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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아픔이 아니도록, 슬픔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슬픔이 아니도록, 우리들 살아가는 가운데 누구나 아픔과 슬픔을 느끼는 한편, 이 아픔과 슬픔이 우리를 더욱 튼튼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거름이 되기도 함을 슬그머니 일깨워 주는 살가운 이야기책입니다.
▲ 겉그림 아픔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아픔이 아니도록, 슬픔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슬픔이 아니도록, 우리들 살아가는 가운데 누구나 아픔과 슬픔을 느끼는 한편, 이 아픔과 슬픔이 우리를 더욱 튼튼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거름이 되기도 함을 슬그머니 일깨워 주는 살가운 이야기책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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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
- 글 : 고시미즈 리에코
- 그림 : 이시이 쓰토무
- 옮긴이 : 조영경
- 펴낸곳 : 산하(2006.9.22.)
- 책값 : 8500원

(1) 나와 이웃 이야기

어제는 옆지기 태어난 날. 그제는 옆지기 동생 태어난 날. 두 사람은 하루 걸러 태어났습니다. 이런 날에는 옆지기 식구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기쁨을 나누어야 좋으니, 먼걸음이지만 전철을 타고 세 시간 거리 나들이를 갑니다.

제 또래, 또는 제 손아래들은 거의 모두 자동차를 굴립니다. 인천에서 일산까지 전철로 가면 돌고 돌아서 세 시간이지만, 자가용으로 가면 잘 닦인 찻길을 따라 사오십 분이면 넉넉합니다. 차를 몇 번 얻어타면서 '차 있는 사람은 참 좋겠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차를 굴리고 싶지 않습니다. 차 굴릴 돈도 없지만 차를 장만할 돈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저같은 사람까지 자동차를 굴리면 우리 삶터 공기는 몹시 끔찍하리라는 생각입니다. 더욱이 우리 식구가 자동차 타고 움직일 일도 드문데, 하염없이 길 한켠에 멀뚱하게 세워져 있으면 얼마나 걸치적거릴까요.

돌고 도는 전철길은 멉니다. 전철 걸상은 딱딱한 쇠붙이이거나 비좁습니다. 몇 해 앞서 전철에 불을 낸 사람 때문에 쇠붙이 걸상이 생겼습니다. 먼길을 가야 하는 사람은 두어 시간 동안 쇠붙이 걸상에 앉아야 합니다. 불지름은 전철에서만 할 수 있지 않고 비행기며 기차며 버스에서도 할 수 있는데, 오로지 전철만 걸상이 이 모양입니다.

공무원이나 나랏님이 전철로 두어 시간 출퇴근을 한다면 전철 걸상을 이렇게는 안 만들 테지요. 전철역 걸상을 아예 안 놓거나 어쩌다 몇 군데 시늉으로 놓는 일은 없고요. 전철역 뒷간도 구석자리에 한 칸 겨우 마련해서 찾아가기 어렵게 하지 않을 터입니다. 세 시간 거리를 뒷간도 못 가며 꾹 참고 전철에서 버텨야 하는 노릇은 참으로 고단합니다. 가는 길에 몇 군데 역에서는 아직까지도 '간첩신고 안내방송'을 2분 가까이 큰소리로 틀어놓습니다.

... "만져 보렴." 바구니 안의 꽃잎들을 만져 보았더니 바짝 말라 있었다. "말린 꽃이에요?" "그래. 건조제랑 함게 신문지 사이에 끼워 두면 예쁜 색이 그대로 남게 돼. 하늘도 모르게 내리는 눈을 담아 두면 행복도 여기에 그대로 남게 될지 모르지." "하늘도 모르게 내리는 눈이 뭐예요?" "흩날리는 벚꽃잎을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단다. 그 사람이 가르쳐 주었어." 아주머니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 더 있어. '하늘도 모르는 비'라는 게 뭔지 아니?" 아주머니가 물었다. "뭘까요? 아, 분수?" "틀렸어. 아무도 모르게, 남몰래 살짝 흘리는 눈물을 그렇게 말해. 예쁜 말이지?"...  (31쪽)

