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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산의소 본부 막사 터.
 쌍산의소 본부 막사 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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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이나 유적이 거의 없는 의병전적지

사학자로 독립운동사에 대가이신 조동걸 교수는 구한말 전쟁 시기를 전기(1894~1896. 10), 중기(1904~1907), 후기(1907. 8~199-09. 10), 전환기(1909. 11~1915. 7), 말기(1915. 8~1918)로 나누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구한말 의병 투쟁기는 20여년간이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안팎이다. 학자에 따라 의병전쟁에 참여한 의병의 수에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연인원 60만 명 내외요, 희생자 수는 15만 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의병 전적지를 다녀보면 유물이나 유적이 거의 없다. 나는 이 점이 궁금하여 순천대 홍영기 교수에게 질문하자 다음과 같이 답변해 주셨다.

"유물로는 화승총이나 진중일기 정도인데, 대부분 일제에게 빼앗겨 전해지지 않습니다. 유적은 늘 일제에 쫓기는 의병들이 영구적인 시설을 새로이 만들기보다는 자연동굴이나 산성, 사찰, 재실 등 이미 지어진 건물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의병만의 독자적인 유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남 화순군 이양면 계당산 일대의 쌍산의소는 거의 완벽한 의병 유적지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쌍산의소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문화유적해설사에게 이곳이 원형 그대로 여태 보존된 까닭을 물었다.

"워낙 궁벽한 산중이라 외부와 단절되었기에 일제도 미처 파괴치 못하였습니다. 해방 뒤에는 호남이 상대적으로 덜 개발된 탓으로 이나마 보존되었을 겁니다."

나는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만일 섣부른 개발론자들이 상업주의로 이곳을 개발하였다면 이나마 원형이 남아 있으랴. 해방 60여 년이 넘도록 이런 의병유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음에 몹시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천박한 개발론자가 이 성지를 국적 불명의 유원지로 만들까 몹시 염려스럽다. 차라리 나라에 민족혼을 지닌 올바른 지도자가 나올 때까지 이대로 묻어두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일제에게 빼앗겼다가 애써 찾은 우리말, 우리글조차도 버리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무리들에게 의병 유적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이 이 비경을 안다면 이곳에다가 별장이나 펜션을 잔뜩 지어 오히려 선열의 넋을 욕되게 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망루에서 내려다 본 쌍산의소 막사 터.
 망루에서 내려다 본 쌍산의소 막사 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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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그날을 기다린다

나는 이순도 화순군 문화유적해설사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니며 쌍산의소 막사 터, 화약재료 창고였던 유황 굴, 제1~3 망루 등을 둘러보고, 최초의 거병 장소였던 증동으로 갔다. 먹빛 같은 어둠으로 대장간 터를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내가 못내 안타까워하자 뒤따르던 양금렬씨가 한 마디 했다.

"아쉬움이 많으면 다시 오게 된답니다."

언젠가, 나라에 민족정기가 바로 우뚝 선 그날이 오면, 이곳은 분명 민족의 성지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그날까지 소중하고 귀한 이 유적을 훼손함이 없이 이대로 보존하는 게 더 현명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복원 사업한답시고 가짜 애국자 이름을 주춧돌에 올려 오히려 선열들에게 욕이 되게 하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의병 전적지를 순례하면서 만난 어느 후손은 나에게 굳이 당신은 선열 현창사업에 애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올 통일의 그날을 기다린다며 마음속 깊이 담아 둔 말을 넌지시 하였다. 

우리 일행이 쌍산의소를 한 바퀴 둘러본 뒤,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자 저녁 8시가 넘었다. 때를 놓쳐 시장한 데다가 이 고장 특미 육회 비빔밥을 들자 그 맛이 일품이었다. 그제야 밝은 자리에서 주객은 소주잔을 나누며 인사와 한담을 나누었다. 의병 전적지를 순례하는 나그네의 신상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해설사와 양동하 전 능주 전교께서 내 본관 고향을 물었다.

