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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여름, 대학 2학년 무렵이다. 이른바 '닭장차'라 불리던 버스 안에서 난데없는 살풍경이 벌어졌다. 우리는 농민회 지원투쟁을 나갔다가 새벽에 급습한 백골단에게 모두 잡혀 버스에 실려진 뒤였다. 억센 손아귀에 질질 끌려 버스에 올라타자 무차별적인 폭력이 시작됐다.

학생이 반 농민이 반이었다. 여자가 반 남자도 반이었다. 여기저기서 '뻑'하는 두드려 패는 소리와 '억'하는 신음소리들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사람의 말소리라고는 '뻑'과 '억'하는 소리 외에 한동안 다른 말들은 들려오지 않았다.

1986년 여름, 어느 닭장차의 추억

사과탄을 허리춤에 찬 전경. 최루탄과 몽둥이가 난무하던 그때, 사람들에게 '백골단'은 공포 그 자체였다.
 사과탄을 허리춤에 찬 전경. 최루탄과 몽둥이가 난무하던 그때, 사람들에게 '백골단'은 공포 그 자체였다.
ⓒ 이한열 추모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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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난 뒤 하나 둘 때리고 맞는 소리가 그치기 시작했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니들은 어미 아비도 없냐? 자식 같은 놈들이 나를 이렇게 때릴 수가 있느냐, 이 후레자식들아!"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다시 '뻑' 그리고 '억'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고, 몇몇이 비슷한 소리를 다시 외치고 다시 폭력이 시작되는 일들이 번갈아가며 일어났다.

잠시 후 정적이 흐르고 백골단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좌석 팔걸이에 걸터앉아 담배를 나눠 피우며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며칠 전 낳은 딸 이야기, 아내 생일, 저녁 술 약속에 대한 이야기 등.

방금 전까지 언제 그런 무자비한 폭력이 있었는지조차 의심할 만큼 일상적인 대화들이 한동안 오고갔다. 박고 있으라는 고개를 외로 틀어 그들의 모습을 훔쳐봤다. 정말 건장했지만 인상은 수더분한 삼십대 초 중반의 평범한 아저씨들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들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뻘 되는 어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같은 자리에서 나름대로의 가족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해된다. 그들에게 폭력은 단지 직업일 뿐이었다. 회사(경찰서)에 출근하고 업무(폭력)를 보고 동료 직원(동료 백골단)들과 잡담도 나누고 퇴근하면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가거나 동료들과 주점에 앉아 피로를 풀거나 하는 말이다. 

무술 유단자, 특수부대 출신자와 전·의경 출신 중 경찰관으로 특채된 백골단의 모습이었다. 그 백골단은 시위현장에서 '경찰관으로 구성된 체포전담반'이었다. 

20년이 흘러도 솔깃한 유혹, 백골단

군부 정권은 백골단을 만들어 사람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저항은 결코 억압되지 않았다.
 군부 정권은 백골단을 만들어 사람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저항은 결코 억압되지 않았다.
ⓒ 박용수 사진집 <민중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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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어청수 경찰청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업무보고한 "시위 현장에서 경찰관으로 구성된 체포전담반을 신설·운용하겠다"는 내용을 언론을 통해 전해 듣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미 "시위현장에서 활약할 체포전담반을 올해 초 선발하여 7월께 교육이 끝나고 일선현장에 투입할 방침"이라는 말은 '쌍팔년도'식 백골단의 출현을 의미하는 게 아니던가 말이다.

예컨대 시위 현장에서 어디까지나 경찰의 판단에 따라 불법과격시위에 대한 과격시위자를 체포할 경우 발생할 과격한 폭력의 수위가 예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과학적 수사'를 한다고 했다는데, 불법 과격시위에 대처하는 과학적 수사란 것이 지문을 채취하고 유전자 감식을 하는 것은 아닐 터다. 결국 '과격한 진압' 말고 다른 어떤 '과학'이 있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1980년 총으로 집권했던 전두환 정권이 80년도 후반 탄생시킨 백골단의 명성은 시위참가자들에게는 정말이지 악몽 그 자체였다. 무술로 단련된 젊은 경찰관들이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몽둥이를 든 채 시위대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 때면 여간해서는 시위 대열이 흩어지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이미 그들의 폭력성은 여러 방면으로 입증이 되었기 때문에 백골단이 하얀 철모를 쓰고 나타나 있는 모습만으로도 당시의 시위대들은 기가 눌려 버릴 정도였다. 그만큼 백골단은 20여년이 흐른 지금 시위를 막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다시 꺼내들고 싶은 유혹이 강한 활용도 높은 고강도의 공권력임은 사실이다.

