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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의 한 장면.
 <이산>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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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송연과 이산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정조와 성송연의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고 '성송연과 이산의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한 것은, 드라마 <이산> 속의 정조 임금이 그렇게 말해도 좋다는 '윤허'를 내렸기 때문이다. 흰꽃 휘날리는 나무 아래에서 송연이에게 프러포즈 하는 장면에서, 정조 임금은 비단 송연이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뭇여성들'을 겨냥한 듯한 화려한 언어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너를 내 곁에 둘 수 없다는 게 내게 얼마나 고통인지 너는 왜 모르느냐?"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세손이나 임금으로서 만나지 않았다."
"나는 한 남자로서 너에게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드라마 속 정조 임금은 군주 대 백성의 결혼이 아닌, 여자 대 남자의 결혼을 성송연에게 정식으로 신청했다. 만약 정조 임금이 요즘 사람이었다면, 그는 분명히 자기 집 문패에다가 '성송연·이산의 집'이라고 써넣었을 것이다. 정조 임금의 연애 감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18세기가 아닌 21세기에 맞을 듯하다.

'사고치는 척'만 하고 첫날밤 미룬 이산과 송연

정조 임금은 <다모>의 좌포청 종사관 황보윤보다도 더 멋있는 '남자'였다. 아무래도 '종6품' 종사관보다는 '무품'(無品) 국왕이 애정 표현에서도 몇 수 위인 모양이다.

"그리 해도 된다면 함께 가겠습니다."

송연이도 청혼을 받아들였고, 두 연인은 한밤중에 대궐로 돌아왔다. '홀어머니'가 반대하실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반항아' 이산은 애인을 무작정 자기 방에까지 데리고갔다.

혼인을 약속하는 두 사람. 드라마 <이산>.
 혼인을 약속하는 두 사람.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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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송연과 이산이 사고를 치는구나 하는 순간. 혜경궁 홍씨도 가슴이 덜컥 하는 순간.

송연이의 손을 덜썩 잡은 이산은 더 이상의 '진행'을 중단하고 송연이를 침소에 남겨둔 채로 독서당으로 홀로 떠났다. 정말로 그는 송연이의 손만 잡았다. 일단 '사고'를 쳐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산은 사고를 치는 척만 하고 첫날밤을 다음으로 미룬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전만 빼고 온 궁궐이 '주상이 사고를 쳤다'고 믿게 되었고, 그로 인해 둘의 혼인은 그렇게 결정되고 말았다. "그래도 난 인정할 수 없다"는 혜경궁 홍씨의 반대는 그야말로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다.

이로부터 여러 날 후에 이산은 송연이와 정식으로 가례(嘉禮, 왕이나 왕세자의 혼례 등)를 치렀다. 자줏빛 꽃 같은 차림에 수줍은 미소를 잔뜩 머금은 송연이는 그렇게 해서 꿈에 그리던 정조의 부인이 되었다. 그날 밤 그들은 '밀린' 첫날밤을 정식으로 치렀다. 물론 궁궐 사람들은 그것이 둘째밤인 줄로 알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산> 제62회의 장면들은 다분히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도덕관념과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멋있음'에 대한 고려 하에 고안된 것들이다. '세상이 아무리 많이 변했다 한들 그래도 결혼식 때까지는 순결을 지키는 남녀가 멋있는 남녀가 아닌가?'라는 현대 한국인들의 관념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상황과 정반대인 '실제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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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실제의 정조 임금과 후궁 성씨(이름은 불명)는 어땠을까? 그들은 과연 가례 후에 첫날밤을 치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제의 상황은 드라마의 상황과 정반대였다.

드라마 상에서 이산은 가례 전에 송연이를 데리고 한밤중에 침전에 들었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사고'를 치는 쪽으로 대본이 쓰여졌다면, 그것이 실제 상황에 보다 더 부합했을 것이다.

<정조실록> 정조 6년(1782) 9월 7일자 기사는, 정조와 성씨 사이의 첫아들인 문효세자의 출생 사실을 기록하면서 그때까지도 성씨가 후궁의 작호를 받지 못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성씨가 정식으로 후궁의 작호를 받은 때는 그로부터 3개월여 후인 같은 해 12월 28일이었다. 정조 6년은 일반적으로 서기 1782년에 해당하지만, 정조 6년 12월 28일은 서기 1783년 1월 30일에 해당한다.

