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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화엄사 순례

 

2007년 12월 10일(월), 아침에 일어나자 몸이 가뿐했다. 무리한 여정이었지만 지리산 일대는 산수도 좋고, 공기도 맑기 때문인가 보다. 세면을 마친 뒤 짐을 꾸려 놓고 카메라만 둘러멘 채 산책길에 나섰다. 

 

일주문에서 화엄사로 가는 길은 이른 아침 탓인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상큼하고 쌀쌀한 공기에 아주 쾌적한 산책길이었다.

 

화엄천의 개울물만 졸졸 흐를 뿐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일주문에서 1킬로미터 남짓 걷자 곧 화엄사가 나왔다. 화엄사 경내도 고즈넉했다.

 

대웅전에는 공양주 스님이 부처님에게 공양을 바치고는 합장배례를 하며 나왔고, 그 옆 각황전에는 세 가족이 젊은 여인의 사진틀을 들고 법당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진속의 여인은 20대 전후로 보였다. 젊은 나이에 열반한 것으로 미루어 깊은 곡절이 있는 듯 하지만, 그 사연을 어찌 물어볼 수 있으며, 그걸 알아서 무엇 하랴. 영정을 앞세우고 법당으로 들어가는 세 가족의 뒷모습을 향해 나는 합장배례하면서 젊은 영혼의 명복을 빌었다.

 

산책에 나선 뒤 내내 말 한 마디 없이 화엄사 경내를 한 바퀴 돈 후 되돌아 화엄사 일주문에 이르렀다. 근처 밥집 주인이 용케도 나그네의 마음을 꿰뚫고는 아침식사가 된다고 불렀다. 우거짓국으로 요기를 한 후 바깥으로 나가니 노고단 정상으로 가는 택시가 정류장에 선 채 나그네를 유혹하였다.

 

노고단 정상 설경을 완상하느냐 마느냐로 잠시 갈등을 일으켜 택시로 다가갔더니 빈 택시였다. 기사를 부르려다가 약속시간을 어길 것 같아 숙소로 돌아가 짐을 들고서 구레읍내로 향했다.

 

구례 매천사

 

반겨 맞은 구례군 고근석 부군수는 나를 문화관광과로 안내했고, 담당 공무원은 문화해설가 김종근씨를 소개했다. 그의 차에다가 짐을 싣고서 매천사로 향했다.

 

김종근씨는 당신 태어난 곳이 바로 매천사가 있는 구례군 광의면으로, 어릴 때부터 보고 듣고 자라서 매천사에 대하여 통달하고 있었다.

 

10여 분 달린 끝에 매천사에 이르렀으나 고즈넉하기 짝이 없었다. 매천사 대문인 창의문은 열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김종근씨는 지금은 비철이라 탐방객이 없지만 설사 관광철이라도 화엄사나 노고단 등지에만 사람이 붐빌 뿐, 이곳은 찾는 이가 드물다고 하였다. 매천사 앞 안내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었다.

 

매천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7호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이곳은 조선 말기 대학자이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1855~1910년)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55년에 건립된 유적이다.

 

매천 선생은 광양 서석촌에서 태어나 고종 20년(1883) 실시된 과거시험에 1등하였으나 시골태생이라 하여 2등으로 조정되었다. 그 뒤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고종 25년(1888) 아버지의 명에 따라 생원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혼란한 시국과 관리들의 부패를 보고 구례로 내려와 시를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던 중 1910년 한일 합방의 비운을 통탄하며 4수의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고종 1년(1864)부터 1910년 한일 합방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매천야록을 썼고, 시문집 원고와 소장 서적 등이 보존되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건물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곧 김종근씨는 열쇠를 관리인에게 얻어와 매천사 대문(창의문)을 열었다. 곧장 대월헌(待月軒)이라는 건물이었는데, 김종근 해설사에 따르면 매천 선생이 기거하시며 집필하시다가 순절한 서재였다고 하였다. 그 오른쪽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었고, 그 옆에는 '梅泉黃先生廟庭碑'(매천황선생묘정비)가 서 있었다.