전철을 타며 책을 읽습니다. 먼저 <마음의 조국, 한국>(범우사, 2002)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외로운 아이로 자랐다가 버림받아 길에서 쓸쓸히 죽을 뻔한 글쓴이는, 어느 날 재일조선인 넝마주이 할아버지가 거두어 주어서 길에서 얼어죽지 않게 되고, 스물이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글(일본글)을 배워 자기 이름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야간중학교에 다니며 '무기가 되는 글과 말'을 처음으로 깨닫고는, 자기처럼 배울 기회가 없던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 혜택을 누려야 하지 않느냐면서 '야간중학교'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자기 목숨을 건져준 넝마주이 할아버지 고향인 한국(조선)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는 이야기를 책 하나에 담습니다.

용산에서 잠깐 내려 뒷간에 들른 뒤, 다시 전철을 타고 종로3가, 그리고 내처 3호선으로 대화역까지. 이제는 두 번째 책을 꺼냅니다. 제국주의 일본시대부터 일제가 저지른 짓을 슬퍼하던 한 사람이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쓴 글을 모은 <반달의 노래>(1977)라는 책. 글을 쓴 할머니는 쭈그렁 늙은 나이가 되었어도,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 적어 놓아야 할 이야기가 많다면서 이와 같은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요. 얼마나 많은 모습을 보셨겠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겪고 스치고 만나고 어울리셨겠어요. 좋은 만남이 있었을 테고 슬픈 만남이 있었을 테지요. 오랜 세월 겪어낸 그 이야기를 차곡차곡 풀어놓아 준다면, 지난 세월을 몸으로 겪어 보지 못한 우리들이지만, 이 조그마한 책 하나를 넘기면서 눈물이 핑 돌거나 슬며시 웃음이 묻어날 수 있겠지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젊은 넋과 얼한테 당신 모든 땀과 피를 책 하나에 남겨 놓습니다.

... "결혼식 전날에 큰비가 내려서 여기 도랑이 넘쳤단다. 사진관도 물이 차서 이층에서 사진을 찍었지. 길이 온통 물바다여서, 갈 때 올 때 우리 남편이 배를 저었단다. 그게 가장 재미있었어." "그런데 쇼고 할아버지는 왠지 모르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계시네요." "전쟁을 할 때여서 그럴 거야.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남편에게 곧바로 소집영장이 왔단다. 소집영장이라는 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군인이 되어 전쟁이 나가라는 명령이야. 막 결혼을 했어도, 아기가 있어도, 병든 가족을 돌봐야 하는 형편이라도 젊은 남자라면 다른 나라 전쟁터까지 가야 했어. 그땐 그랬단다. 그래서 남자들이 모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사실은 모두 부드럽고 착한 사람들이었어."...  (44∼45쪽)

전철 옆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몸을 비빕니다. 조금이라도 당신 앉은 자리가 넓기를 바라면서 옆으로 비빔질을 합니다. '뭐여?'하는 마음으로 꿈쩍을 않다가, '그래, 고 1센티미터가 그리도 그립더냐?’'하는 마음으로 옆으로 옮겨 앉습니다. 책을 읽으며 웅크리던 몸이 더 웅크리게 됩니다. 덩치는 나보다 작으면서 더 넓게 앉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란, 참.

자동계단을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계단이 아닌 자동계단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제 앞으로 슥슥 지나갑니다. '사람 앞으로 함부로 지나가지 말라'고 배운 적이 없을까? 젊은 사람도, 어린 사람도, 나이든 사람도? 다른 사람 가는 길을 그렇게 막으면서 가고 싶을까? 몇 초나 더 빨리 간다고.

대화역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립니다. 버스가 멎을 때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루루 달려듭니다. 이웃사람한테 자리를 내어주고 살며시 기다리는 사람을 못 봅니다. 아주 드물에, 타는 문 앞에서 법석이면서 먼저 타려고 하는 사람들 뒤에 떨어져서 맨 나중에 타는 사람을 봅니다. 백에 하나쯤? 또는 이백에 하나쯤? 모두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공공질서를 배우지 않았는가.