그럼, 후궁의 작호를 받기 전까지 성씨의 신분은 어땠을까? 후궁이 되기 직전에 성씨는 상의(尙儀)라는 정5품 내명부 궁인이었다. 상침(尙寢)이 침소(寢)를 담당하는 궁인이고 상식(尙食)이 식사(食)를 담당하는 궁인이듯이, 상의(尙儀)는 의식(儀)를 담당하는 궁인이었다.

가례를 마친 빈(정1품 후궁)이 대왕대비에게 인사를 올리는 의례를 기록한 '가례후빈조견대왕대비전의(嘉禮後嬪朝見大王大妃殿儀)'라는 문서에 의하면, 상의(尙儀)는 행사 중에 의식을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낸다거나 의례가 끝났음을 알린다거나 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것은 정조시대의 자료는 아니지만, 이를 통해 상의가 수행한 역할의 구체적 사례 중 하나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문효세자 임신 후에도 정식 후궁 작호 못 받은 성씨

이처럼 문효세자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에도 성씨는 정식으로 후궁의 작호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궁인의 신분에 정조 임금의 승은을 입었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이산이 송연이를 데리고 온 날 밤에 송연이와 함께 그대로 침전에 머물렀다면, 그것이 오히려 두 사람의 실제 관계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이 될 뻔했다.

그럼, 드라마에서처럼 성씨가 정식으로 가례를 치른 다음에 정조와 첫날밤을 보낼 수는 없었을까? 물론 꼭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조선시대 왕실의 관례로 볼 때에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씨가 후궁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당시로써는 사실상 그것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궁인이 후궁이 되려면 원칙적으로 임금의 승은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홍국영의 여동생인 원빈 홍씨처럼 고위층 출신 후궁인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가례를 치른 다음 임금과 첫날밤을 보내지만, 성씨 같은 궁인들의 경우에는 대개 임금과 합궁을 한 연후에야 후궁이 될 수 있었다. '미천한' 궁인들의 입장에서는, 임금의 승은을 입는 것은 신분적 제약에서 탈피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궁인이 임금과 합궁을 한다고 하여 곧바로 후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합궁 이후부터 후궁의 대우를 받게 되지만, 자식을 낳아야만 정식 후궁의 자리에 보다 안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여기서 후궁의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궁인의 업무(예컨대 상침·상식·상의 등)에서 벗어나고 별도의 거처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경우에는 궁인의 업무에서만 벗어나고 별도의 거처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판 신데렐라' 의빈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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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경우에도 문효세자 출생 280일 전인 정조 5년 11월 중순경 즉 서기 1782년 1월초 이전의 어느 시점부터 후궁 대우를 받기 시작했지만, 문효세자가 출생하고 나서 석달 여가 지난 정조 6년 12월 28일에 가서야 정3품 후궁인 소용(昭容)이 될 수 있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일반 궁인의 경우에는 임신을 한 뒤에 후궁의 작위를 부여한다'는 원칙을 준수하고 있었다. 

원빈 홍씨처럼 고위층 가문 출신이 아닌 그로서는 궁녀 신분에서 임금의 승은을 입지 않고는 후궁이 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속도위반'이 필수였던 것이다.

아무리 국왕의 관심을 받는 입장이라 해도 궁인 신분이 "나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힌 다음에 나와 첫날밤을 가지라" 요구할 수는 없었다. 속도위반은 성씨의 신분적 제약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속도위반 여하를 떠나서, 정조와 성씨의 혼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뭇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사건이었다. 다른 시대에도 궁인 신분에서 후궁이 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숫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 궁인이 국왕의 부인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걸어서 하늘까지 가는 것'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만한 일이었다.

정조와 성씨의 혼인은 드라마 속의 성송연과 이산의 혼인만큼 그렇게 멋있고 드라마틱하지는 않았지만, 성씨 본인이나 일반 평민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조선판 신데렐라' 이야기에 필적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이산, #정조, #성송연, #의빈 성씨,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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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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