왜 사람들은 백골단에게 '불법'으로 저항했나 

그러나 그 살벌하고 끔찍했던 80년대 백골단들은 시위 현장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대한민국에서 '건전'한 시위문화를 정착시키는 데는 일조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위대들은 백골단의 무차별적인 폭력성에 전의를 불태우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대항 수단을 개발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는 피가 튀고 화염병이 난무하는 살풍경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본질은 불법 과격시위의 원인을 제공했던 전두환의 폭압적인 정책이었지 건전한 시위문화 정착에 매달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건전한 시위문화 정착을 위한 백골단의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1987년 6월 대한민국 국민들은 불법적으로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불법'으로 차도를 점거하였으며, '불법'으로 화염병을 던졌고, 끝내는 '합법'으로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20여년이 지나 백골단 비슷한 것을 만들겠다는 어청수 경찰청장의 업무보고를 받은 이명박 대통령의 말씀을 들어보자.

"외국 텔레비전에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한국의 불법 폭력 시위 모습이 비치면 국가적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고 경제 활동에도 영향을 준다."

어 청장의 업무보고를 흡족하게 생각하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니 이명박 대통령은 아마도 21세기 백골단의 탄생을 기꺼이 축하해 주겠다는 것이다. 강산이 변하고 시대가 변했다. 과거 상습적인 불법시위대였다가 일개 평범한 시민으로 거듭나서 살아가고 있는 나조차도 우리나라의 폭력 시위가 2001년에서 2007년 사이 215건에서 64건으로 감소했다는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다.

대통령님, '프렌드'의 불법이나 잘 관리하시죠

이명박 대통령이 걱정하는 국가 브랜드를 떨어뜨리는 것은 사람들의 집회나 시위가 아니라 프렌드, 즉 비상식적인 경영을 하고 있는 기업가들이다. 사진은 지난 11일 강제해산 당하는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 모습.
 이명박 대통령이 걱정하는 국가 브랜드를 떨어뜨리는 것은 사람들의 집회나 시위가 아니라 프렌드, 즉 비상식적인 경영을 하고 있는 기업가들이다. 사진은 지난 11일 강제해산 당하는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 모습.
ⓒ 노동과세계 이기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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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대통령이 바라는 건전한 평화적 시위문화가 정착이 되어가고 있는 아주 진전된 단계에 와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불과 몇 십 건 밖에 되지 않는 옥의 티를 빼내겠다고 역사를 20년을 되돌려 백골단을 새롭게 등장시키겠다는 발상은 좀 도가 지나치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과거 백골단의 활약은 건전한 시위문화를 만드는 데 이바지 한 바가 없었다. 일순간 시위대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는 줬을지언정 그것조차도 오히려 과도한 공권력에 저항하기 위한 대항 수단을 더 폭력적으로 만들어냈을 뿐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하시다 보니 '프렌드(친구)'를 괴롭히는 세력에 대한 미움도 크겠지만 과연 당신의 프렌드가 합리적 경영을 하고 있는지도 돌아보시기를 바란다. 어쩌면 끊이지 않는 시위가 '이랜드'와 같은 프렌드의 불법에서부터 기인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한다.

폭력은 보다 더 강도 높은 폭력을 낳을 뿐이지 경제를 살리는 데는 아무런 실체적 효과가 없다는 것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대통령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앞만 보고 가자고 주장해 왔다. 그 말씀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20여 년 전 백골단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게 영 마뜩치 않아서 드리는 말씀이다.


태그:#체포전담반, #백골단, #비즈니스 프렌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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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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