버스는 잘 달립니다. 참 빠르게 잘 달립니다. 굽은길을 돌 때에도 빠르기를 줄이지 않고, 정류장에 닿을 때는 확 멈춥니다. 퍽 드문드문 느긋한 버스를 만납니다. 그렇지만, 버스를 타고내리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빨리빨리 제 갈 길을 가고 싶어할 터이니, 버스 모는 분들이라고 얌전하거나 다소곳하게 차를 몰지는 못하겠구나 싶습니다.

... "엄마는 고치에 다녀와야 해. 이모부가 강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대. 그 아들이, 그러니까 사요코한테는 이모 아들이니까 이종사촌이네. 그 아이가 충격 때문에 병이 난 거 같아." 그렇게 말하고 엄마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 결국 외톨이가 되고 말았어. 그래서 엄마는 시골에 가야 해. 알았지?" 엄마는 그 아이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다케시 오빠야?" 이렇게 묻자 엄마는 순간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74쪽)

옆지기네 식구들과 저녁을 함께 먹은 다음, 텔레비전 앞에 앉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나오는 사람들이 얼굴에 화장품을 떡바르는 이야기, 예뻐 보이지만 알고 보니 뜯어고친 얼굴이구나 하는 이야기, 최진실씨 나이가 얼마쯤 되었을까 하는 이야기, 연예인들이 혼인하고 헤어지는 이야기, 신은경씨가 얼굴살이 쪽 빠진 이야기 ……

옆지기 어머님이 연속극을 봐야 한다며 세 군데 것을 착착착 돌리며 함께 봅니다. 세 방송사 연속극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모두들 이야기 짜임새가 같습니다. 으리으리한 비싼 집이 있는 부자집에 사는 젊은 아이 하나와 서울 변두리에서 가난하게 사는 집 아이 하나가 서로 사랑하지만, 두 집안이 기싸움이라도 하는 듯 으르렁거리면서 비꼬는 이야기. 그런데 '가난한' 집이라고 해서 나오는 사람들 집크기나 살림살이나 여러 가지를 보면, 조금도 '가난해 보이지 않'습니다. 집에서 된장국을 먹고 홍어찜에 막걸리를 마신다고 '가난한 살림'이 아닐 텐데.

태어날 때부터 외제차만 타고다녔다고 하는 부잣집 여주인공이 '차면 다 똑같은 차지, 외제차는 싫고 무슨 차만 탄다는 게 어디 있어?'하고 꺼내는 말은 철없는 소리를 넘어서, 불쌍하다고 느껴지는 말이지만, 이런 모습은 연속극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기 집 둘레만 알고, 이웃사람 삶은 모르며, 우리 삶터를 차지하는 훨씬 많은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에는 도무지 눈길을 두지 않고 혼자만 배부르고 넉넉하면 그만인 사람들한테 무슨 웃음 묻어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는지. 부잣집이라고 하며 나오는 사람들 집안살림은 죄다 '옛날 유럽 냄새'가 나는 모습이며, 스스로를 '공주나 귀족'이라도 되는 듯이 여깁니다. 유럽 냄새 나는 물건을 쓰고 발레를 배우고 서양 차린옷을 입으면 잘나가는 사람이 될까요.

... "엄마, 도요토미 히데요시 알아? 그 사람이 조선을 침략해서 조선사람들의 귀와 코를 베어 오게 했다던데, 정말이야?"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아버지가 조금 화가 난 듯이 물었다. "미키네 엄마가." "그랬구나. 흠, 조선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지."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요!" 엄마가 아버지를 흘겨보고는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건 사실이야. 일본에서 천하를 얻은 히데요시가 바다 건너 중국까지 자기 밑에 두려고 조선을 침략했단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것이 침략전쟁이라고 말하지 않지. 어느 나라 대통령이나 수상이나 왕도 모두 거짓말을 하면서 전쟁을 한단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 옳다며 싸우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야 한다는 거야. 정의로운 전쟁 따위는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어." 엄마가 힘을 주어 말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121∼123쪽)

