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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17대 총선 서울의 한 부재자 투표소에서 선거벽보를 살펴보고 있는 대학생들.(자료사진)
 17대 총선 서울의 한 부재자 투표소에서 선거벽보를 살펴보고 있는 대학생들.(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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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성북구에서 만난 40대 주민과의 대화
"선거요? 누가 나왔는데요?"

"민주당은 OOO 후보고, 한나라당에선 OOO 후보가 출마했잖아요."
"그래요…? 그 날도 일을 나가야 해서 (선거 참여가) 힘들 것 같네요."

# 장면 2: 성동구 유세장에서 만난 30대 여성의 반응
A후보 선거운동원이 후보의 약력과 공약을 담은 명함을 건네자 마지 못해 받은 젊은 주부, 잠시 후 뒤를 돌아보고 선거운동원이 사라진 걸 확인하자 받은 걸 "휙-" 하고 내던진다. 부는 바람에 날려가 도로 위를 뒹구는 명함.

# 장면 3: 동작구 지하철역에서 만난 대학생 커플의 4월 9일 계획
"이 좋은 봄날에 뭐하러 그런 걸(투표) 하러가요. 여자친구랑 놀이공원 갈 건데요."
"여자친구분은 어떡할 겁니까? 놀이공원엔 일찍 투표하고 가도 되잖아요." 
"남자친구와 같은 생각이에요. 나 하나 투표한다고 한국사회가 바뀌겠어요."

18대 총선, 아니 '정치 일반'에 대한 한국사회의 냉소와 무관심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기자생활 9년만에 처음으로 해본 2주간의 총선·정치 관련 취재. 맡은 일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 '이번 총선의 의미' 등을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구체적이거나 친절하지 않았다. "없다" "모른다, 그런 것 묻지마라" "누가 돼도 마찬가지 아닌가" "먹고 살기 바쁜데 선거는 무슨…" 정도로 요약되는 대다수 유권자들의 반응은 질문을 던진 사람을 머쓱하게 만들 만큼 차가웠다.

기자가 총선 취재를 위해 돌아다닌 지역은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 여기에 사전 여론조사를 벌인 언론사들까지 공히 인정하는 이른 바 '격전지'.

국회의원 배지를 놓고 피 말리는 대결을 벌이고 있는 후보들의 각축장임에도 정작 그 싸움의 우열을 결정해줄 '한 표'를 가진 주민들의 태도는 '소 닭 보듯'이란 속담을 떠올릴 정도로 시큰둥했다. 일찌감치 '투표 포기'를 선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뼛속 깊이 파고든 정치와 선거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는 대체 무슨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까?

남발하는 장미빛 공약과 후보들의 공손한 태도... "선거 때 뿐이잖아"

"재개발과 재건축에 대한 지역민의 기대를 뉴타운 건설로 실현하겠습니다."
"중간에서 끊긴 지하철을 이 동네까지 끌어오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려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 좋은 학교를 유치하고, 교통혼잡을 해소시키겠습니다."
"정부예산을 대폭 지원받아 낙후된 OO구를 강남 이상으로 잘 살게 만들겁니다."

비단 한 지역만이 아니었다. 후보들이 자신의 공약을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18대 총선 유세장에선 위와 같은 장미빛 공약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그들이 유권자에게 한 모든 약속이 이뤄지기만 한다면 앞으론 한국사회를 지상낙원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유세를 지켜보는 주민의 상당수는 후보들의 공약을 조소했다. '격전지'로 불리는 한 지역구에서 만난 박OO씨는 "저거요? 지난번 선거에서 했던 약속하고 똑같아요, 말로는 뭘 못해"라며 인상을 찌푸렸고, 50대 노점상은 한 술 더 떠 "장사하는데 시끄럽지 않게 스피커 소리나 좀 줄이라"며 화까지 냈다.

유세차량 앞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후보자의 이름을 연호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의 기호(숫자)를 그려내는 이들은 소수의 공식 선거운동원과 몇몇 자원봉사자에 불과했다.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고 깍듯하게 악수를 청하는 후보자들의 '공손한 태도'도 진심이 아니라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았다.

한 후보가 재래시장을 돌며 상인들의 손을 잡고 "나를 뽑아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남기고 사라진 뒤, 그 곳에서 20년 넘게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다는 60대 할머니는 "선거 때니까 저러지, 끝나고나면 높은 분들이 우리 같은 걸 사람으로나 생각하나요"라며 쓰게 웃었다.

매번 총선이 가까워오면 어김없이 남발되는 장미빛 공약. 유권자들은 그것들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고, 그 불신이 냉소를 낳고 있었다. 여기에 선거 때만 반복되는 '국회의원의 친절'로는 '서민들의 팍팍한 삶'이 바뀔 수 없다는 자조와 푸념이 정치적 무관심을 부르고 있었던 것.

18대 총선을 취재하는 2주 동안 대략 100여명의 유권자를 만났다. 그들 중 70% 이상은 자신의 지역에 출마한 후보들이 "당선만 되면 서민은 안중에도 없어질 것이고, 자신을 공천해 의원으로 만들어준 보스에게만 충성하며, 국회에서 이전투구의 싸움판이나 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지난해 12월 치러진 제17대 대통령 선거 투표에서 한 유권자가 투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치러진 제17대 대통령 선거 투표에서 한 유권자가 투표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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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찍어야' 조금씩이라도 바뀌지 않을까

'민심은 천심'이라 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위와 같다면 이들의 냉소와 무관심은 한국의 정치와 정치인이 자초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선거를 하루 앞둔 거리엔 "찍어봐야 아무 것도 안 바뀌는데 뭐하러 선거를 해"라는 푸념이 비등하고, "투표를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권리"라는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다가서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투표의 권리'를 얻기까지 과정을 떠올려보자.

노예와 여성에겐 주어지지 않았던 참정권의 획득을 위해 수백 년 전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도 투표권을 달라"며 피를 흘렸다. 선거와 선거권, 투표와 참정권은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얻어낸 '민주주의의 꽃'인 것이다.

식상한 수사같지만, 냉소와 무관심으론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 세상을 구하는 건 희망을 향해 행동하는 몸짓이다. 정치인들은 투표를 통해 구현된 민의 즉, 희망의 세상을 꿈꾸는 국민들의 뜻을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이 있었기에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살만하게 바뀐 게 아닐까.

대통령 탄핵으로 정치적 관심이 고조돼 있던 17대 총선의 투표율은 60.6%. "이슈도 정책도 없는 맥빠진 선거"라고 이야기되는 18대 총선의 투표율은 50% 초반대에 머물 것이란 예측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유권자의 절반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할 것이란 이야기다.

정치인들이 가장 흔히 듣는 비판이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권자들도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투표'라는 민주시민의 기본은 실천하지는 않은 채 정치인 비난의 '말잔치'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욕하면서 닮아가는 과오를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선택하기 위해서라도, '조금씩'이나마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돌려세우는데 일조한다는 자부심으로 투표장을 향하는 발걸음이 절실한 때다.


태그:#18대 총선, #투표, #참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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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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