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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장영실. 우리는 이 조합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드라마 <대왕세종>.
 세종과 장영실. 우리는 이 조합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드라마 <대왕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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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녕대군, 장영실을 '전향'시키다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가담한 '천재' 과학기술자 장영실이 충녕대군 측에 체포되어 군기감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는다. 배고픈 '피의자'에게 국밥 한 그릇을 미끼로 내밀며 '수사관'들은 배후를 대라고 압박한다. 배후만 확 불면 너의 장래는 우리가 보장해주겠다면서.

수사관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텅 빈 사무실. 국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뭔가 고심하던 장영실. 국밥이 '사라진' 동일한 사무실에서 충녕대군을 단독 면담한 장영실, 드디어 '전향'을 약속한다. 반가운 표정의 충녕대군. 뒤이어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전이 개시된다.

지난 3월 30일 방영된 <대왕세종> 제26회에서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충녕대군과 장영실이 만났다는 점이다. 충녕대군이 직접 장영실의 '전향'을 관철시켰고, 군기감 책임자 최해선(최무선의 아들)도 충녕에게 "마마께서 영실이의 지붕이 되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미천한 관노 장영실을 전격 발탁하여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후원해준 대왕 세종의 위대한 자질. 동지들을 배신하면서까지 기꺼이 성군의 품 안에 안긴 장영실의 '실용주의'에 기반한 선택.

이 같은 <대왕세종>의 설정은 '장영실' 하면 '세종대왕'이 떠오르는 한국인들의 통념을 생각할 때에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비단 <대왕세종>뿐만 아니라 많은 참고 서적에서 장영실하면 당연히 세종대왕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지난 기사 '역사 속 장영실은 <대왕세종> 장영실과 다르다' 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보강수사'가 좀더 필요하다. <대왕세종>에서는 장영실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하고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대한 소탕에 들어갔지만, 세종 임금과 장영실의 실제 관계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보강수사를 해야 한다. 왜?

장영실은 이미 태종이 주는 '국밥'을 먹고 있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9월 16일자 기사의 내용을 아래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버지는 본래 대원(大元,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공교한 솜씨가 남들을 능가하므로 태종께서 지키셨고 나 역시 그를 아끼고 있다."

여기서 '사직'이란 것은 오위(五衛)의 정5품 벼슬로서, 공신이나 그 자제들에게 봉급을 주기 위해 만들어놓은 직책이었다. 그리고 관직 앞에 붙어 있는 행(行)·권(權)·수(守) 등은 직무대행이나 임시직 등을 가리킬 때에 사용하는 표현이다. 

참고로,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실록 국역본을 제공하고 있지만, 번역상의 오류가 군데군데 있어서 이 글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하지만, 내용의 뼈대는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의 기사에 따르면, 장영실의 '공교한 솜씨'에 처음 주목한 군주는 태종이었다. 관노 신분의 장영실을 중앙으로 처음 발탁한 군주는 바로 태종이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태종 시기에 여러 관노 출신을 파격 발탁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대왕세종>에서는 태종의 양위가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도 장영실이 여전히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가담한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의 역사 속에서 장영실은 태종 시기에 이미 국왕의 발탁을 받고 열심히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태종 임금이 주는 '국밥'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장영실의 과학 재능을 꽃 피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은 바로 세종 임금이 아니었는가? 물론 맞는 말이다. 장영실이 역사에 남는 과학기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세종 임금 덕분이었다.

위에서 소개한 세종 15년 기록의 뒷부분에서도 '임인·계묘년 무렵에 세종이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를 제수하려다가 이조판서 허조 등의 반대 때문에 철회했다가 그 뒤에야 상의원 별좌 임명을 관철시킨 적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세종 임금이 좀 무리를 해서라도 장영실을 높이 등용하려고 애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록에서 도리어 세종-장영실 조합 못지않게 태종-장영실 조합의 의미도 상당히 컸을 가능성을 도출해볼 수 있다. 위의 기록에서 세 가지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임인·계묘년은 1422·1423년으로서 세종 4년 및 5년에 해당하는 때다. 그리고 상의원 별좌는 대궐 내의 재물을 관리하던 상의원의 벼슬로서 정5품 혹은 종5품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그와 아울러 이조판서 허조 등이 장영실에 대한 상의원 별좌 임명을 반대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것이 초특급 고속 승진이기 때문이 아니라 장영실이 기생의 소생이기 때문에 반대했던 것이다. 왕실 재물을 다루는 자리에 천민 출신을 임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종 초기에 장영실을 5품 벼슬에 임명하는 문제가 거론되었다는 점, 이조판서 허조 등이 반대한 것은 그것이 초특급 승진이기 때문이 아니라 장영실이 기생의 소생이기 때문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에 우리는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장영실이 그 이전에 이미 5품 벼슬에 근접할 만한 다른 벼슬을 받았을 가능성 말이다. 아무 관직도 없는 '초짜'에게 7품~9품도 아닌 5품을 곧바로 제수한다는 게 납득이 안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태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에, 비록 실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세종 4년 이전에 그가 그보다 낮은 벼슬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생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상의원 별좌를 받지 못했다가 그 뒤에 얼마 안 가서 별 탈 없이 그 자리에 임명된 것을 보면, 장영실이 그 이전에 어느 정도의 벼슬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만약 장영실이 그야말로 '초짜'였다면, 정부 관료들 사이에서는 '저런 초짜에게 어떻게 5품 벼슬을 주느냐?'는 비판이 분명히 나왔을 것이다. 장영실에게 그런 결함이 있었다면, 굳이 그 출신성분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신분제 사회였다고 해도, 왕실에서 총애하는 인물을 놓고 그 출신을 문제 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영실이 그 이전에 이미 벼슬을 받았다면 실록에 왜 그런 내용이 없느냐? 이런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록에서 모든 것을 다 기록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실록보다 훨씬 더 자세한 중국 25사(史)에서도 특정 개인의 관직을 모두 다 소개하지는 않는다.