엊저녁, 옆지기가 동생과 저를 이끌고 동네 이웃 몇 곳을 찾아갔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읽고 퍽 좋았다고 느낀 책을 선물해 주자고 해서 다섯 권을 들고 왔고, 한 집 한 집 찾아가면서 나누어 주기로 합니다. 한 집은 길에서 만나서 건네고, 두 집은 아이들만 집에 있습니다. 두 집은 비어서 못 건넵니다. 아이들만 있는 집 부모님은 어디에 가셨을는지. 아이들은 집안에 박혀서 무엇을 하며 놀는지.

아파트는 썩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제법 집이 많은데, 놀이터에 나와서 노는 아이는 없습니다. 놀이터 한켠에 마련된 운동기구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저녁 이맘때는 시내에 나가서 흥청망청 즐기며 노는 때인지, 또는 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리는 때인지, 또는 집에서 컴퓨터나 텔레비전을 끼고 노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지.

모래밭도 있는 놀이터에서 잠깐 몸풀이를 합니다. 거님길 돌 사이사이 살아가는 개미귀신을 내려다봅니다. 새잎이 돋아나려고 하는 은행나무를 봅니다. 아직도 흐드러진 노란 꽃을 늘어뜨린 개나리를 봅니다. 개미귀신 집 옆 조그마한 틈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올린 민들레와 작은 들꽃을 봅니다.

옷가게가 가득가득 모여 있는 이곳으로 자가용을 몰고 와서 옷 장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길가에 심긴 벚꽃 구경을 합니다. 벚꽃잎이 소리없는 눈으로, 따뜻한 눈발처럼 날립니다. 발밑을 내려다보지 않으면 벚꽃에 넋이 빠져서 들꽃을 그예 밟아버리겠습니다.

... "이영동이 시노부 누나 남편의 이름인가?" 미키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아저씨의 부모님도 여기에서 일하셨나? 그래서 아저씨가 이런 노래를 만든 걸까?" 미키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로 미키 할아버지도, 시노부 언니 남편의 부모님도 모두 강제로 끌려와 여기서 일했을까? 왜 그런 힘든 일을 해야만 했을까?...  (167쪽)

벚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벚나무 옆에 민들레와 보라빛 들꽃 한 송이가 함께 자랍니다. 지금 우리 나라 어디를 가도 벚나무가 무척 많은데, 벚꽃도 보기 좋기는 한데, 온통 벚나무로만 거리나무를 심는 일도 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 일산 아파트 꽃 벚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벚나무 옆에 민들레와 보라빛 들꽃 한 송이가 함께 자랍니다. 지금 우리 나라 어디를 가도 벚나무가 무척 많은데, 벚꽃도 보기 좋기는 한데, 온통 벚나무로만 거리나무를 심는 일도 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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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옷 사러 나온 젊은 부부가 벚꽃을 보다가 "사쿠라가 많이 폈네?"하고 서로 이야기를 하며 우리 옆을 지나갑니다. 이 집 아이한테는 벚꽃이 아닌 사쿠라가 보이겠네요. 멀찍이 지나가는 젊은 아이 아버지가 "저기 고무신 신은 사람 있네?"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제 귀에까지 들립니다. 슬쩍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왜 이렇게 똥배 나온 사람들이 많어?"하고 내뱉고 싶었으나 참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젊은 사람들 배가 꽤 뽈록뽈록입니다.

백 군데는 훨씬 넘는 옷가게들이 장사가 될까 싶었지만, 새 옷가게는 더 늘어납니다. 앞으로 더욱더욱 늘어날까요. 연속극을 보면, 부잣집이든 가난하다는 사람들 집이든, 마루나 방 어디에도 책을 차곡차곡 마련해 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옷가지는 셀 수 없이 많고 장식품과 그림붙이는 촘촘히 걸려 있고 집은 집대로 널찍합니다. 마음은 가꾸지 않고 몸치레만 해야 돈 많이 벌고 이름값이 높아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마음 가꾸기란 우리가 눈길을 쏟을 데가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책 하나 읽기 빠듯하도록 바쁘기 때문인가요. 책 하나 읽기 빠듯하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놀이를 즐기느라 그렇게 버거운가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몸은 얼마나 추스르는 우리들인가요.

