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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가 홍국영. 드라마 <이산>.
 세도가 홍국영.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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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은언군의 장자를 원빈의 양자로 들이고 싶습니다."

이처럼 다소 황당한 홍국영의 청탁. 정조는 그것을 들어주기로 했다. 원빈의 양자는 결국 정조의 양자이므로, 이로써 정조는 아들 하나를 얻게 되는 셈이다. 원빈이 죽은 정조 3년(1779) 5월(음력) 이후의 일이었다.

죽은 원빈의 양자가 된 이담(본명은 이준)의 족보를 잠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는 혜경궁 홍씨(헌경왕후), 숙빈 임씨, 경빈 박씨 등의 부인이 있었다. 사도세자가 훗날 장조 임금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부인들에게도 왕후·빈 같은 존호가 추존된 것이다.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와의 관계에서 의소세자(어릴 때 요절)와 정조를, 숙빈 임씨와의 관계에서 은언군과 은신군을, 경빈 박씨와의 관계에서 은전군을 낳았다. 따라서 위에 언급된 은언군은 정조의 배다른 형제가 된다. 그리고 은언군의 아들인 이담은 정조의 조카가 된다. 그러므로 홍국영은 정조의 조카를 원빈의 양자 아니 정조의 양자로 입양시킨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에 있는 은신군 신도비. 은신군은 숙빈 임씨가 낳은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은언군의 동생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에 있는 은신군 신도비. 은신군은 숙빈 임씨가 낳은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은언군의 동생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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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홍국영은 정조의 조카를 정조의 아들로 '둔갑'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정조 임금이 청을 들어주었다기보다는 그냥 묵인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정조에게 군왕 자리를 '만들어준' 데 이어 아들까지 '만들어준' 홍국영의 행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첫째, 이담의 입양은 정조의 후사를 사실상 끊어놓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앞으로 얼마든지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아직 서른 살도 채 안 된 새파란 군주에게 양자를 안기는 것은 '아들을 낳으시려고 굳이 애쓰실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민망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기에 "전하의 양자를 들이십시오"라는 표현 대신 "원빈의 양자를 들이고 싶습니다"라는 완곡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만약 홍국영이 그대로 세도를 유지했다면, 순조 임금이 태어나기 힘들었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설령 태어났다 해도 왕이 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홍국영은 참으로 무섭고도 황당한 신하가 아닐 수 없다.

군주의 출산·결혼 문제까지 틀어쥔 신하

둘째, 이담의 입양은 향후의 후궁 간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왕실에서 후궁을 들이는 목적은 군왕의 성적 유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후사를 안정적으로 낳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중전인 효의황후(효의왕후)가 자녀를 낳을 가능성이 적은데다가 원빈 사망 직후에 정조에게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만약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왕실에서는 새로운 후궁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 길을 홍국영이 사실상 막아버린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실력자가 이담을 정조의 양자로 입양시켜 놓았으니,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정조의 후궁을 들일 엄두를 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홍국영이 죽은 뒤인 1782년에야 성씨(드라마 속의 성송연)가 후궁이 된 점을 볼 때에, 홍국영이 그대로 권세를 유지했더라면 정조가 새로운 후궁을 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신하가 주군의 출산문제·결혼문제까지 꽉 틀어쥐고 있었으니, 그런 홍국영을 곁에 둔 몇 년 동안 정조 임금이 속으로 얼마나 참고 또 참았을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주 이씨)과 풍(풍산 홍씨)은 동격? 홍국영이 원한 것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드라마 <이산>.
 완(전주 이씨)과 풍(풍산 홍씨)은 동격? 홍국영이 원한 것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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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담의 입양은 홍국영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안이었다. 그것은 입양을 계기로 이담에게 부여된 완풍군(完豊君)이란 작호에서 잘 드러난다. 완(完)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주(전주)를, 풍(豊)은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을 뜻하는 표현이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이서(李曙)란 사람이 완풍군(完豊君)이란 작호를 받은 일이 있지만, 그때 사용된 완풍이란 표현은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완과 풍을 나란히 놓은 완풍이란 군호를 자신의 법적 조카(이담)에게 부여한 것은 자신의 세도와 군주의 권세가 동격임을 과시하기 위한 조치인 동시에, 장차 군왕의 외숙부로서 국정을 틀어쥐겠다는 의도의 표현이었다. 홍국영처럼 영리한 사람이 그처럼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낸 것을 보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해도 괜찮을 만큼 그의 권력이 막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홍국영'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8월 15일자 기사에서 사관(史官)은 "완풍으로써 작호를 삼은 것은 (홍)국영이 국본(후계자 자리, 인용자 주)을 은밀히 옮기려는 계산이었다"(以完豐爲爵號卽國榮陰移國本之計也)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홍국영의 세도가 무너진 후에 우의정 이휘지의 건의에 따라 정조는 완풍군이란 칭호를 없애버렸다. 완풍군에 이어 이담이 받은 새로운 작호는 상계군(常溪君)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죽은 여동생의 양자를 들인 홍국영의 조치는 정조의 후사를 사실상 끊어놓을 수 있는 조치이자 후궁 간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인 동시에, 결정적으로 홍국영의 정치적 야심을 만천하에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화완옹주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정후겸을 죽은 남편인 정치겸의 양자로 내세워 왕위계승문제에까지 개입한 화완옹주의 처사와 유사한 일이었다. 홍국영과 화완옹주는 서로 대립하는 사이였지만, 이처럼 입양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싸우다 보면 서로 닮는다고 했던가.

삼신할머니도 아니면서 정조 이산의 아들을 점지해준 홍국영. 임산부도 아니면서 정조 이산의 아들을 만들어준 홍국영.

그는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아니, 그는 지나쳤다. 그런 지나침이 그의 권불사년(權不四年)을 초래한 결정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이산, #완풍군, #이담, #상계군, #홍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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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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