세종 초기 이전부터 관직에 종사했을 수도...

장영실에 관한 기록 자체가 워낙 적기 때문에 무어라 확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장영실이 이미 세종 초기 이전부터 어떤 관직을 받고 연구·개발에 종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장영실의 행적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에서 태종-장영실 조합의 비중도 다시 한 번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위의 <세종실록> 세종 15년 기록의 끝부분을 근거로 또 다른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기사의 끝부분에는, 황희가 태종 시대에 평양 관노 김인 등이 호군(護軍)에 특별히 제수된 특례를 소개하면서 장영실의 경우라고 이런 특례가 불가할 이유는 없다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행사직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더해주자는 세종의 제안에 찬성하면서 나온 말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평양 관노가 한 번에 정4품 호군에 임명된 사례가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장영실 역시 세종 때에 5품 벼슬에서부터 출발했을 수 있지 않느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다. 워낙에 기록이 적으므로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위 기록과 관련하여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태종과 장영실. 우리는 이 조합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드라마 <대왕세종>.
 태종과 장영실. 우리는 이 조합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드라마 <대왕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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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에 따르면, 황희는 다른 천민들이 호군에 임명된 것과 장영실이 호군에 임명되는 것을 모두 다 '특례'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세종 15년 이전에 장영실은 이미 관직을 갖고 있었다. 세종 5년과 세종 15년의 중간에 그는 이미 상의원 별좌(5품)와 행사직(정5품)에 임명된 상태였다.

정5품 벼슬을 하고 있는 장영실에게 정4품 호군 관직을 더해주는 것을 황희가 특례라고 말한 점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특례라는 것이 파격 승진을 가리키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관직이 없는 사람에게 혹은 관직이 매우 낮은 사람에게 높은 관직을 주는 것을 특례라고 말하는 게 아닌 것이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그러하다.

황희가 평양 관노 김인의 호군 임명을 특례라고 한 것은 김인이 받은 첫 관직이 호군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호군이라는 자리 자체가 관노 출신이 임명될 수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호군이란 관직은 오위의 벼슬로서 이 역시 주로 공신이나 그 자제들에게 봉급을 지급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관노 출신을 임명한다는 게 양반 관료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논란의 중심이 된 천민 출신자들이 위와 같이 당시 천민 그 이전부터 관직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출신들의 승진과 관련하여 논란이 생긴 것은 그들의 종래 관직이 낮거나 혹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임명될 자리가 본래 양반 귀족들의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점들을 고려할 때에, 우리는 장영실이 세종 4·5년 이전에 이미 관직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도 탐구해볼 수 있다. 장영실이 처음 관직을 받은 시점이 혹 태종 시기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무어라 확언할 수는 없지만, 장영실에 관한 우리의 통념이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에 대한 과도한 평가에 기초한 측면이 있으므로, 이러한 기존의 선입견을 버리고 다양한 가능성을 새롭게 탐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종 이전부터 기술 개발하려는 노력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접근이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인가? 대왕 세종을 흠집 내기 위해서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좀더 중요한 함의가 담겨 있다.

만약 장영실을 포함한 다른 과학기술자들이 세종 이전에 이미 관직을 받고 기술개발에 종사하고 있었다면, 조선 초기의 과학발달이 세종 임금의 천재적 통치의 산물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진행된 한민족의 기술개발 노력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미 고려 후기에 최무선이 화약을 독자 개발하고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지 않았는가? 한민족의 과학기술은 이미 고려 후기 때부터 뭔가 비약적 발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다시 탐구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만약 장영실이 이미 세종 즉위 이전에 관직을 받고 과학기술 개발에 종사했다면, 또 장영실 외의 다른 과학기술자들도 그러했다면, 이는 조선 초기의 과학발달이 이미 고려 후기부터 진행된 시대적·사회적 노력의 과정에서 나온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과학발전이 걸어온 길을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장영실을 포함한 당시 과학기술자들의 행적을 더욱 철저하게 확인해야 한다.


태그:#대왕세종, #대왕 세종, #장영실, #세종,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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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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