"밀양 박씨로, 경상도 선산 구미 금오산인"이라고 답을 하였더니, "그러면 혹 송당(松堂) 후손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도 뜻밖의 물음에 놀라, "네! 맞습니다"라고 답을 하자 "송당은 청백리였지요, 경상도 선비가 호남에 오시다니 참 귀한 손이오." 양 전교는 눈을 크게 뜨시며 더욱 반가워하였다.

"그때(1906년) 우리 집안이 양 장군 거의로 가산을 탕진하여 그 뒤로는 힘을 못 썼소. 그래 자손들을 대학에도 못 보냈다오. 하긴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면 충신 집안은 멸문을 당한께 할 말이 없소만, 나라를 되찾았으면 집안이 다시 힘을 써야 할 건데, 어찌 그리 못하고 있소."
"앞으로 집안에 큰 인물이 나올 겁니다. 애국자 집안에서 애국자가 나올 테지요. 저는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와야 민족정기가 살아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 고맙소. 영남 분이 호남부터 먼저 찾아준 점도 고맙고. 예전에는 그랬지요. 내 생전에 언제 다시 찾아주시오."

올해 여든 셋인 양 전교는 내 손을 잡고는 잠깐 만남을 못내 아쉬워했다.

수저를 놓고 일어나자 9시였다. 이미 광주행 시외버스가 끊어졌다면서 화순까지 택시를 잡아주었다. 화순가면 광주까지는 시내버스가 밤늦도록 다닌다고 하였다. 택시에 오르자 여독의 피로가 해일처럼 덮쳤다. 화순에 못 미처 차창 밖으로 '도곡온천'이라는 팻말이 보여 그곳 온천에 몸을 담글 양, 기사에게 부탁하자 차머리를 거기로 돌려 잠시 후 온천마을에 내려주었다.

하나 같이 요란한 네온을 단 외국말 간판들이었다. 외진 시골 온천마을마저도 천박한 상업주의가 휩쓸고 있었다. 늦은 밤이라 다시 광주로 가는 차도 보이지 않았고, 광주에 가도 마찬가지 아닌가. 온 나라가 저질문화가 판치고 있다. 더 이상 헤매기에는 몸과 마음이 너무 피곤하여 어쩔 수 없이 요란한 간판을 단 한 모텔에 들고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쌍산의소의 만세바위 , 훈련중 의병들이 이 바위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쌍산의소의 만세바위 , 훈련중 의병들이 이 바위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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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회일 의병장 행적

양회일 의병장은 1856년 전남 화순군 능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요, 호는 행사(杏史)로, 학포 선생의 후손이다. 양회일은 을사늑약으로 바람 앞 등불처럼 꺼져가는 조국을 그대로 볼 수 없어 가족을 설득한 뒤, 가산을 정리하여 곧바로 창의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가 1906년 음력 10월이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눈이 내리던 날, 양회일은 쌍봉사 윗마을 증동(甑洞)을 찾았다. 그가 이 오지산간 마을을 찾은 까닭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을 유지인 임노복(林魯福)에게 의병의 집결지와 훈련장소로 이 마을을 이용할 수 있도록 협조를 받기 위해서였다. 임노복이 양회일을 흔쾌히 맞자 두 사람은 구체적인 계획을 짜느라 수일동안 함께 지냈다.

