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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베이커의 마지막이자 유작 앨범.
앨범 재킷 쳇 베이커의 마지막이자 유작 앨범.
ⓒ Chet B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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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 vs 좋은 음악

쳇 베이커, 그의 이름에서 한없이 허무한 사내의 뒷모습을 본다. 너무 허무해서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느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 에세이>에 “쳇 베이커의 음악에서는 청춘의 냄새가 난다”라고 썼다. 반만 맞는 말이다. 그가 한창 젊었을 때와 마약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고 멋진 연주를 들려줄 때의 모습이다. 그보다 그는 마약과 섹스에 자신을 저당 잡힌 채 어찌할 줄 모르는 무책임한 인간에 가깝다. 마약을 구하기 위해 자기 아내에게 몸을 팔게 했던 인간. 오죽했으면 그와 가깝게 지낸 찰리 데이비슨이 이렇게 말했겠는가! “그는 성인군자의 얼굴을 한 개자식이었습니다.”

쳇 베이커는 나쁜 남자다. 여성을 섹스의 대상이자 도구로밖에 생각할 줄 몰랐다. 술과 마약 때문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가학성향과 어머니인 베라 베이커의 집착에 따른 복합적 트라우마 때문인 듯하다. 부모의 영향, 특히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그에게 ‘마돈나 콤플렉스’에 빠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 세 번에 걸쳐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연주 여행 도중 수많은 여성편력은 그를 권태롭게 했다.

“사는 거, 정말 지겹구나. 쉰 살을 넘긴 다음부턴 삶의 의미가 없는 것 같아”라고 말했던 쳇 베이커. 그는 인생을 방임했다. 자기 인생을 ‘따분하고 너무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다’라고 떠벌이던 그였다. 마약과 섹스로 인해 방치한 자기 인생을 어떻게 추스를 줄 몰랐던 유아적인 사고는 유년시절 부모의 영향이 크다.

쳇 베이커 평전의 부제가 ‘악마가 부른 천사의 노래’다. 그는 인간적으로 ‘악마’의 모습에 가까웠지만 노래할 때는 ‘천사’처럼 보였다. 무책임한 인간의 전형인 쳇 베이커가 연주할 때 사람들은 넋을 놓고 바라본다. 그의 보컬과 트럼펫 연주는 흐느적거린다. 아주 나른하고 권태에 찌든, 삶을 포기한 듯한 그의 퇴폐적 보컬은 묘하게 서정적이고 슬픈 정조를 가지고 있다. 나약하고 애처로운 보컬, 모든 힘을 다 빼버린 듯 읊조리는 그의 보컬은 여성적이어서 언제든 ‘천사’의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릴 듯하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 연주는 구슬픈 멜로디, 결코 높이 올라가지 않는 음역으로 삶의 폐허처럼 들린다. 슬픔이 정점으로 올라가서 듣는 이를 하강하게 하는 허무의 미학, 체념이다. 어떤 사람은 성교할 때 절정에 이르면 죽음을 생각한다고 한다. <에로티즘>의 조르주 바타이유에 따르면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다. 쳇 베이커의 연주는 오르가즘을 넘어선 어떤 허무, 절정에 머물고자 하나, 더 이상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없는 남자의 죽음에 경도된 허무다. 에로스를 넘어 타나토스로 흐르는 사랑은 치명적이다.

‘심연’에 빠지게 하는 ‘My Funny Valentine'

제목처럼 깊어 보이는가?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보이는가?
▲ 잭슨 폴록 '심연' 제목처럼 깊어 보이는가?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보이는가?
ⓒ 잭슨 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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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의 그림 ‘심연’처럼 쳇 베이커의 보컬은 즉물적인 묘한 관능의 냄새가 난다. 여자의 음부를 상징하는 듯한 잭슨 폴록의 그림은 여성을 동경한 그의 무의식이 드러난 작품이다. 불가능한 사랑을 동경한 잭슨 폴록과 어떻게 사랑할 줄 모르는 쳇 베이커, 이 둘은 닮았다.

