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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바켕 사원은 야소바르만1세가 새수도 야소다라푸라 시가지 중심 바켕산 정상에 새운 사원이다.
▲ 프놈바켕사원을 오르는 코끼리택시 프놈바켕 사원은 야소바르만1세가 새수도 야소다라푸라 시가지 중심 바켕산 정상에 새운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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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툼레이더>를 보면 안젤리나 졸리가 마치 점령군처럼, 낙하산을 타고 거대한 신전에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프놈바켕 사원이다. 일본의 닌자나 미국의 람보가 낙하산을 탄 채 경복궁 지붕에 내린다면 어떤 기분일까? 썩 유쾌한 일이 아님에 틀림없다.

프놈바켕은 크메르제국 4대 왕인 야소바르만 1세가 조상들을 기리며 바켕 산 정상에 지어 시바신에게 헌정한 사원이다. 왕은 참파군(베트남)이나 샴족(태국) 등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롤로우스를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천도를 결심하게 된다. 야소바르만1세는 씨엠립 밀림위에 높게 솟은 바켕을 보고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야소다라푸라'라고 하는 새 수도를 세웠다. 

힌두교의 7개 천국을 형상화해 모두 7층으로 이뤄졌다.
▲ 프놈바켕 사원 전경 힌두교의 7개 천국을 형상화해 모두 7층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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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켕사원 또한 메루산(수미산)을 형상화 한 것인데 제일 윗단에 5개의 탑을 포함하여 모두 109개의 탑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 성소탑을 제외한 108탑은 달의 4가지 형상의 음력 월평균인 27일 주기의 4개월을 의미한다.

중앙의 다섯탑을 둘러싼 5개의 단이 있고 각 단마다 12개의 작읍 탑들이 있는데 12간지를 상징한다. 기초바닥 주위에도 44개의 탑들이 세워져 있다. 모두 7층인 것은 힌두교 신화의 7개 천국을 형상화 한 것이다.

가파른 경사지라 자칫 추락의 위험이 있어 사람들은 조심스레 오른다.
▲ 겸손해야 오를 수 있는 프놈바켕 가파른 경사지라 자칫 추락의 위험이 있어 사람들은 조심스레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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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바켕은 높이는 67m에 불과해 정상까지 오르는데 20여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67m가 높다는 말에 웃을지 모르지만 끝도 없는 밀림의 평원에서 유일한 산 바켕이 높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중국인들이 '하늘아래 최고의 산'이라 부르는 태산도 우리 한라산(1950m)에 훨씬 못 미치는 1545m에 불과하다. 만주벌판에 가보면, 뒷동산 외엔 산다운 산을 발견할 수 없다.

앙코르 와트나 앙코르 톰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이 시기에 프놈바켕은 크메루제국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도굴꾼 출신 프랑스 문화부장관 앙리무어는 바켕산 정상에서 크메르제국의 유적을 내려다보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신전의 계단을 밟고 정상에 오르니 너무도 아름답고 광대한 대자연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건축에 탁월한 심미적 감각을 과시해온 이 민족이 이러한 명당을 골랐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과거 신전 주위에는 백만의 시민들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밀림이 집어 삼켜 버렸다.
▲ 끝없이 펼쳐지는 열대밀림의 평원 과거 신전 주위에는 백만의 시민들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밀림이 집어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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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바켕의 진면목은 사원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울시 3배 크기의 자연호수 톤레샵과 열대밀림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일몰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앙코르 와트의 원경도 '경의' 그 자체다. 오후 6시경이면, 사원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마치 세계의 인종박물관을 보는 것 같다.

당시 앙코르와트의 인구는 백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영역도 태국과 라오스, 베트남을 육박할 정도로 광대했다고. 삼국지에는 당시 중원을 제패했던 한나라와의 전쟁을 치르고 원나라가 주달관을 파견해 교류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고 기록돼 있다.

중앙 성소탑 주변엔 5개의 탑이 둘러싸고 있는 넓은 광장이 있다.
▲ 사원 정상의 넓은 광장 중앙 성소탑 주변엔 5개의 탑이 둘러싸고 있는 넓은 광장이 있다.
ⓒ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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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600년 간 동남아시아를 호령했던 크메르제국을 지탱하던 야소다라푸라의 100만 시민은 마야인들처럼 하루아침에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그 후로 600년간 도시는 밀림 속 전설로만 기억된다. 어디로 간 것일까? 100여년 전까지 크메르인들은 앙코르유적을 신들의 영역으로 여기고, 침범하면 목숨을 잃는다고 생각해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라진 야소다라푸라 시민들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샴족(태국)이 쳐들어 와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학살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노예로 끌고 갔다는 것. 그 이후로 샴족이 태국 최초의 왕조를 세웠으므로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곳곳이 파괴된 사원 아래. 과거 600년 전에는 목재로 지은 승려들의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 사원아래의 풍경 곳곳이 파괴된 사원 아래. 과거 600년 전에는 목재로 지은 승려들의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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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전공사에 동원된 사람만 10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숫자다. 그래서 학자들은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민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버리고 탈출했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그렇다고 사람들의 흔적조차 사라졌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전염병이 돌아 시민들 대부분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도시를 탈출했고 앙코르는 신의 저주를 받은 금단의 땅이 되어 침범하면 죽음에 이르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후 6시가 되면 일몰을 보려는 수많은 인파들로 인종박물관을 이룬다.
▲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 오후 6시가 되면 일몰을 보려는 수많은 인파들로 인종박물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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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2차대전 남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금지된 장난>. 십자가를 훔쳐 죽은 이들을 묻어주던 소년 폴레트의 그것처럼, 나는 항상 내게 금지된 것들을 동경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선 음력 대보름이면 마을 당산나무 주변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 쳤다. 개며 소, 사람까지… 새생명이 태어나면 온갖 오염된 것들을 금지하며 숯을 끼운 금줄을 쳤다. 그 뒤편이 나는 항상 궁금했다.

이제 세상은 철조망을 두른 담장과 첨단 경비시스템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가 근무했던 강원도 양구 휴전선은 2중 3중의 철책에 크레모아와 지뢰까지 설치해 바람 한 점 통과하는 것까지 통제했었다. 새끼줄 너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기억되는 내 유년의 '두려움'은 이제는 너무나 하찮고 유치한 것들이 되어 버렸다. 금줄로도 충분히 보호되던 '아름다운 통제'가 너무 그립다. 

각 층마다 12간지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탑이 세워졌다.
 각 층마다 12간지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탑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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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에서 발원해 캄보디아까지 이르는 톤레샵호수는 옛날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의 각축장이었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해 캄보디아까지 이르는 톤레샵호수는 옛날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의 각축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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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교리를 형상화한 부조
 힌두교의 교리를 형상화한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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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상징인 성스러운 소
 힌두교의 상징인 성스러운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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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프놈바켕, #야소바르만1세, #톤레샵, #야소다라푸라,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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