... 하지만 범인이 잡혔어도 사카모토 할아버지의 집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유키코 아주머니네 벚나무도 살아나지 않았다...  (204쪽)

책이란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책은 이웃을 살피는 눈길입니다. 여태 몰랐던 일을 느끼게 해 주고, 이제껏 돌아보지 못한 세상을 가만히 돌아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멀디 먼 남이 아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보여줍니다. 얼핏설핏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삶터를 차분하게 되새기도록 도와줍니다. 집식구뿐 아니라 살가운 동무한테 일어나는 일을 팔짱낀 채 고개 돌리지 말라며 넌지시 알려줍니다. 저마다 다른 자리에 있으나 모두들 한 마을에 살고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지금 우리 세상은 책하고 담을 쌓습니다. 책에 담긴 이웃사람 피땀하고 담을 쌓습니다. 책에 이야기를 남기는 사람들 눈물과 웃음하고 담을 쌓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책으로 엮어내지 않고, 나라밖 이야기를 옮겨내기만 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는 가운데, 우리 삶이 녹아든 책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춥니다.

옛동무네 집에 놀러가서, 어린 딸내미하고 함께 어울리기도 합니다. 저는 조금 옆에 떨어져 앉아 사진을 찍어 주곤 하는데, 이 아이가 올해 유치원을 거쳐서 곧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동안, 저라고 하는 이웃 아저씨를 보면서 무엇을 배우고 느끼고 받아들일는지.
▲ 옛동무네 집에서 옛동무네 집에 놀러가서, 어린 딸내미하고 함께 어울리기도 합니다. 저는 조금 옆에 떨어져 앉아 사진을 찍어 주곤 하는데, 이 아이가 올해 유치원을 거쳐서 곧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동안, 저라고 하는 이웃 아저씨를 보면서 무엇을 배우고 느끼고 받아들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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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어른이 되어 가는 동안

지금은 책을 가까이하면서 살아가지만, 어릴 적에는 그다지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많지는 않아도 집에는 책이 늘 있었고, 학교에도 모자라나마 학급문고가 언제나 있었습니다.

... 나도 미키 옆에 가만히 앉아 보았다. 창문 반대편에 큰 도로가 있는데도 차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나도 꼭 먼지를 뒤집어쓴 궤짝이나 나무상자가 된 것 같았다. 미키가 왜 여기에 있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47쪽)

반공독후감과 과학독후감 따위를 한 해에 두 차례씩은 써야 해서 반공동화와 과학동화를 자주 읽어야 했습니다. 반공동화를 읽을 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빨갱이는 나쁜 놈이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나아가고부터 억지스러운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으로 저녁 열 시까지 매이고, 머리는 아주 짧게 깎아야 하고, 교사들은 당구채와 각목과 밀대자루와 야구방망이를 당차게 들고 다니며 휘두르는 한편, 남학교뿐이었던 인천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툭하면 싸움질에 동무들 괴롭히기를 보면서, 북녘을 깎아내리고 못난 나라라고 헐뜯는 일이 우습게 느껴졌습니다.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묶어 놓으니, 따분하게 문제모음 풀이에만 시간을 보내기 싫어서 신문을 읽게 되고 교과서 아닌 책을 읽게 됩니다. 추천권장도서 목록으로 뽑은 100권도 찾아서 읽지만, 이 목록에 들어가지 않은 책을 하나하나 손수 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찾아서 읽습니다.