쳇 베이커의 유작이자 마지막 앨범인 <My Favourite Songs - the last great concert>는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는 마력이 있다. 특히 'My Funny Valentine' 속에는 마약과 섹스, 그 죽음에 이르는 길을 어정버정 걸어가는 쳇 베이커의 발걸음이 담겨 있다. 자기 생을 끝없이 파멸에 밀어 넣으면서, 그 파멸을 통해 ‘심연’의 쾌락에 이르고자 한 쳇 베이커. 그의 음악에는 스스로 삶을 놓아버린, 아니 어떻게 사랑할 줄 모르는 성인이 아이처럼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애틋함이 있다.

잭슨 폴록은 화폭에 그림을 그리지 않고 뿌려댄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물감은 오직 그의 무의식만이 안다.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의식은 현실의 삶보다는, 이곳에 없는, 부재에 대한 열망을 몽상하게 한다. 잭슨 폴록은 ‘심연’을 그리면서 자기(남성) 안에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음부를 통해 부재를 확인하고 끝없이 회의하고 번민한 듯하다.

쳇 베이커의 음악이나 잭슨 폴록의 그림에서 여성에 대한, 여성을 향한 동경이 엿보인다. 쳇 베이커는 그것이 때론 무책임한 자기부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나른하게 읊조리는 보컬이나 연주하다가 쉴 때 트럼펫을 밑으로 향하게 하는 버릇에서 보인다. 잭슨 폴록의 경우 거듭된 사랑의 상처 때문에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동성애 코드, 평소에 침울하다가 술만 취하면 표출되는 폭력성에서 나타난다.

‘다 늦은 가을 노래 - 쳇 베이커’

네 목소리에 창궐하는
구름들을 봐


첫 눈발은
어느 나라 국경을 넘어왔는지
어느 집 뜰 앞을 서성였는지
창문에 와 잠시 발 구르는
바람은 맑은 발굽을 좀 봐


허공에 발 딛고 오는

첫 눈발들을
다시 데려가는 것은
이 시린 많은 지난날들은 아닌지


네 목소리
가슴에 몇 개의 적막을 던져
징검다리를 만들고 있다


바람에 돋는 저 징검다리들 좀 봐

- 장석남 시인, <다 늦은 가을 노래 - 쳇 베이커> 전문

장석남 시인은 쳇 베이커의 목소리를 잘 노래하고 있다. 쳇 베이커의 삶을 “허공에 발 딛고 오는”이란 시어로 묘사했고, 그의 정처 없음과 마약과 섹스로 인한 굴곡의 인생을 “첫 눈발들을/다시 데려가는 것은/이 시린 많은 지난날들은 아닌지”로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목소리를 “네 목소리/가슴에 몇 개의 적막을 던져/징검다리를 만들고 있다”고 썼다. 그 가운데서도 ‘가슴에 몇 개의 적막을 던져’란 시어는 압권이다.

쳇 베이커의 목소리는 적막하다. 곽재구 시인이 ‘사평역에서’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호명하며 한줌의 톱밥을/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듯 쳇 베이커는 장석남 시인에게 몇 개의 적막을 던지고 있다. 나에게도 던졌다. 외로운 타향에서 비참하게 객사한 쳇 베이커의 생애는 그 어떤 재즈 아티스트보다 드라마틱하다.

1988년 3월 12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 부근 프린스 헨드리크 호텔 3층 C-20호 객실에 투숙한 쳇 베이커는 다음날 새벽 거리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두개골이 함몰된 상태여서 사인(死因)은 뇌손상으로 판명되었지만, 그것은 아직도 의문인 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는 길 위에 떠돌다 길 위에서 죽었다.

‘쳇 베이커 평전’을 읽어보면 그의 인간성은 도저히 욕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보컬과 트럼펫 연주는 인간적 욕과는 별개로 재즈의 아름다움을 넘어 허무를 지나 폐허에 이른다. 긍정적 의미의 아름다운 폐허!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인간성과 음악은 정반대의 길을 향해 갔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나쁜 놈’이었고 동시에 아주 ‘멋진 음악’을 연주한 탁월한 아티스트였다.


태그:#재즈, #쳇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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