 

성인문(成仁門)을 열고 뒤뜰로 나가자 매천사(梅泉祠) 재실이 나왔다. 정면에는 매천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유묵도 진열돼 있었다.

 

영정에 묵념을 드린 후 카메라로 열심히 담자 김종근 해설사는 영정 원본을 스캔한 것을 당신이 소장하고 있다면서 흔쾌히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쪽문으로 나가자 여염집으로, 매천 증손부가 홀로 사시는데 외출 중인 듯 기척이 없었다. 김 해설사는 그제야 매천 선생의 고손자도 순천의 한 초등학교에 교감으로 재직 중이라고 귀띔했다. 남도라 그런지 한겨울인데도 텃밭에는 마늘, 파, 배추들이 푸름을 잃지 않고 있었다.

 

지리산 맑은 정기를 받은 매천

 

매천사에서 바라본 언저리 산수가 빼어났다. '인걸은 지령'이라, 산수가 좋아야 훌륭한 인물이 난다는데, 매천은 지리산 맑은 정기를 받아 <오하기문> <매천야록> 등을 저술하며 일본제국주의, 일본 침략의 앞잡이 노릇한 친일세력, 부정부패를 자행한 왕실과 고위관료, 탐학한 수령과 아전들의 비리 등을 준열하게 비판하였나 보다. 

 

김 해설사는 매천사 일대 산수를 설명해 주었다. 매천사에서 노고단, 차일봉이 빤히 보였고 옛 절 천은사도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안내를 부탁하기에는 답사 목적과 멀고 너무 염치없는 일이라 마음속으로 다음 날을 기약하며 구례읍내로 돌아왔다.

 

오는 길 웬 까마귀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 전깃줄에 새까맣게 매달렸다. 사람들은 까마귀를 흉조(凶鳥 흉한 새)로 알고 있으나 사실 그놈은 효성이 지극한 새다.

 

짐승이나 조류들은 자란 뒤 자기 부모를 몰라보지만 이놈만은 늙은 제 부모를 거둔다고 하니 갸륵하지 않은가. 차를 멈추게 한 뒤 한 컷 담았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대접하고자 잘하는 밥집을 물었더니, 김 해설사는 오히려 자기가 대접하겠다고 구례 노인복지회관으로 안내했다.

 

김 해설사는 이곳에서 취업지원센터장으로 근무한 바, 이곳은 구례군 노인들의 복지와 교육을 지원하는 곳으로 한글, 한문, 스포츠댄스, 컴퓨터 등의 강좌를 개설하여 무료로 가르칠 뿐 아니라, 점심까지 무료로 제공한다고 하였다. 사무실에서 당신 컴퓨터에 소장된 매천 영정을 내 메일로 전송한 뒤 식당으로 안내하기에 염치없이 따라 가 배식을 받아 맛있게 먹었다.

 

지자제 실시 이후 각 지방마다 경쟁적으로 주민 복지 향상에 정성을 기울인 결과 요즘은 시골이 도시보다 노인 복지시설이 더 좋다.

 

오전 교육을 받은 뒤 이야기를 나누며 진지를 드시는 어른들을 보니까 도시 공원에서 외로이 하늘을 바라보는 노인들이 안타깝게 보였다.

 

굳이 김 해설사는 구례구 역까지 나그네를 태워 주었다. 나는 김 해설사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용산행 열차에 올랐다.

 

내 집에 돌아온 뒤 매천사 답사기를 쓰려는데 글이 잘 쓰이지 않았다. 매천 선생 고손이 순천에 살고 있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듣지 않았다면 그대로 쓸 수 있지만 어찌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듯 한데 무시할 것인가.

 

다시 김 해설사를 괴롭힌 결과, 순천 월등초등학교에 재직 중이신 황승연 교감선생님과 통화할 수 있었다. 서로 일정을 조정한 결과, 2008년 3월 8일(토) 오후에 순천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홍영기 지음 한국사시민강좌 41집의 <황현>, 국가보훈처 공훈록 등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태그:#매천 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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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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