... 문득 시노부 언니와 손을 잡고 야시장에 오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시노부 언니는 늘 미키도 데리고 가자고 했다. 우리는 다 엄마들이 밤늦게까지 일하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함께 노는 일이 많았다...  (111쪽)

국민학교 다닐 때에는 책하고 가까이 지내지 않았어도 또래 동무와 손위 손아래 형 누나 동생하고 어울리는 가운데, 또 이웃 아주머니와 아저씨한테 귀여움을 받는 가운데, 또 이웃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 꾸지람을 듣는 가운데(개구쟁이 짓을 많이 해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기쁨과 부끄러움을 배웠습니다. 중학교부터는 또래 동무 만나기도 힘들어지고, 한 반에서도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워집니다. 다른 아이들은 당구장에 나가고 몰래 술집에도 가고 사랑놀이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했지만, 저는 이런 놀음놀이가 내키지 않았습니다. 몸을 내돌리기 싫었고 마음을 망가뜨리기 싫었습니다.

... "선물은 준비하지 못했어. 하지만 이거……." 미키 엄마는 붉은 봉숭아꽃 몇 송이를 뜯더니 꽃잎을 짓이겼다. 그러고는 시노부 언니의 손톱 하나하나에다 꽃잎을 정성스럽게 문질렀다. 시노부 언니의 손톱은 발그레한 불빛이 켜진 듯 예쁜 붉은색이 되었다. "고마워요, 아주머니." "봉숭아는 생명력이 강한 꽃이야. 그래서 시들어도 금방 씨앗에서 싹이 나와 한여름에 두 번씩 꽃을 피우지. 우리 고향에서는 여름이 되면 어느 집에서나 봉숭아가 가득 핀단다. 불 타듯 아름다워서 ……."...  (127쪽)

중학교 2학년 때부터인가, 어머니가 하는 여러 가지 부업을 형하고 거듭니다. 국민학교 때에도 거들었지만, 이때에는 신문돌리기를 거들고, 아랫집 아주머니 우유돌리기를 거듭니다. 그리고 중3 때에는 윗집 아이 과외를 해 주며 적으나마 제가 쓸 돈을 법니다.

... 나는 꾸러미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자전거 열쇠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창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제 다케시 오빠가 빌려 왔다는 자전거에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다. '사요코에게. 중고이지만, 첫 월급 탄 돈으로 어제 샀어. 다케시가.' 나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오빠……!'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오빠! 오빠! 오빠!' 나는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나를 두고 가지 마! 오빠, 날 두고 가지 마!' ..  (209쪽)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나마 방학 때 하던 신문돌리기를 못합니다. 여느 날에는 중학교 적보다 오랫동안 학교에 붙잡히니 어머니 부업 거들기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한 주에 두 차례씩, 학원 가는 길에 한 시간쯤 짬을 내어 책방 나들이를 하고, 주말에 인천 시내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할 때에도 서너 시간씩 옛 신문 읽기와 묵은 잡지 읽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헌책방 책맛을 알게 되어, 고2 때부터는 주말과 명절에는 헌책방에 파묻혀 책이 이끌어 주는 길로 몸을 맡기면서, 학교와 집이라는 울타리에서는 도무지 만날 길이 없는 사람들을 책을 거쳐서 만납니다.

제가 겪을 수 없는 일을 겪은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제가 보지 못한 일을 본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한 사람들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3)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라는 이야기책

아이는 아이입니다. 아이는 아이 눈길대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고 생각을 합니다. 부모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동안, 아이 나름대로 어떤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헤아립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골목길에서, 아이 나름대로 이 골목길 삶이 자기한테 어떻게 다가오는가를 느낄 테지요.
▲ 할아버지와 아이 아이는 아이입니다. 아이는 아이 눈길대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고 생각을 합니다. 부모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동안, 아이 나름대로 어떤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헤아립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골목길에서, 아이 나름대로 이 골목길 삶이 자기한테 어떻게 다가오는가를 느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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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세 해에 걸쳐서 읽은 이야기책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를 덮습니다. 덮고 나서 한참 동안 숨을 길게 내쉬고 하늘을 봅니다. 옥상마당에 올라 햇볕을 쬐면서 바람을 맞아 봅니다. 넓게 펼쳐져 보이는 동네 골목집들 지붕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지금은 아직 그대로 있기에 지붕이 두루 보이는 동네 골목집들입니다.