이때 임노복이 양회일에게 제시한 의병의 방략은 다음과 같다. 거사를 하려면 첫째 득인(得人 사람을 모으는 일), 둘째 병기 확보, 셋째 군량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일어난 의병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여 투쟁역량을 드높이기 위한 방안이었다. 양회일은 임노복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이에 따라 증동은 의병촌(義兵村)으로 변모하였다. 의병에 가담하려는 사람들이 날마다 몰려들었다. 이들은 그곳 대장간을 이용하여 무기를 제작하거나 마을 뒷산인 계당산(일명 中條山)을 배경으로 훈련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증동은 채 30호를 넘지 않은 조그만 마을이라 의병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이에 계당산 골짜기에 막사를 세워 일부 의병을 그곳에 기거하도록 조처하였다. 또한 활용동(혹은 杜陵洞) 안찬재(安贊在)의 동네에도 일부를 수용하였다. 당시 이곳에 모여든 의병은 화순은 물론, 보성 정읍 남원 구례 순창 출신들이 많았다.

한편, 양회일은 장성의 기삼연, 담양의 고광순과 연계하여 각자 고향을 배경으로, 동시에 창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는 일제의 시선을 분산시켜 의병항쟁을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의병장 양회일은 부대편제를 완료하였는데, 주요 구성원은 아래와 같다.

부장 신재의(辛在義) 선봉장 이광선(李光善)
중군장 임창모(林昌模) 후군장 노응현(盧應玄)
도포장 유화국(柳化國) 총무 양열묵(梁烈黙)
서기 이병화(李秉華) 참모 임상영(林相永) 호군장 안찬재(安贊在) 임노복(林魯福)
군의 전신묵(全信黙) 등 200여 명 규모였다.

특히 전투에 대비하여 군의(軍醫)를 편성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모병(募兵)과 훈련, 그리고 군수 조달을 위해 바쁘게 겨울을 지낸 이들은 1907년 4월 중순 안찬재의 마을인 활용동에 모여 들었다. 이들은 활용동을 거점삼아 4월 22일 능주 군아(郡衙) 공격을 시작으로 화순까지 점령한 뒤, 동복을 지나 광주를 친 다음 북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상에 대하여 다른 의견도 있었다. 중군장 임창모는 능주 화순을 점령한 다음 지리산에 들어가 장기항전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하지만 신재의가 주장한 북상 방략이 채택된 것이다.

이들은 예정대로 4월 22일 능주와 화순을 점령하여 무기와 군자금을 징발하고, 군아와 우편소 경무서 일본인 상가 등을 불태우고, 일제의 통신시설인 전주와 전선을 절단하였다. 이어 동복으로 들어가 광주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튿날 광주를 치기 위하여 이들이 도마치(板峙)를 넘으려는 순간,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갑자기 당한 일인지라 모두가 당황하였는데, 정세현(鄭世鉉)이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여기저기서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양회일은, "다른 사람을 죽이지 말고 나를 죽여라. 내가 바로 의병장 양회일이다"라고 외쳤다. 이 소리에 적들은 의병장 양회일을 비롯한 수뇌부를 사로잡을 욕심으로 총성을 멈추었다. 양회일은 선봉장을 중심으로 부하 의병들이 후퇴하도록 조치하였다. 중군장 임창모를 비롯한 5명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에워쌌다. 하지만 수개월 동안 고생한 보람도 없이 한 순간에 패했다.

양회일 등은 7월에 재판을 받아 그와 임창모는 15년형, 안찬재 유태경 신태환 이윤선 등은 10년형을 선고받고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에 특사로 풀려났다. 

이들은 1908년 재차 의거하여 강진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양회일은 다시 체포되었다. 양회일 의병장은 장흥헌병대에 구금되어 7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다가 1908년 7월 22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일제 헌병에게 다음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비록 죽는다 해도 천하의 의사(義士)들을 너희가 모조리 죽일 수 있겠느냐?"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역 <행사창의록>, 조동걸 교수의 <쌍산의소의 의병성과 무기제조소 유지>, 홍영기 교수의 <화순 쌍산의소> 등을 참고로 하여 썼으며, 특히 양회일 의병장 행적 부분은 홍영기 교수의 <양회일 의병장>을 줄거리로 삼아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전재를 허락해 주신 홍영기 교수님에게 감사드립니다.



태그:#호남의병, #쌍산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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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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