
 양녕대군의 종래 이미지는 술과 여자와 풍류를 좋아하는 ‘탕자’였다. 드라마 <대왕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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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양녕대군의 종래 이미지는 이른 바 '탕자'였다. 왕세자의 본분도 잊은 채 술과 여자와 풍류를 좋아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밀려난 비운의 왕자라는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종래 이미지가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 <대왕세종> 속의 세자 이제(훗날의 양녕대군)는 단순히 '탕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를 띠고 있다.

가상의 설정이기는 하지만, <대왕세종> 속의 양녕은 얼마 전부터 요동수복(요동정벌·만주정벌)의 기수로 떠올랐다. 양녕에게 꽤 멋진 이미지를 씌워주려나 보다 했지만, 그것은 결코 양녕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양녕의 요동수복은 '무모한 자주론'?

명나라 황제칙사 황엄의 밥상을 뒤엎은 양녕. 요즘 식으로 말하면 토지공개념(엄밀히 말하면 토지국유제) 원칙을 깨면서까지 요동수복 비자금을 조성하려는 양녕. 마음씨 좋은 온건파 최윤덕(경성절제사)보다는 속좁은 강경파 이천(군기감정)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대(對) 여진족 관계를 한층 더 복잡하고 어수선하게 만든 양녕.

위와 같은 대(對)명나라 관계, 대(對)여진족 관계에서 나타나는 양녕의 일관된 특징은 ‘무모함'이다. 그의 요동수복론은 좋게 말하면 '젊은 혈기의 결과물'이겠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그보다는 '무모함의 결과물'이라는 측면이 보다 더 강조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드라마 속의 요동수복론은 결코 좋은 이미지를 띠고 있지는 않다. 대외관계에서 '무모한 자주'보다는 '합리적 타협'을 은근히 더 높게 평가하는 <대왕세종>의 분위기는 어쩌면 최근 한국의 정치적 변화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

대외관계에서 나타나는 '무모함'에 더해 대내관계에서 나타나는 양녕의 특징은 '폭군'이다. <대왕세종> 제30회(4월 20일)에서 외숙부들인 민무휼·민무회에 대해 귀양과 동시에 사사(賜死) 처분을 내린 이후로 '국왕 직무대행' 양녕은 본격적으로 폭군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조카에게 배신을 당하고 귀양을 떠나는 민무휼이 뼈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너도 네 아비와 다를 바 없다!" 너도 피 위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그 말은 드라마 속 양녕의 가슴에 비수를 찌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드라마 속의 양녕은 아버지 이방원이 그러했듯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외숙부건 측근이건 간에 누구든지 죽일 수 있는 '이방원 II'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외숙부 말대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폭군이 되련다'라고 결심이나 한 듯이, 양녕은 "나에게 불복하는 신하가 어떻게 될지 이번에 똑똑히 보았을 것"이라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를 것처럼 덤벼들고 있다. 이를 보다 못한 젊은 김종서가 양녕에게 한마디 했다. "폭군이 되고자 하십니까?"

이와 같이 <대왕세종>에서는 종래의 '탕자 양녕'에 더해 '무모한 양녕' 및 '폭군 양녕'의 이미지까지 덧칠되고 있다. '무모함'이나 '폭군'의 이미지는 사료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상상에 기초한 것이므로, 그 진위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양녕이 왜 그렇게 묘사될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보는 게 더 바람직할 것이다.

칼을 휘두르는 양녕의 이미지는 그렇지 않은 충녕의 이미지와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드라마 <대왕세종>.
 칼을 휘두르는 양녕의 이미지는 그렇지 않은 충녕의 이미지와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드라마 <대왕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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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내어준 양녕, 이제는 인간적 이미지까지 동생에게

종래의 '탕자 양녕'은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이미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이미지일 수도 있었다. 탕자 양녕은 분명히 '왕세자'로서는 부적합한 이미지였지만 '인간'으로서는 결코 부적합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풍류 좋아한 탕자 양녕은 어찌 보면 너무나 ‘인간적’인 이미지일 수도 있다. 종래에 많은 한국인들이 양녕대군을 동정한 것도 '탕자 양녕'이 결코 나쁜 이미지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인간적인 이미지는 <대왕세종>의 주인공인 충녕대군이 정통성을 갖는 데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제3왕자였다는 약한 정통성을 보충하기 위해 '충녕은 백성 즉 인간을 하늘처럼 사랑한 군주'였다는 점을 특히 부각시킬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충녕은 인간을 사랑한 군주였기에 정통성 있는 군주였다'는 작품의 메시지를 보다 더 강렬히 전달하려면, '인간적인 탕자' 양녕의 이미지를 일정 정도 깎아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양녕은 부득이 아우를 위해 또 한번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근 600년 전에 아우에게 세자 자리를 내주었듯이, 이번에는 이미지까지 아우에게 내주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양녕 너도 네 아비처럼 피 위에서 시작하는구나"라는 민무휼의 악담은 "내 손에 백성들의 피를 묻힐 수 없다"며 스스로 유배의 길을 떠난 충녕대군과 그렇지 못한 양녕를 대비시키는 것이었다.

피를 묻힌 양녕, 피를 안 묻힌 충녕. 누가 진정한 왕재(王才)인가가 바로 거기서 갈리고 있다.  
<대왕세종>에서 양녕대군의 이미지는 종래의 이미지와 분명히 다르다.
 <대왕세종>에서 양녕대군의 이미지는 종래의 이미지와 분명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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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양녕, 성군 충녕

충녕대군이 고려황실 잔존세력 책사인 전판석(전 행수)의 목을 베라는 부왕의 명령을 "내 손에 피를 묻힐 수 없다"며 거부한 채 스스로 경성 유배의 길을 떠난 이후 양녕이 본격적으로 '무모한 폭군'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충녕과 양녕의 대비를 통해 충녕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기술적 장치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무모한 폭군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동생에게 성군의 이미지를 씌워주고 있는 드라마 속의 양녕. 궁이라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 결코 비인간적이었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아우를 띄워주기 위해 부득이 그 인격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 속의 양녕.

아우에게 세자 자리를 내준 적이 있는 그는 근 600년이 흐른 21세기에 다시 태어나서 이번에는 '인간적'이라는 이미지마저 동생에게 내주고 있다. 그가 '탕자에 무모한 폭군'으로 전락하고 있는 동안, 그의 동생은 '건실하고 합리적인 성군'으로 서서히 자리매김 되고 있다.


태그:#대왕세종, #대왕 세종, #세종, #양녕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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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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