그러나 머잖아 이곳이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또 '도시환경정비'라는 이름으로, 또 '주거환경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싹 사라져 버리면, 우리 집 옥상마당에서 수봉공원 있는 데에까지 바라보던 모습은 끝입니다.

예전에는 이 옥상마당에서 자유공원이나 인천 앞바다까지 내다보았을 터이지만, 이제는 새로 솟은 엄청난 아파트와 갖가지 건물 때문에 막혀서 보이지 않습니다. 머잖아 태어날 우리 집 아이는, 이 집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을는지. 나는 어버이 된 사람으로서 무엇을 보도록 하고 무엇을 느끼도록 하고 무엇을 받아들이도록 이끌 수 있을는지.

... '내가 꾼 것은 그냥 꿈이 아니야. 언젠가 어딘가에서 정말로 보고 들은 것이 보고 싶은 얼굴이 되어 나타난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꿈의 조각들이 모여들면서 하나의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눈이 빨갛게 되도록 울던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요코, 이리 오렴, 안아 줄게."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  (98쪽)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에 나오는 사요코는 곧 중학생이 되는 초등학교 어린아이입니다. 훨씬 어려서는 미처 모르고 있었으나, 식구들 가운데 자기한테만 갓난아기 적 사진이 없음을 이상하게 여기며 곧잘 어머니한테 자기 어린 날을 여쭙곤 하지만, 속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가끔 꾸는 꿈에 낯설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지 않은 아저씨와 오빠를 만나고, 오빠 이름을 듣습니다. 어렴풋하던 꿈속 모습은, 차츰차츰 환해지면서, 지금 자기를 길러 주고 있는 부모는 친부모가 아님을 시나브로 느낍니다.

이러는 가운데 자기가 살아가는 조금 가난한 골목집에서 이웃사람들, 그러니까 이웃 어른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배웁니다. '나이에 걸맞은 슬기'를 이웃 어른들한테 익힙니다.

그리고, 자기 친오빠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찾아와서 말없이 주고 간 선물(자전거)을 받고는, 여태껏 흐릿하게 어려 있던 자기 그림자를 또렷하게 깨닫습니다.

... 이 작품은 내가 어린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 거리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만났고, 아픔을 겪었습니다. 나는 그 거리에서 삶과 죽음을 보았고,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배웠습니다. 나는 그 거리만이 지니고 있던 슬픔의 깊이와 삶의 소중한 기쁨을 작품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1960년대가 이야기의 배경이지만, 잊어서는 안 될 그 시절의 가치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214쪽 / 글쓴이 말)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를 쓴 분은 두 부모를 두었습니다. 낳은 부모와 기른 부모. 또한, 낮은자리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동네에서 이웃사람과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이 작품,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에는 글쓴이 고시미즈 리에코님이 '자기 스스로 고를 수 없이 주어졌던' 운명대로, 그 삶대로, 리에코님이 찬찬히 받아들인 발자취가 담깁니다.

리에코님이 눈물로 살았다면 이 작품에 눈물이 담길 터이고, 리에코님이 웃음으로 살았다면 이 작품에 웃음이 담깁니다. 리에코님이 재일조선인 역사를 어릴 적부터 하나둘 들으면서 컸다면, 이 작품에도 재일조선인 발자국이 살포시 배입니다. 이리하여, 리에코님이 '서울과 부산을 물길로 이으려는 정책이 거침없이 밀어붙여지는 한국땅'에서 태어났다면, 이러한 형편을 몸속 깊이 삭이는 가운데 당신 삶을 이야기책 하나로 남겼겠지요.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여러 가지 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

고시미즈 리에코 지음, 이시이 쓰토무 그림, 조영경 옮김, 산하(2006)


태그:#책읽기, #고시미즈 리에코,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 #이야기책, #어린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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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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