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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후 평창동에 갈 일이 있어 좁은 오르막 골목길을 걷다가 왠지 낯익은 사람과 마주쳤다. 지나치고 나서 뒤돌아봤을 때야 겨우 생각나는 사람, 바로 소설가 박범신 선생이었다.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작가가 하루아침에 절필을 선언하더니, 요새는 히말라야 고산 언저리를 오가며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후줄근한 차림새에 면도도 하지 않은 듯한 덥수룩한 얼굴이 네팔인을 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반 히말라야 사람이 된 작가가 저번엔 한국에 온 네팔인을 소재로 소설을 써내더니 이번엔 아예 산악소설, 말미에 붙인 등반용어 해설을 참고하지 않으면 읽기 어려운, 그야말로 정통 산악소설을 내놨다.

 

사실 산악소설이라는 장르가 의외로 뻔하다. 항상 위쪽만을 향한다는 일정한 방향성도 그렇고, 자일의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즉 둘이 한 줄에 묶여 있다는 복수성 또한 필수적인 가정이다. 또 그런 요소 때문에 작가가 달리 어떤 변화를 주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산악소설, 다큐멘터리 등에서 추위와 조난을 빼면 이렇다 할 대결구도가 성립되지 않는 공통된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주인공들은 산에서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위험, 즉 추락이나 낙석, 장비 분실, 크레바스, 눈사태 등 지극히 상투적인 위험요소들을 차례차례 겪고 있다. 이런 전형적인 산악모험이 구미에 당긴다면 차라리 영화 <K2>, <버티컬 리미트>, <클리프 행어>를 빌려다 보는 것이 더 손쉽다. 거기에는 산악모험뿐만 아니라 총격전과 같은 액션신까지 포함되어 있어 훨씬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영화 <K2>에서 주인공 테일러는 동료대원 달라스의 시신에서 자일과 아드레날린 주사기를 빌려 친구 해롤드를 구조한다. 이 책 속에서도 크레바스 속에서 죽은 자의 피켈과 버너를 빌리는 대목이 나온다.

 

소설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에서 나오는 상황처럼 상민은 크레바스에 추락해 매달린 영교의 자일을 끊어야 할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다리가 부러지고 아예 의식마저 없이 벌렁 드러누운 영교를 상민이 자일로 묶어 질질 끌고 가는 장면 역시 <K2>의 말미에서 봤던 장면과 유사하다. 책장 여기저기서 예전에 어디선가 봤던 장면이 튀어나와 도무지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작가는 서문에서 이 책 산악소설의 씨줄만 보지는 말아 달라고 했다. 비록 산악소설의 얼개를 빌렸으되 작가가 진정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라고, 존재의 나팔소리, 시간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쓴 글이라고 했다.

 

그리고 삶의 빙벽에서 투신해 버리고 싶을 때 책 속의 주인공 박상민과 하영교를 기억해 달라고 했다. IMF 때문에 실직하고, 자영업을 하려다 사기를 당하고, 이혼하고, 끝내는 교도소에까지 추락해버린 상민. 죽은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시달리다 빚쟁이를 칼로 찌르고 도망쳐 수배 중인 영교. 그들은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절박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촐라체에 갔다.

 

현실에서 너무나 많은 추락을 겪은 그들이 도리어 더 많은 추락의 산인 촐라체에 간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2천여 미터의 수직 빙벽을 오르며 또 온갖 추락을 다 겪고서도 그들은 끝내 살아서 돌아왔다.

 

전설적인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는 8천미터의 고봉을 오르며, 벽과 나 사이에서 생존해야 하는 실존적 경험이 오랜 세월을 평범하게 살면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준다고 했다. 무엇을 더 많이 준다는 것일까? 상민과 영교는 촐라체에서 무엇을 얻어서 돌아왔을까? 나는 그것을 용기라고 생각하고 싶다. 산을 향해 떠날 수 있는 용기,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오로지 정상만을 생각하고 오르는 용기, 그리고 다시 촐라체보다 더 높고 험한 현실세계로 돌아와 부딪칠 수 있는 용기를 얻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들은 히말라야의 촐라체보다 더 높고 험한 현실의 촐라체에서 다시 피켈을 휘두르게 될 것이다.

 

요새 들어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도 지금 촐라체에 오르고 있는 중이다.

덧붙이는 글 | <촐라체>, 박범신 저, 푸른숲, 2008년 3월, 330편, 9800원


촐라체

박범신 지음, 푸른숲(2008)


태그:#촐라체, #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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